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7화
지금 백작가에 가장 위협적인 일은 바로 저것이었다.
스틸월 영지에 퍼진, 사람들이 일고의 가치도 없다며 평가했던 소문이 하나둘 사실로 밝혀지고 있었다. 소문의 신뢰성은 이미 막 소문이 퍼졌을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높아진 상태.
문제는 그 소문에 밸리드의 신전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치명적인 소문이 끼어 있다는 것이다.
스틸월 백작이 밸르를 신앙하는 밸리드의 교인이라는 것.
소문을 들은 초반에는 극렬한 불쾌함에 휩싸였을 뿐 코웃음도 치지 않고 무시했지만,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오니 더는 그 소문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의심을 부채질하는 환장할 만한 요인도 몇 가지 있었다. 영지에 있는 밸리드의 신전 몇 곳에 스틸월 백작가와의 밀월 관계를 의심할 만한 증거 몇 가지가 나왔던 것이다.
대니가 가져온, 반쯤 훼손된 스틸월 인장이 찍힌 명령서의 일부도 바로 그중 하나였다.
거기까지는 어떻게든 조작된 증거라며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백작가를 궁지로 몰아넣는 건 따로 있었다.
“기사들의 조사는 어떻게 됐나.”
질문을 하는 백작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울분과 피곤이 느껴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변경백이라는 지위를 갖고 왕국의 국경을 지키는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영지의 무력이었고, 그 무력의 중심을 잡고 있는 게 바로 기사들이다.
한데, 지금 백작가에 대한 의심을 강하게 하는 요인이 바로 그 기사들이었던 것이다.
밸리드의 신전이 속속 발견될 때마다 백작은 기사들을 파견해 그곳들을 조사하게 했다. 대부분의 신전은 텅 비어 있었다. 당연히 기사들의 피해가 나올 리 없다.
그러나 파견된 몇몇 기사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부상을 입는 일이 생겼다.
흉수는 바로 동료인 기사였다.
그들은 밸리드와 스틸월 백작가가 밀월 관계임을 나타내는 증거가 나타날 때마다 날뛰었다. 설마 동료에게 칼침을 맞을 줄 몰랐던 기사 여럿이 죽어 나갔다.
그래도 거기까진 괜찮았다. 천하의 스틸월 기사가 적도 아닌 동료의 손에 죽었지만, 그래도 다른 상황에 비하면 괜찮았다.
가장 큰 문제는 카르위먼의 성기사들을 공격한 놈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밸리드에 관한 소문이 퍼진 뒤 카르위먼도 이 문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도 성기사들을 파견해 신전들을 수색했고 종종 기사들과 마주쳤다. 그리고 대부분 기사들과 성기사들은 협동해서 밸리드의 신전을 수색했다.
적의 적은 아군. 게다가 기사들도 카르위먼의 신도들이 많다 보니 굳이 꺼릴 이유도 없었다. 무엇보다 성기사들은 밸리드에 관한 한 전문가들이 아니던가.
하지만 갑작스럽게 기사들이 성기사들을 공격하는 일이 생겼다. 당연히 공격당한 성기사들은 물론 동료 기사들조차 기함해 습격자를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습격자들은 하나같이 눈을 까뒤집고 죽었다.
자살이었다.
한 번이어도 의심의 시선이 드리울 판에 그런 일이 몇 번 더 있었다. 목숨을 잃은 성기사들이 있었고, 당연히 스틸월에 대한 의심도 한층 더 커졌다.
백작가가 뒤집어진 건 당연했다. 백작은 즉시 기사들에 대한 조사를 명령했다. 평소라면 아무리 백작의 명령이라도 자신들을 믿지 못한다고 볼멘소리를 내뱉었을 기사들도 입을 닫고 겸허히 조사를 허용했다.
그 결과.
“총 쉰일곱의 밸리드 신도가 더 발견됐습니다.”
“…뭐?”
백작이 되물었다. 이미 사건이 터진 터라 걸리는 게 없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분명 의심스러운 인간들이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맹세코 저 정도로 많은 숫자가 튀어나올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백작의 경악에도 트레얼은 덤덤히 계속 보고를 올렸다.
“그리고 습격자들의 집에서도 밸리드의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아마 그놈들도 밸리드의 신자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콰앙!
백작이 발을 굴렀다. 바닥이 움푹 파이며 저택이 진동했다. 건물이 무너질 수도 있다며 자제를 요청하고 싶은 트레얼이었지만, 백작의 분노에 기름만 더 끼얹는 꼴이 될 거 같아 입을 다물었다.
“대체 그 빌어먹을 새끼들이 영지에 기어들어 올 동안 뭘 한 거야!”
백작의 음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고막이 울려 귀를 막고 싶었지만 그래도 주군 앞에서 그딴 짓을 할 순 없었다.
다행히 백작은 그 이상 소리를 치진 않았다. 하지만 불그스름하게 변한 눈을 보면 화는 일절 가라앉지 않은 게 분명했다.
“다른 이들도 샅샅이 조사해라! 영지의 가신들부터 병사, 하인들까지 전부! 우리 가문과 관련되어 있는 자들은 모조리 털어!”
“네! 카르위먼에도 협력을 구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영지를 뒤덮는 막대한 혼란을 뒤집기 위해 백작가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몰랐다. 이 혼란은 단지 시작일 뿐임을.
* * *
콰아아앙!
밸리드의 신전 하나가 또 무너진다. 흙먼지가 뭉게뭉게 피어나며 더러운 생선 대가리의 석상이 그 안으로 사라졌다.
깊은 숲속에 있는 곳이라 그런지 이 신전은 딱히 주위에 엄폐물 같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예전 굴에 있던 신전을 부술 때마냥 흙먼지가 주변에만 고여 있지 않고 금방 날아갔다.
“스녹. 저 잔해 좀 들어 올려서 뭔가 있나 찾아봐.”
“네!”
지크의 명령에 스녹이 힘을 사용했다.
스으윽!
신전의 잔해가 허공에 떠 오르더니 확 퍼졌다. 둥둥 떠다니는 잔해들을 사람들이 유심히 쳐다봤다. 지크의 명령에 스녹은 커다란 덩어리 몇 개를 분쇄하기도 했다. 그러나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이제 됐다.”
신전의 잔해가 지면에 후두둑 떨어졌다.
“여기는 뭔가 없는 것 같군요.”
“네, 제 눈에도 그렇게 보였습니다.”
대니가 눈을 비비며 말했다. 혹시라도 또 백작가에 불리한 증거가 나올까 봐 잔해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것이다. 다행히 이번엔 특별한 것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좋아진 건 아니다.
대니가 투덜거렸다.
“정말 무슨 놈의 밸리드 신전이 이렇게 많은 건지, 원.”
“상황을 보면 그 바퀴벌레 새끼들이 스틸월 영지에 알을 깐 건 확실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쩔 수 없죠.”
“그렇죠. 바퀴벌레 새끼들이면 어쩔 수 없죠.”
지크의 발언이 통쾌한지 대니가 킬킬거렸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 바퀴벌레 새끼들 때문에 요새 난리입니다. 주변 영지들도 저희와 거리를 두는 게 눈에 보이고, 왕실에서도 좋은 소리가 안 나오는 것 같습니다.”
“한두 마리면 몰라도, 이렇게 뭐만 들추면 바퀴벌레가 튀어나오는 상황이면 집주인이 관리를 제대로 안 했다는 뜻이니까요. 한 소리 들을 만하죠.”
“끄응.”
신랄하게 백작을 까는 지크의 말에 대니는 차마 긍정하지 못했다. 그래도 주군인 것이다. 게다가 백작이 요새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지 않은가.
“주변에 마을은 있었습니까?”
“화전민 마을이 하나 있더군요. 하지만 그들도 밸리드와 관련이 있는 것 같진 않습니다.”
대니의 말처럼 지금 발견되고 있는 신전들 주변 사람들은 밸리드와는 관련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래도 신문은 해야겠죠.”
“그래야죠.”
하지만 썩 성과가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일단 신전을 부순다는 임무는 끝마친 일행이 산을 내려가려 할 때였다.
“누군가 올라오는군요.”
지크가 산 아래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대니도 이번엔 놀라지 않고 지크가 바라본 곳을 쳐다봤다.
“카르위먼의 성기사들일까요?”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당한 실력자들인 것 같으니까요.”
지크의 말처럼 수풀을 헤치고 올라온 자들은 성기사들이었다. 그들이 지크 일행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스틸월 영지의 기사들임을 눈치챈 것이다.
대니는 혀를 찼다. 예전에 만난 성기사들은 절대 저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엄연히 이곳은 스틸월 영지다. 영지의 기사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다니.
하지만 항의를 하기에도 뭣 했다. 지금 영지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저런 반응은 당연하다. 기사들은 굴욕감을 삼켰다.
하지만 그건 기사들의 사정이고 지크는 전혀 다른 것에 주목하고 있었다.
‘저 새끼.’
카르위먼 성기사들의 앞에 반가운(?)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또 보는군요.”
지크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손을 내밀었다. 상대도 지크를 알아봤다. 지크가 내민 손을 잡으며 인사를 건넸다.
“설마 여기서 지크 씨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너드 씨.”
그는 그렌 제너드였다.
여전히 둘은 연기를 했다. 그다지 보고 싶지는 않지만 친분이 있는 그런 사이.
어찌나 둘의 연기가 완벽했는지 주변의 기사들과 성기사들은 한눈에 둘이 어떤 사이인지 알 수 있었다. 연기였지만. 아마 라일라가 있었다면 못 볼 걸 봤다며 고개를 흔들었을 것이다.
“지크 씨도 밸리드의 신전을 확인하러 오신 겁니까?”
“네. 제너드 씨와 성기사분들도 같은 목적으로 오신 것 같습니다만.”
“물론이죠.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로서 밸리드의 신전을 내버려 둬선 안 되니까요.”
“그것참 고귀한 생각이로군요. 하지만 여기 있는 신전은 우리가 모두 부쉈습니다.”
“그래요? 역시 지크 씨군요. 하지만 저희가 다시 한번 확인을 해도 괜찮을까요? 이런 중요한 건 꼼꼼히 확인을 해봐야 해서요.”
대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다른 기사들의 표정도 그다지 좋진 않았다. 말이야 좋지, 저건 대놓고 자신들을 믿지 못하겠단 뜻이었으니까.
그러나 지크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충분히 느긋하게 확인을 하셔도 됩니다. 장소를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주변에 신전의 잔해들이 가루가 돼서 널려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지크는 일행을 불러 산을 내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성기사 한 명이 일행을 막아섰다.
“뭡니까?”
“실례지만 신전에서 뭔가 발견한 건 없습니까?”
지크는 피식 웃었다. 그에 비해 기사들의 표정은 썩어들어 갔다. 성기사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는 명확했다.
다른 신전들에서 발견되는, 밸리드와 스틸월의 밀월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냐 묻는 것이다. 조금 더 들어가자면 혹시 그걸 숨기지 않았냐는 뜻도 됐다.
감히 스틸월 영지에서 스틸월 기사에게 저딴 말을 하다니. 하지만 성기사도 순순히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밸리드라면 정색을 하는 이들이 저들인 것이다.
“없습니다.”
“정말입니까?”
의심스러워하는 성기사에게 지크는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의 증표를 보여줬다. 성기사가 크게 놀랐다.
“설마 내가 밸리드에 관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죠.”
“시, 실례했습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성기사가 사과를 했다.
“혹시 의심스럽다면 제너드 씨에게 물어보세요. 저분과는 안면이 있으니까.”
“아닙니다! 충분히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럼 저흰 가보죠.”
지크 일행은 성기사들과 엇갈려 산을 내려갔다.
“후우! 도련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어쩌면 정말로 충돌이 일어났을 수도 있었겠어요.”
대니가 지크의 옆에 따라붙으며 말했다. 그의 눈에 진득한 감사와 신뢰의 기운이 묻어났다. 그건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
여전히 지크가 끌고 다니고 있는 그레이그도 묘한 눈빛으로 지크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카르위먼에서 준 신분이니, 이럴 때 잘 써먹어야죠.”
그렇게 대니와 잡담을 나누면서 지크는 방금 만난 그렌에 대해 생각했다.
‘저 새끼가 여기 들어왔단 말이지. 설마 스틸월 영지의 멸망도 이놈이 관련이 있나?’
만약 그렇다면 도출될 답은 하나다.
‘방해해 줘야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