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6화
그 행동을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아무런 단서도 없을 거라 여겨 완전히 부숴버린 신전에서 무언가 눈에 띄는 물건이 나왔으니 당연히 사람들의 관심은 그곳에 집중됐다. 지크조차도 일순 그쪽에 신경이 팔렸다.
하지만 잠시 다른 쪽에 신경이 팔렸다고 해서 갑작스러운 일에 반응하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여기 있는 자들 하나하나는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무력을 갖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지크는 그중에서도 더욱 특출났다.
콰앙!
거친 폭음에 신전에서 나온 물건에 정신이 팔려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너 뭐 하냐?”
지크의 싸늘한 말이 낮게 깔린다. 그의 눈이 갑작스럽게 검을 뽑아 들고 튀어 나가려고 한 기사에게 꽂혔다.
“어, 어? 무슨…!”
대니가 경악해서 그 기사를 향해 소리를 치려 할 때였다. 혀를 한 번 찬 기사가 검에 힘을 줘 윈두르를 거칠게 튕겨냈다. 그리고 발을 굴렀다. 그의 몸이 쏜살같이 튕겨 나갔다. 목표는 무언가를 발견한 성기사였다.
“무시하네?”
기사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뒤에서 들려온 살기 넘치는 말. 생각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그의 몸이 회전하며 뒤쪽으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검은 헛되이 허공을 갈랐다. 당혹감이 끝 모를 듯 치솟았다.
“일단 꿇어.”
콰직!
“끄어어억!”
정강이에서 올라오는 끔찍한 고통에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시야가 급속도로 낮아진다. 하지만 과연 훈련된 기사라고 해야 할까. 그는 몸이 완전히 쓰러지기 전에 멈췄다. 정강이가 극렬하게 아팠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하지만 헛된 노력이었다.
“꿇으라니까?”
콰직!
“크윽!”
이번엔 다른 쪽 정강이다. 그는 결국 지면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지면에 손을 댄 채 다리 쪽을 쳐다봤다. 구부러질 수 없는 방향으로 구부러진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누가 봐도 심하게 부러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콰직!
“끄아아아악!”
이번엔 손이었다. 그의 눈이 정강이에서 새로 고통이 피어난 손을 쳐다봤다. 꿰뚫린 손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오고 있다. 상처에는 마치 그의 살과 피를 양분 삼아 피어난 것마냥 보이는, 나뭇가지같이 생긴 검이 꽂혀 있었다.
‘이, 이건….’
그제야 그는 자신을 이 꼴로 만든 이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특이하다 못해 괴상하게 생긴 검을 들고 다니는 이는 하나뿐이었으니까.
“네가 누구였더라?”
지크는 두 다리가 부러지고 한 손이 꿰뚫린 채 엎드려 있는 기사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분명 출발할 때 이름을 들었었는데. 뭐, 됐어.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니.”
떠올리려 노력하면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지크는 무시했다.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왜 카르위먼의 성기사를 노렸지?”
지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기사의 눈이 하얗게 돌아간 것이다. 입에서 거품까지 물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털썩!
그의 상체가 지면에 쓰레기처럼 나뒹굴었다. 경련은 더욱 심화되었다. 누가 봐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지크가 기사의 몸에 손을 대려 할 때였다.
경련이 멈췄다. 아니, 경련만이 아닌 기사의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호흡 소리가 들리지 않고 가슴의 움직임도 멎었다.
지크가 일어섰다. 죽은 기사를 다리로 툭 밀었다. 기사는 힘없이 굴렀다.
“…죽었군.”
지크는 혀를 차며 윈두르를 다시 등에 둘러멨다.
일단 급박한 사태는 끝났다. 하지만 지크가 기사의 돌진을 막아낸 즉시 검을 뽑아 들었던 기사와 성기사들의 경계는 풀리지 않았다.
“검 집어넣어요. 상황 끝났으니까.”
그래서 지크의 저 태평함에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담이 큰 것일까? 아니면 멍청한 것뿐일까? 그러나 남들의 평가가 어찌 됐건 지크는 자기 할 일을 했다.
“크리스넌 경, 이 녀석 뭡니까?”
지크가 죽어 나자빠진 기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대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한 듯 눈을 몇 번 감았다가 떴다.
강철검 기사단의 부단장인 그가 능력이 없는 사람일 리가 없다. 특히 그는 수도 없이 전장을 누빈 사람이다. 애초에 자신의 휘하 기사가 이빨을 드러낼 때 그도 바로 반응했다. 단, 지크가 너무도 빨리 상대를 제압해 나서지 못했을 뿐이다.
따라서 지크가 뭘 말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단순히 죽은 기사의 호구조사를 하는 게 아니다.
“강철검 기사단에 있던 녀석 중 하나입니다. 한데, 왜 이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혹시 이 새끼가 왜 이딴 짓을 벌였는지 뭔가 아는 녀석 있나?”
부하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니의 콧등에 주름이 졌다.
지금 일어난 일은 절대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지크에게 막혀 접근조차 하지 못했지만 녀석이 누구를 상대로 검을 뽑았는지는 너무도 명확했다.
그리고 그건 상대편도 알고 있었다. 카르위먼의 성기사들은 뽑은 검을 집어넣지 않고 자신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카르위먼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대니도 충분히 알았다.
‘이 자식은 대체 왜!’
죽어 나자빠진 부하 아니, 전 부하를 살려 멱살을 잡고 흔들며 묻고 싶었다.
“일단 우리를 습격한 건 당신들 전부의 뜻이 아니라고 여겨도 되겠소?”
살벌한 눈초리를 한 윈스틴이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니가 급히 답했다.
“물론입니다! 우리도 이 자식이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모릅니다!”
“흐음!”
성기사들의 의심의 눈초리는 여전했지만 일단 검을 내렸다. 하지만 검집에 집어넣진 않았다. 두 집단 사이에 어색하고 경계 어린 분위기가 오고 갔다.
하지만 그 분위기를 지크는 아주 가볍게 쌩깠다.
그는 성기사들 쪽으로 움직였다. 기사와 성기사 모두 검을 내리긴 했어도 아직 검집에 집어넣진 않은 상황에서 지크는 빈손을 휘적휘적 움직이며 걸었다.
성기사들이 움찔했다. 일단은 멈춰 세워야 할까 고민했다. 상대가 만약 스틸월의 기사들이었다면 당연히 접근을 거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스틸월의 협력자이기도 하지만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이기도 하다.
결국 그들은 지크의 접근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지크는 아직도 신전의 잔해에서 찾은 무언가를 들고 있는 성기사에게 다가갔다.
“그것 좀 볼 수 있습니까? 아무래도 저 녀석이 노린 건 당신 같아서 말이죠.”
성기사는 잠시 우물쭈물하다 지크에게 그것을 내놓았다.
분명 인장이 찍힌 명령서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다. 아마도 찢겨나간 명령서의 일부일 것이다.
종이쪽지를 확인한 지크의 눈이 잠시 크게 떠졌다. 하지만 이내 피식 웃었다.
“이거 재미있네.”
“그게 뭡니까?”
윈스틴이 물었다.
“저분이 말했던 대로 명령서입니다. 아니, 명령서의 일부죠.”
“밸리드의 명령서겠군요. 혹시 거기에 중요한 명령이라도 써 있습니까?”
윈스틴의 목소리가 기대에 조금 올라갔다. 혹시 공적으로 삼을 수 있는 정보가 적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뇨. 대부분은 찢겨나가 여기에 있던 명령이 뭐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거 아쉽군요.”
“하지만 인장은 제법 또렷이 남아 있습니다.”
“혹시 제가 봐도 괜찮겠습니까?”
지크는 윈스틴에게 종이쪽지를 넘겼다.
지크의 말대로 종이쪽지에는 ‘명령을 내린다’라는 글자와 반쯤 훼손된 인장이 있었다. 명령의 구체적인 부분은 찢겨 나가 여기서 얻을 정보란 인장뿐.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름 공적은 될 것이다.
“훼손되긴 했지만 알아보지 못할 정도도 아니군요. 이 인장을 조사한다면 밸리드의 꼬리를 잡을 수 있겠습니다.”
“조사할 필요 없습니다. 그 인장, 어디 건지 알고 있거든요.”
지크의 말에 윈스틴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렇습니까? 그것참 좋은 정보로군요. 어디 인장입니까?”
지크의 시선이 그레이그와 스틸월 기사들을 한 번 훑었다. 그리고 덤덤히 인장의 주인을 말했다.
“스틸월입니다.”
“…네?”
환하게 웃고 있던 윈스틴의 표정이 어긋났다.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이 잘못됐나 의심하는 자들이 태반이었고 몇몇은 아예 머리가 텅 비었다. 하지만 지크는 아주 친절하게도 또박또박 다시 그 이름을 말해줬다.
“스틸월이라고 했습니다. 이 영지의 주인인 스틸월 백작가. 인장은 그곳의 것이 틀림없습니다.”
사람들은 침묵했다. 하지만 그건 잠시간에 불과했다. 곧 커다란 혼란이 사람들을 휩쓸었다.
* * *
스틸월 백작은 오만상을 찌푸리고 앉아 있었다. 그가 보통 집무를 볼 때 사용하던 고급 책상은 두 동강이 난 채 그의 앞에서 뒹굴고 있었다.
잉크병이 튕겨 나가 집무실 한쪽 벽을 검은색으로 물들이고 있었지만 스틸월 백작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백작의 앞에 서 있는 트레얼도 마찬가지였다.
평소라면 귀족의 체통을 지키셔야 한다고 백작이 귀찮도록 잔소리를 해댈 그의 입이 꾹 닫혀 있었다. 잉크통이 튈 때 그의 옷에도 약간의 잉크가 묻었지만 그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또 나왔다고?”
“그렇습니다.”
평소처럼 트레얼이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몇십 년을 그와 함께해 온 백작은 알 수 있었다. 트레얼의 목소리가 묘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걸.
“이번엔 어디인가.”
“샤나스 지역의 한 마을이라고 합니다.”
백작은 허리를 굽혀 두 동강 난 책상을 잡았다.
우당탕!
안 그래도 박살 난 책상이 거칠게 옆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잔해와 먼지만 남은, 원래는 책상이 있던 곳에서 백작은 지도를 집었다. 먼지를 털어내고 바닥에 지도를 폈다.
“어디지?”
“여기입니다.”
지도 한쪽을 들쳐 깔려 있던 부러진 깃펜을 잡아 든 트레얼이 지도 한쪽에 동그라미를 쳤다. 백작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봐도 절대로 좋아서 터뜨린 웃음은 아니었다.
“아주 영지 전체에 기생하고 있었군.”
지도에는 방금 트레얼이 친 동그라미 말고도 십수 개의 동그라미가 더 그려져 있었다. 백작령 전체에 그려진 그 동그라미들은 얼마 전부터 발견된 밸리드의 신전들이었다.
밸리드는 전 세계의 적. 아무리 녀석들이 신출귀몰하다고 하지만 이 정도로 백작령 곳곳에 근거지를 만들어놨을 줄은 몰랐다. 이건 밸리드의 위협을 넘어서 백작가의 명예 그 자체를 시궁창에 처박는 일이었다.
“카르위먼 녀석들은?”
“여전합니다. 눈을 시뻘겋게 뜬 채 밸리드의 신전을 찾아낸답시고 곳곳을 쑤시고 있습니다.”
카르위먼. 아무리 그들이 존경받는 무리라고 해도 귀족의 영지를 이런 식으로 헤집고 다닐 수는 없다. 게다가 그들도 귀족들의 눈치는 본다.
하지만 한 영지에서 밸리드의 신전들이 이런 식으로 튀어나온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게다가 성기사들을 더 파견할 수 있게 해달라는 정식 요청서가 날아왔습니다.”
“…꼴이 말이 아니군.”
백작이 이를 갈았다.
하지만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이 질문을 할 때, 백작도 조금은 머뭇거렸다. 천하의 왕국의 강철벽인 그조차 이 화제는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우리를 바라보는 눈은 어떤가.”
트레얼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의심의 시선이 점점 짙어지고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