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8화
솔직히 스틸월을 도와 밸리드를 잡아 족치고 있는 지크였지만 그렇다고 그가 스틸월의 멸망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가 하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밸리드의 타도 및 그레이그의 치료뿐. 그 와중에 스틸월이 의심을 사 다른 나라나 영지에 침략을 당한다 해도 끼어들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침략자가 그렌 제너드라면 다르다.
스틸월 백작가는 다행히도 지크의 안에서 그렌 제너드보다는 나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렌 제너드보다 싫어하는 존재가 없었다.
지크 브레이브를 빼고는.
애초에 영지에 갑자기 돌기 시작한 소문부터 시작해서 온갖 사건이 터지기 시작한 걸 보면 분명 스틸월을 둘러싼 거대한 음모가 있는 게 분명했다. 지크도 여기에 깊숙이 간섭을 할까 말까 고민 중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그렌 제너드라면 고민할 필요조차 없다.
‘당연히 끼어들어야지.’
하지만 녀석은 왜 스틸월 영지를 노리는 걸까. 하나 떠오르는 게 있긴 했다. 혹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만 지크는 자신의 추론이 맞을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내 본가이기 때문인가.’
대체 녀석은 자신에게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일까. 이 정도면 거의 집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다.
하지만 관심 없다. 놈이 집착을 하든 경멸을 하든 분노를 하든 증오를 하든, 중요한 건 지크 자신의 감정이다.
‘이번엔 어떻게 짓밟을까.’
심각한 상황에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지크의 발걸음은 가볍기 이를 데 없었다.
* * *
“그렌 제너드라고?”
라일라가 놀라 물었다.
“그래. 그 녀석일 가능성이 무척 높아. 아니, 거의 맞을 거야.”
“또 그놈이니.”
라일라가 혀를 찼다.
“그런데 왜 스틸월을 노리는 거야? 혹시 스틸월 백작가가 네 본가라서?”
역시 라일라도 지크와 같은 결론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
“세상에! 그 녀석, 혹시 널 사랑이라도 하는 거 아냐?”
“끔찍한 소리 하지 마라.”
지크가 몸을 떨었다.
“하긴, 나도 연적이 남자라는 사실은 생각하기 싫어.”
“내가 여태까지 들었던 말들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끔찍한 말이다.”
만약 저딴 말을 한스나 스녹이 했다면 최하 1년 정도를 잠도 제대로 안 재우고 빡세게 굴렸을 것이다.
“근거는 있는 거지?”
“물론. 지금 돌아가는 꼴이 그렌 제너드가 관련이 있다면 모두 맞아떨어져.”
지크는 하나하나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스틸월 영지가 의심을 받는 이유 중 가장 큰 건 기사들이 밸리드의 신도로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잖냐.”
“기사들뿐만이 아니던데?”
라일라의 말대로 기사들뿐이 아니라 하인, 병사 등 백작가 주변의 사람들 중 밸리드의 신도들이 엄청나게 발견되고 있었다.
“그 정도로 밸리드가 손을 뻗었는데 백작가에서 모를 리가 있었겠느냐는 게 사람들의 인식이지. 솔직히 맞는 말이기도 하고.”
“하긴. 밸리드가 손을 뻗는다고 해서 전부 밸리드로 개종을 하는 건 아니니까.”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이 세상은 이미 밸리드의 손아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분명 개종을 거부하는 사람이 있었을 거야. 아니, 오히려 비율로 따지면 그쪽이 더 많겠지. 그만큼 개종을 거부한 사람들이 생겼다면 백작가에서 눈치를 못 챘을 리가 없고. 개종을 거부한 기사들은 당연히 백작에게 보고를 했을 테니까.”
그러면 끝이다. 자신의 영지에 밸리드가 손아귀를 뻗치고 있다는 걸 안 백작은 영지를 뒤집어엎어서라도 밸리드를 모조리 쳐죽이거나 쫓아냈을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밸리드가 이만큼이나 영향력을 넓히는데도 백작가에서 알아채지 못했다는 소리는 단 한 건도 개종에 실패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아니면 백작가가 그 일을 주도, 최소로 방조를 했거나.
“의심할 만하네.”
“그렇지. 누가 봐도 전자보다는 후자가 가능성이 높아 보이니까. 아니, 가능성이 높은 걸 떠나서 전자는 거의 불가능해 보이지.”
“하지만 너는 전자의 가능성을 높게 보는 거지?”
“상대 쪽에 위대하신 용사 병신께서 계실 테니까.”
존경의 빛이라곤 1도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로 지크가 시니컬하게 말했다.
“그놈이 밸리드와 연관이 되어 있다는 건 사각뿔의 원혼만 봐도 알 수 있어. 녀석이 관련되어 있다면 그 말도 안 되는 100% 개종 성공도 납득할 수 있지.”
“회귀의 힘으로 밸리드로 개종할 수 있는 사람들을 알 수 있었을 테니까.”
“그것만이 아니지. 개종할 가능성이 없는 이라도 미래의 지식으로 이것저것 수작을 부리면 타락시킬 수 있으니까. 그 대표적인 예가 나잖냐.”
그답지 않게 우물거리던 지크가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원래의 나는 그… 뭐냐… 상당히 정의로운 녀석이었잖냐.”
“용사 지크 브레이브 말이지?”
“아, 젠장!”
라일라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지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언제 들어도 끔찍하게 닭살 돋는 소리였다.
“그래, 용사 지크 브레이브! 그런 나조차 이딴 식으로 바꿔놨는데 사람들을 밸리드의 신도로 개종시키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겠지.”
“그래도 쉬운 일도 아니었을 텐데.”
지금 백작가에서 나온 밸리드의 주구를 생각해보면 대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그럼 녀석은 카르위먼이 스틸월을 멸망시키게 하려는 걸까?”
“그건 아닐 거야.”
지크는 회귀 전을 떠올렸다.
“분명 회귀 전의 스틸월은 정말로 철저하게 멸망한 상태였어. 일하던 하인의 가족까지 살아남지 못할 정도로 말이야. 아무리 카르위먼이 밸리드라면 치를 떨며 철저하게 대응한다지만 그렇게까지 할 정도는 아니야. 카르위먼이 스틸월을 공격했을 가능성은 분명 있어. 아니, 분명 공격했을 거다. 하지만 스틸월 공격에 주가 되는 단체는 따로 있었을 거야.”
“의심되는 곳이 있구나? 어디야?”
“내 외가.”
라일라는 얼마 전에 들었던 곳을 떠올렸다.
“플로드 백작가?”
“그래. 얼마 전에 그놈들이 여기 왔었지? 나를 걱정해서 그렇다는 웃기지도 않은 이유를 대면서 말이야. 나를 차기 백작으로 앉혀 영향력을 행사해 보겠다는 이유인 줄 알았는데, 만약 내 생각이 맞다면 녀석들은 백작가의 상태를 보기 위해서 온 걸 거야.”
“잠깐만 그 말은 플로드 백작가는 이 혼란을 알고 있었다는 거야?”
“아마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꽤 중대했다.
“그럼 플로드 백작가는 밸리드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다는 소리인데….”
“그래. 그러니 그 증거를 찾아야지. 전쟁이 터진다면 아마 꽤나 재미있는 일이 될 거야. 스틸월도 플로드도 서로를 밸리드의 주구라고 부르짖으며 충돌을 할 테니까.”
지크가 낄낄거렸다.
“네 친가와 외가가 전쟁을 하기 직전인데 웃음이 나오니?”
“친가든 외가든 나한테는 둘 다 꼴 보기 싫은 놈들인 건 똑같은데 뭘. 뭐, 그래도 친가가 외가보다는 조금은 더 나으니까 이쪽에 붙어야지. 아니, 애초에 그 용사 병신이 저쪽에 붙었을 게 뻔하니 누가 낫고 말고는 의미가 없나?”
만약 그렌이 스틸월에 붙었다면 지크는 아무 망설임도 없이 플로드 쪽에 붙었을 것이다.
“어쨌든 내 생각대로 플로드 백작가가 밸리드와 협력해 이 일을 벌였다면 이유야 뻔해. 먼저 스틸월 백작가를 밸리드와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해 완전히 고립시킨다. 밸리드와 연관이 있다면 크로뇽 왕국도 쉽사리 손을 댈 수 없으니까. 스틸월 백작가의 고립이 심화됐을 때, 밸리드와 관련된 스틸월 백작가를 용서할 수 없다며 전쟁을 거는 거지.”
“해방군 노릇을 하겠다는 거네.”
“무척이나 더러운 해방군이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같은 나라의 영지도 아닌 다른 나라의 영지가 해방군이랍시고 쳐들어오는데 왕국과 주변 영지가 가만히 있을까?”
“그때를 대비한 위대하신 그렌 제너드 님이 아니시겠냐.”
“아, 카르위먼의 협력자로서 쳐들어오겠구나.”
“그래. 아무리 카르위먼이라도 단신으로 스틸월 영지를 상대한다면 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어. 거기서 그렌 제너드가 플로드 백작가를 카르위먼과 연결시켜 주는 거다. 그러면 계획의 완성이지. 완벽한 명분을 업고 카르위먼과 같이 쳐들어오니 왕국은 섣불리 관여할 수 없고 플로드 백작가는 스틸월 백작가를 먹을 수 있으며 카르위먼은 밸리드의 주구를 토벌할 수 있고 그렌 제너드는 내 본가를 멸문시킬 수 있지. 서로 간에 행복밖에 없는 완벽한 계획이로군.”
지크는 조롱 섞인 어조로 말했다.
퍼억!
흙덩이가 허공을 날더니 곧 산더미처럼 쌓인 흙무더기 위로 떨어진다. 이미 상당한 양이 파내져 흙무더기의 높이는 상당했다. 지크는 다시 삽을 지면에 강하게 찔러 넣었다. 단단한 토양에 삽은 너무도 쉽게 파고들었다. 흙덩이 하나가 다시 허공을 날았다.
지크와 라일라가 이야기를 나누던 곳은 예전 윈두르가 가리킨 그곳이었다. 아마도 클로원의 유적이 있으리라 생각되는 곳. 지크는 유적을 찾기 위해 열심히 삽질 중이었다.
“스녹이 있었으면 편했을 텐데 아쉽네.”
지크가 만들어 놓은 커다랗고 깊은 구덩이 옆에 쪼그려 앉은 라일라가 말했다.
“그 녀석, 요새 엘레나와 놀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어라? 의외로 담담하네?”
“내가 아무리 쓰레기라도 젊은 녀석 연애한다는데 억지로 일 시켜먹을 정도까지는 아냐.”
“젊은 녀석이라니. 꼭 할아버지처럼 말하네.”
“그러게나 말이다. 회귀 전 나이를 생각해도 그 정도는 아닌데. 실제로 나이 들었단 소리 들으려면 너 정도는 되어야….”
라일라가 쏘아낸 작은 번개를 지크가 삽을 휘둘러 막았다.
“헛소리하지 마.”
라일라가 주먹을 쥐며 흔들어 보이자 지크는 한 번 크게 웃고는 다시 삽질로 돌아갔다.
“그런데 벌써 파도 괜찮은 거야? 유적에 가는 건 네 동생의 치료가 끝난 다음에나 아니었어?”
“허락은 받았어.”
“아직 치료가 끝난 건 아니지?”
“아니지. 그런데 백작이 지금 내 부탁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잖냐.”
이곳저곳에서 터지고 있는 밸리드와의 연관성. 그 와중에 일단은 자신들과 협력하고 있는 지크란 존재는 백작가에서는 가뭄에 내린 단비 같은 존재였다. 정확히 말하면 지크가 가지고 있는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라는 직위가 무척이나 도움이 됐다.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로서 당분간 계속 도와준다니까 바로 허락이 떨어지던데.”
“백작님도 굉장히 다급한 모양이구나.”
“다급하지.”
자칫하다간 영지가 쑥대밭이 되고 백작가가 멸문할 지경인데 다급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유적 발굴을 서두르는 이유는 역시 나무 때문이지?”
“그래. 전쟁이 난다면 힘이 필요할 테니까.”
아무리 격렬한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지크가 마력을 모두 찾은 상태라면 웬만해선 질 일이 없다. 말 그대로 그때의 지크는 일인 군단이나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여기에 나무가 있을지는 의문이야.”
라일라도 지크의 의견에 공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남은 나무는 세계수 본체뿐이다. 만약 여기에 세계수 본체가 있다면 브뤼셀 시스템이 있을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브뤼셀 시스템은 흑막의 수중에 있을 터.
“아무리 생각해도 흑막이 있을 곳으로는 보이지 않는단 말이지. 뭐, 됐어.”
지크는 더 이상의 고민을 중단했다.
“눈으로 확인하면 되겠지.”
지크가 밟고 있는 흙 아래로 차가운 금속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