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9화
라일라가 둥실 몸을 띄워 구덩이를 내려왔다. 구덩이는 상당히 깊었다. 백작가가 어째서 건물 아래에 있는 유적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는지 이해가 갔다.
“다른 애들이 올 때까지 기다릴까?”
“됐어. 그냥 둘이서 후딱 끝내 버리자고.”
지크는 금속문을 덮고 있는 흙들을 걷어찼다. 금속문의 형태가 점점 뚜렷해졌다. 문의 중앙에는 다른 유적의 입구들과 같이 홈이 파여 있었다. 지크는 윈두르를 홈에 집어넣었다.
철컥!
윈두르를 회전시키자 금속이 맞물리는 소리가 나며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곧 그들 앞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가자.”
지크가 먼저 계단에 발을 디뎠다. 라일라가 구덩이 위쪽을 올려다봤다.
“그런데 구덩이를 이렇게 방치해놓고 가도 괜찮나? 다른 사람이 유적을 봐도 돼?”
“일단 이 근처에 사람들을 물려달라고 백작에게 요청은 해놨어. 그런 약속은 고지식할 정도로 지키는 게 그 인간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야. 게다가 들켜봤자 제들이 뭘 어쩌겠어? 그냥 백작가 아래에 어떤 유적이 있다는 것만 알고 끝이지.”
지크가 보란 듯 윈두르를 어깨에 몇 번 두드렸다.
“이 녀석이 없으면 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말이야.”
“그건 그렇네.”
고개를 끄덕이며 라일라도 문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이 계단을 어느 정도 내려가자 문은 자동으로 외부와의 연결을 폐쇄했다.
계단은 빙글빙글 돌며 아래로 이어졌다. 앞을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계단 양옆의 벽에서 빛을 뿜는 돌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아직 유적의 기능이 살아 있는 게 분명했다.
계단은 그리 길지 않았다. 계단을 모두 내려오자 살짝 공중에 떠 있는 석판 몇 개와 지하로 비스듬하게 뻗어 있는 통로가 보였다.
지크는 고개를 내밀어 통로 저편을 확인했다. 끝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 통로의 길이가 상당히 긴 모양이었다. 그가 석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걸 타고 내려가는 건가?”
석판에 다가가 이곳저곳 살피고 있던 라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맞을 거야.”
그녀는 석판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지크를 향해 말했다.
“뭐 해? 타.”
“움직일 수 있냐?”
“아마도?”
지크가 석판 위에 올라섰다. 석판 중앙에는 사람의 허리 높이만 한 사각형의 기둥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라일라는 그 기둥의 윗면을 슥 살펴보더니 어느 부분을 꾹 눌렀다.
우웅!
석판에 마력이 공급되는 게 느껴졌다. 석판이 천천히 통로를 향해 움직였다.
“어떻게 움직였냐?”
“여기 조작 방법이 써 있으니까.”
기둥의 윗부분에 글자 몇 개가 새겨져 있는 게 보였다. 아마도 클로원의 문자일 것이다. 혹시나 쓸 일이 있을지 모른다며 계속 클로원의 문자를 연구하더니 이제 이런 간단한 문자 정도야 곧잘 읽을 수 있게 된 모양이었다.
통로는 한참을 이어졌다. 경사를 그리며 비스듬히 아래로 내려가던 통로가 어느 순간 평평하게 변했다. 그 상태로도 통로는 한동안 이어졌다.
“백작가는 이미 벗어난 것 같지?”
“한참 전에 벗어났지. 아마 비올사마저 벗어났을 거다.”
그렇게 얼마쯤 이동했을까.
지크와 라일라는 통로를 벗어나 커다란 공간으로 접어들었다. 천장은 목을 완전히 꺾어야 눈에 들어왔고 바닥은 저 아래에 어렴풋하게 보였다. 석판은 허공에 둥둥 떠서 이동을 계속했다.
석판의 진행 방향에, 지크와 라일라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그건 보석 같았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마력의 빛을 각진 표면이 반사한다. 마치 다이아몬드 같기도 크리스털 같기도 하다. 자신에게 비치는 빛을 산산이 분산시켜 사방에 흩뿌리는 그것의 아름다움은 아무리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라도 자리에 우뚝 서서 홀린 듯 바라볼 수밖에 만들 수 없을 것 같았다.
거기까지만 보면 클로원에서 귀한 보석을 가져다 놓은 것이라고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의 특징은 또 하나가 있었다.
컸다. 웬만큼 커다란 성도 저것보다 크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의 압도적인 덩치는 그것이 뿜어내는 아름다움마저 일순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정도였다.
아름다움과 웅장함. 그 두 가지 특성이 섞여 그것은 분명 주변을 압도하고 있었다.
“하여간 클로원 녀석들이 하는 짓은 규모가 다르다니까.”
감탄하듯 비꼬듯 지크는 그렇게 내뱉었다.
“다이아몬드는 아니겠지?”
“응. 수정 같아.”
만약 저게 다이아몬드였으면 대체 얼마만 한 가치가 있었을까. 아니, 저런 거대 수정만으로도 충분히 천문학적인 가치가 생길 것이다.
수정 주변으로는 원형의 고리가 빙 둘러싸고 있었다. 석판은 그 고리 앞에 멈춰 섰다. 둘은 고리 위로 걸어 올라갔다.
수정은 가까이서 보니 더욱 대단했다. 수정에서 뿜어지는 마력이 그대로 느껴졌다. 과연 클로원의 유적에 있는 것이니만큼 뭔가 특별한 녀석임이 분명했다.
지크와 라일라는 일단 고리를 한 바퀴 돌며 주변을 관찰했다.
“나무는 없군.”
지금껏 본 세계수의 분신들은 분명 나무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특이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일단 나무의 형태는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공간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나무는커녕 그 비슷하게 생긴 것도 없었다.
“이게 나무는 아니겠지?”
지크가 수정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설마. 아무리 세계수의 분신이 특별하다고 해도 이렇게 특이하게 생겼을까.”
라일라는 부정적인 모양이었다.
고리는 전체적으로 동그란 원형의 형태였지만, 툭 튀어나온 부분이 두 군데 있었다.
하나는 고리 바깥으로 튀어나온, 지크와 라일라가 타고 온 석판이 멈춘 곳. 아마도 석판을 타고 내리는 승강장일 터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고리 안쪽, 수정 쪽을 향해 뻗어 있었다. 그곳엔 용도를 알 수 없는 장치들이 수두룩했다.
“이게 유적을 제어하는 장치겠지?”
“아마도.”
라일라가 장치 곳곳을 살폈다.
“고장 나진 않은 것 같아.”
하지만 사용 방법을 모른다면 고장 난 것과 다름없다. 혹시 장치의 설명서 같은 것이 없나 라일라가 눈을 부릅뜨고 장치 사이사이를 누빌 때였다.
콰아아앙!
굉음이 울렸다.
“꺄아악!”
고리가 진동하며 라일라의 몸이 휘청였다. 옆에 있던 지크가 바로 그녀의 팔을 붙잡아 부축했다. 지면에서 엄청난 마력이 뿜어지는 게 느껴졌다. 둘은 바로 고리의 가장자리로 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쿠우우우우!
그건 장관이었다. 어쩌면 요정들의 신비로운 춤사위 같기도 했고, 어쩌면 종말의 날에 흩뿌려지는 절망 같기도 했다. 어둠에 휩싸인 채 어렴풋이 보이던 바닥은 더 이상 없었다. 그곳엔 붉은색과 푸른색, 초록색, 갈색, 총 네 개의 색채가 서로 부딪치고 부서지고 커지는 광경만이 존재했다.
‘마력이군.’
놀라웠다. 보통 눈에 보이지 않는 마력이 저렇게 선명하게 자기 존재를 드러낼 줄이야. 대체 얼마만 한 밀도의 마력이란 말인가.
‘붉은색은 불의 마력, 푸른색은 물의 마력, 초록색은 바람의 마력, 갈색은 대지의 마력인가.’
각자의 특성이 색으로 나타난 마력은 서로 세력 싸움을 하며 그 특성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었다. 붉은색의 마력은 푸른색의 마력에 접하면 급격하게 세력이 위축됐고, 초록색의 마력과 접촉하면 급속도로 세력을 키웠다. 특성을 생각한다면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지크와 라일라가 주목한 건 따로 있었다.
“익숙한 마력이네.”
라일라가 중얼거린 대로다. 저 아래에서 뒤엉키고 있는 마력은 낯이 익은 마력이었다.
“세계수 분신들의 마력인가.”
그들이 지금껏 보아왔던 나무들의 마력이 저기서 느껴졌다. 라일라가 고리 바깥으로 조금 더 얼굴을 내밀었다.
“세상에 퍼져 있는 세계수 분신들의 마력이 여기로 보내지는 것 같아.”
“그렇다면 여기는 마력의 중계지라고 볼 수 있나.”
쿠오오오오!
서로를 깨뜨리고 키우던 마력들이 수정을 중심으로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거대 수정을 단단히 떠받치고 있는 기둥을 휘감아 올라갔다. 그리고 수정에 흡수되어갔다. 마치 투명한 물에 물감을 던지듯, 수정 안으로 색색의 마력이 들어차는 것이 보였다. 수정 안에서 마력들은 얽히고설키더니 곧 고유의 색채를 잃기 시작했다. 곧 네 가지의 색은 모조리 사라지고 수정 안에는 하얀색의 마력만이 넘실거렸다.
수정이 빛을 뿜었다. 지금껏 수정을 둘러싸고 있던 아름다운 빛이 아니다. 그건 마치 태양같이 강렬했다.
잠시 수정에 머물던 마력이 다시 위로 솟았다. 거대 수정과 천장을 연결하고 있던 또 다른 기둥을 휘감으며 마력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얼마 후.
번쩍!
강렬한 섬광을 뿜어내며 마력이 한쪽으로 쏘아졌다. 순식간에 벽 안으로 흡수된 마력은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은 건 아까처럼 어렴풋이 보이는 지면과 아름다운 빛을 반사시키는 수정뿐. 세계수 분신들의 마력은 보이지 않았다.
“끝난 것 같다.”
지크는 혹시나 있을지 모를 위험에서 라일라를 지키기 위해 붙들고 있던 그녀의 팔을 놨다.
“어머, 계속 그러고 있어도 되는데?”
“귀찮아.”
“그럼 내가 하지, 뭐.”
라일라가 슬쩍 팔을 감아오는 걸 지크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슬쩍 지면을 내려다봤다.
“꽤나 재미있는 걸 봤어.”
“맞아. 세상 어디에서도 그런 걸 볼 기회는 많지 않을 거야.”
“방금 그게 뭐였다고 생각해?”
“글쎄. 고작 그거 하나만 보고 결론을 내리기엔 정보가 너무 없어. 하지만 추론을 하자면….”
라일라는 턱을 검지로 살짝 두드렸다.
“아마도 저게 브뤼셀 시스템을 유지시키는 에너지가 아니었을까?”
지크도 라일라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하얀 마력이 향한 곳은 당연히 브뤼셀 시스템이 있는 곳이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거기에 세계수의 본체도 함께 있을 테고 말이야.”
지크와 라일라가 하얀색의 마력이 사라진 벽을 쳐다봤다. 지크가 씨익 웃었다.
“드디어 마지막 목표를 찾은 것 같군.”
“표정 관리 좀 해, 지크. 너 지금 애들이 보면 바로 울음을 터뜨리다 못해 경기를 일으킬 것 같아.”
지크의 표정이 너무도 소름 끼쳐 라일라도 순간적으로 지크의 팔을 놓을 뻔했다. 하지만 코웃음을 치는 것이 라일라의 말을 들어 먹으려는 게 아닌 건 확실했다.
“그건 그렇고.”
지크는 벽에서 눈을 떼고 몸을 돌렸다. 그의 눈에 거대 수정이 들어왔다. 가까이 있으니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하지만 지금 지크가 신경 쓰는 건 수정의 크기 따위가 아니었다.
“라일라. 혹시 너 수정에서 하얀 마력이 뿜어질 때 봤었냐?”
“응. 수정 안에서 비친 그림자를 말하는 거지?”
하얀 마력이 수정을 벗어나며 빛을 뿜을 때, 둘은 그 안에서 어떤 그림자를 보았다. 마치 수정 안에 무언가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지크는 눈에 힘을 주고 수정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수정 안에 무언가가 있다 생각하고 보니, 살짝 그림자 같은 것이 또 보이는 것 같았다.
“그게 뭐라고 생각해?”
“너무 어렴풋이 보여서 확신은 못 하겠어. 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라일라는 기억을 떠올렸다. 환한 빛 사이로 보이는 그림자의 형상.
거대한 몸체와 접힌 날개. 긴 꼬리. 그리고 머리 부분에 보였던 뿔까지.
그걸 직접 본 적은 없어서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라일라가 본 이미지와 가장 가까운 존재는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드래곤 같았어.”
“그래.”
지크는 날카로운 눈으로 수정을 쳐다봤다.
“내 생각도 같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