제460화
드래곤. 그 존재를 본 자는 없다. 인간들은 물론이고 인간보다 훨씬 긴 수명을 가진 이종족들 또한 마찬가지. 오지에 살거나 숨어 살아서가 아니다. 더 이상 이 세계에 드래곤이란 존재가 존재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 존재를 모르는 자 또한 없었다. 그 모습을 추상적이나마 또렷이 떠올릴 수도 있었다.
전체적인 모습은 도마뱀 같다. 거기에 박쥐의 것 같은 날개를 갖고 있고 머리에는 커다란 뿔이 돋아나 있다.
하지만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그 덩치일 것이다. 말 그대로 산만 하다. 비유 같은 게 아닌, 정말로 웬만한 작은 산과 비슷할 정도의 거대한 크기를 자랑했다.
그리고 그 크기만큼이나 강력했다.
흘러넘치는 마력과 압도적인 체구. 입에서 쏟아지는 브레스는 마을 한 개 정도는 일격으로 지워버린다. 게다가 놀랍게도 드래곤은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었다.
일컬어 나라 하나를 지워버릴 수 있는 생명체.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 강함을 충분히 짐작케 할 강력한 몬스터가 바로 드래곤이다. 아니, 그걸 몬스터라고 불러도 되는지도 의문이다. 몬스터는커녕 신이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존재. 많은 가문이 자신들의 문장에 드래곤을 새기는 것만 봐도 사람들이 그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도 오래전에 살던 존재인지라 그 존재를 의심하는 자도 적지 않았다.
‘내 마력이 드래곤급이라고 말하던 엘프도 어디까지나 추측의 영역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름 엘프의 고대 기록을 뒤지던 학자 출신의 녀석이었으니 완전히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니었으리라.
그렇게 신화로서 자리를 잡은 드래곤에 대한 지크의 생각이 어땠냐면, 딱히 별생각이 없었다. 드래곤이 정말로 존재했든 말든, 강했든 약했든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떡 하니 눈앞에 나타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진짜로 드래곤인가?”
최대한 수정에 가까워지려 링의 가장자리에 바짝 붙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라일라가 말했다.
“가능성은 충분하지.”
이곳이 다른 유적이었다면 그저 드래곤의 형상을 한 무언가를 수정 안에 넣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을 했겠지만 여긴 그저 그런 유적이 아닌 클로원의 유적이다.
‘그 엄청난 세력을 지닌 제국이라면 드래곤까지 실험체로 삼았을 수 있어.’
생각해보면 진짜 어처구니없는 국가다. 전해지는 설화를 반만 믿는다고 해도 엄청나게 강할 드래곤을 실험체 취급하다니.
지크가 새삼 클로원의 국력에 대해 상기할 때 즈음, 라일라는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는 참을 수 없었는지 몸을 띄워 수정 근처로 날아갔다.
지크는 윈두르를 뽑고 몸을 긴장시켰다. 라일라가 수정 근처에 접근했을 때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수정을 지키기 위한 방어 장치가 있을지도 모르고, 수정에서 강대한 마력이 분출할지도 모른다. 혹은 전혀 예상치 못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조심해라.”
구두로도 라일라에게 경고를 했다. 라일라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다행히 걱정하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라일라는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며 수정을 샅샅이 살폈다.
라일가가 한참을 얼쩡대는데도 별 반응이 없자 지크는 윈두르를 옆에 눕혀두고 자리에 앉았다. 잠시 라일라를 쳐다보다 다시 윈두르를 손에 쥐었다.
‘결국 잠들어 있던 마력을 깨울 수 있는 건 없었군.’
보통 나무 근처에만 가도 진동을 하며 지크의 잠재된 마력을 모두 깨우던 윈두르가 지금은 얌전했다.
‘됐어. 조금 불편하게 가지, 뭐.’
그는 쿨하게 기대를 접었다.
“혹시 이거 살아 있는 건 아니겠지?”
수정을 툭툭 두드려보던 라일라가 말했다. 그에 대한 지크의 반응은 간단했다.
“몰라.”
이미 옛날옛적에 사라진 존재에 대해 어떻게 알겠는가. 물론 상식적으로 생물이 이렇게 오래 살아 있을 순 없겠지만, 그래도 드래곤이 아니던가.
그러나 지크는 굳이 따지자면 드래곤이 죽었다는 데에 손을 들어주고 싶었다.
“그래도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수정 속에서 살아 있겠냐. 그것도 아까 본 것처럼 엄청나게 오랫동안 세계수의 마력에 직격을 맞았을 텐데.”
“하긴.”
라일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봐도 드래곤은 시스템의 일부였다. 한데 살아 있는 드래곤을 그대로 썼을까. 드래곤이 정말로 그렇게 강했다면 수정에 봉인하는 것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하지만 지크는 끝내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확신을 할 순 없지. 상대가 그 클로원이랑 드래곤이잖냐.”
둘 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상대다. 라일라도 공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수정을 살핀 라일라가 지크의 옆에 내려앉았다.
“나는 여기서 유적을 조사해 볼게.”
누가 봐도 대규모 마법적 장치이니 라일라가 갖고 있는 마법사의 호기심에 불을 댕긴 모양이다.
“혼자 남으려고?”
“너는 올라가서 할 일이 있잖아.”
밸리드 놈들의 뒤도 캐야 하고, 아마도 그렌이 일으키려 하는 전쟁에도 대비해야 한다. 확실히 여기선 찢어지는 편이 낫다.
하지만 큰 문제가 있다.
“나 없으면 출입이 안 된다는 거 알지?”
유적의 유일한 통로의 열쇠는 윈두르뿐이다. 라일라의 텔레포트도 클로원의 유적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걱정 마. 식량이라면 여기 잔뜩 있잖아.”
라일라가 자신의 마법 상자를 흔들어 보였다.
“네가 종종 여기 방문해주면 돼. 연구가 끝나면 나갈 테니까.”
“위험한 상황이 올 수도 있어.”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라일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곰곰이 생각해봤어. 윈두르가 우리를 왜 여기로 안내했는지. 고작 ‘이런 대단한 광경이 있으니 놀라라’ 같은 뜻은 아닐 거 아니야.”
지크는 윈두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침한 데다가 자기 좋을 대로 지크를 끌고 다니는 녀석이었지만 적어도 쓸데없는 짓을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얻은 건 벌써 있잖아. 세계수의 본체가 있을 거라 짐작되는 방향 말이야.”
지크가 하얀 마력이 사라진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라일라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렇지만, 그게 끝이라는 법은 없어. 무엇보다 지크 브레이브가 윈두르를 따라가라고 했다며?”
“맞아. 그 썩어빠진 놈이 그렇게 말을 했지.”
지크가 이를 갈았다. 저 세상 여유 만만하고 남을 조롱하는 데 도가 튼 지크가 저렇게 감정적으로 분노를 표하는 상대는 오로지 지크 브레이브뿐이다. 그 그렌 제너드가 상대라도 냉철하게 분노를 내뿜을 뿐인데. 라일라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어쩌면 여기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
예전 지크 브레이크가 윈두르를 따라가라고 했을 때 지크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렇다면야 나야 좋지. 알겠어. 내가 종종 들르마.”
어차피 당분간 이곳에서 머물 생각이었다. 라일라의 의견을 끝끝내 무시할 이유는 없었다.
지크는 마지막으로 질문을 하나 던졌다.
“한데 만약 전쟁이라도 나서 내가 죽고 윈두르를 잃어버린다면 넌 영원히 여기 갇히게 될 텐데, 그땐 어떻게 할래?”
그때 라일라는, 정말로 웃긴 얘기를 한다는 듯 새초롬히 웃었다.
“네가 죽을 리가 있겠어?”
그 짧은 말에서 흘러나오는 신뢰에 지크도 가만히 웃을 수밖에 없었다.
* * *
라일라에게 유적을 맡겨놓은 후, 지크는 비올사를 수색했다. 이미 스틸월 영지 여기저기에서 밸리드의 신전이 발견된 만큼 소문의 신빙성은 무척이나 올라간 상태.
그리고 그 소문 중에는 스틸월 영지의 주도 비올사에 대규모 밸리드 신전이 있다는 것이 있었다.
‘이 소문은 맞을 확률이 커.’
어떻게 봐도 지금의 소동은 누군가 스틸월 영지를 악의적으로 물어뜯기 위해서 벌인 일이다. 주도에 밸리드의 거대 신전이 있다면 스틸월 영지의 신뢰도는 한층 더 커다란 타격을 입을 터.
하지만 신전은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다음 날을 기약하며 지크가 백작가로 돌아왔을 때였다.
“응?”
백작가 정문에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척 봐도 고급스러운 게 상당히 높은 신분의 사람이 타고 온 게 확실했다.
놀랄 일은 아니다. 변경백은 충분히 고위 귀족이다. 그게 어떤 용무든 높은 신분의 사람이 찾아오는 건 희귀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지크의 눈을 사로잡은 건 마차에 새겨진 문양이었다.
‘카르위먼의 문양.’
아무래도 카르위먼도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과연 누가 온 것일까. 지크는 주변의 하인에게 질문을 했다.
“성녀님이 오셨습니다.”
“성녀?”
카르위먼의 성녀라면 한 명뿐이다.
‘우연…은 아니려나?’
이미 그녀는 자신이 스틸월 백작가의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지금 돌아가는 상황은 충분히 성녀가 움직일 만한 일이기도 했다.
루벨라는 스틸월에 의심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충분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 사태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임도 분명했다.
‘루벨라가 움직였으면 벨리 와이그도 따라왔을 가능성이 커.’
지크는 바로 저택 안으로 움직였다.
‘이야, 내가 설마 카르위먼의 성녀와 타스니아의 킬링 머신을 반갑다고 생각할 줄이야.’
자신에게 어이없어하면서도 지크는 두 사람이 있을 백작가의 응접실로 향했다.
* * *
응접실에는 은은한 다향이 감돌고 있었다. 고위 귀족의 저택인 만큼 찻잎도 상당한 고급품이었기에 향은 무척이나 깊이 있고 향기로웠다.
지크의 앞에도 찻잔이 놓였다. 하지만 지크는 차를 몇 번 입에 대고는 내려놓았다. 지금은 자신의 맞은편에서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인물에게 더 관심이 쏠렸다.
“누군가 찾아올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루벨라 님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녀, 루벨라는 지크의 말에 살짝 웃어 보이며 찻잔을 내려놨다.
“원래는 다른 분이 오시기로 되어 있었는데, 지크 님이 여기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제가 살짝 떼를 썼답니다.”
그러며 장난스럽게 혀를 내민다. 평소의 자애로운 모습으로 신도들의 존경을 받던 모습과는 썩 다른 모습에 같이 앉아 있던 백작과 트레얼은 침음을 삼켰다.
예전 수도에서 그녀가 지크의 편을 들어줄 때부터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정말로 지크와 성녀의 관계가 보통이 아닌 게 보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저도 한 손 보탰습니다. 지크 님을 만나고 밸리드 놈들을 박살 낼 수 있는 기회인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죠.”
거기에 카르위먼 최강의 성기사인 벨리 와이그조차 지크의 앞에서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지크가 오기 전까지 무뚝뚝한 인상으로 자신들을 향해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던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성녀도 마찬가지. 벨리 와이그처럼 대놓고 의심의 눈빛을 보내진 않았고 말투도 사근사근했다. 하지만 그녀가 얼굴에 띄운 가면 뒤로 자신들을 탐색하고 있다는 건 두 사람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지크와 대화를 나누며 웃는 루벨라에게 가면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지크와 만난 것이 기뻐 웃는 것이 분명했다.
좋은 일일까. 지크가 아직 스틸월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면 이만큼 좋은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크는 스틸월이란 이름을 버렸다. 스틸월과의 관계가 좋다고도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백작과 트레얼은 눈앞에서 나눠지는 말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스틸월 백작가 안에서 이뤄지는 대화였지만 둘은 그 대화를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오랜만에 대화를 더 나누고 싶지만, 아쉽게도 백작가에 들른 이유가 이유다 보니 일단 용건부터 끝내야 할 것 같네요.”
루벨라가 여전히 친근감 있는 눈빛으로, 하지만 분명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선을 그은 채 지크에게 말했다.
“지금 한창 이 주변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사건은 지크 님도 아실 거예요.”
“물론이죠. 밸리드 신전 몇 개는 제가 찾아냈는걸요.”
“스틸월 백작께서는 그 소문이 전부 진실은 아니며, 스틸월 백작 본인께서는 절대 밸리드와 관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에 대해서 지크 님의 의견을 여쭤보고 싶어요.”
루벨라의 눈동자가 지크를 똑바로 바라봤다.
“지크 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백작과 트레얼은 물론이고 루벨라와 벨리 와이그마저 긴장한 채 지크의 말을 기다렸다.
그에 비해 지크는 무척이나 가벼운 웃음을 지은 채,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 말했다.
“저 꼰대가 그럴 리가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