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4화
‘냄새가 풀풀 나는군.’
아주 구리구리해서 코가 마비될 정도다. 이런 촌구석에 여행자란 놈이 소문을 듣고 와서 여행을 하다가 밸리드의 신전을 찾아냈다? 게다가 그 소문이 이렇게 빨리 퍼져?
‘왜? 금광은 찾아내지 못했나 보지?’
소문을 규합하고 기사들과 의견을 나눌 때 그가 한 말이다. 대니를 포함한 기사들이 킬킬거린 건 덤이다. 그레이그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정말로 좀스러운 녀석이었다.
일단 이 개같은 소문에 뭔가 뒷일이 있다는 건 확실해졌다.
‘문제는 저 신전이 함정이냐, 아니면 뭔가 다른 거대한 음모의 일부냐 하는 것인데.’
지크는 후자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봤다. 하지만 함정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진 않았다.
‘일단은 가 봐야지.’
그래야 확실해질 것이다.
* * *
일행은 다시 동이 트자마자 움직였다. 대충 아침 식사를 때우고 촌장이 가리킨 산에 올랐다. 신전의 정확한 위치는 몰랐다.
여행자가 밸리드의 신전이 있다는 말을 하고 도망간 후, 마을 사람들은 최대한 그 산 근처로는 가지 않으려 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직접 발품을 팔 수밖에 없었다.
‘일단 밸리드의 신전이 있을 조건은 갖췄군.’
지크는 산 바로 옆에 존재하고 있는 호수를 보며 생각했다. 그 생선 대가리를 모시고 있는 놈들이 신전을 세우는 조건 중 하나가 근처에 물이 있을 것 아니던가.
‘하지만 그리 규모가 크진 않겠어.’
호수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으니 신전도 비슷할 것이다.
그들은 2인 1조로 나뉘어 산을 뒤지기 시작했다. 산은 그렇게 규모가 있지 않았다. 파견된 이들 전부가 산 좀 탄다고 피곤을 느낄 리 없는 초인이었던 만큼 수색은 꽤 빠르게 진행됐다.
지크는 그레이그와 조를 짰다. 망할 동생이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냈지만 녀석의 기분 따위는 지크가 알 바 아니었다.
앞을 가로막는 덤불들을 헤치고 경사로를 탔다. 지크의 날카로운 눈이 사방을 훑었다. 그레이그도 마찬가지. 지크가 아니꼬운 건 아니꼬운 거고, 그도 자칫 잘못하다간 사태가 심각해질 수도 있다는 건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둘이 얼마나 수색을 했을까. 지크의 눈에 바위 아래 뚫려 있는 굴이 보였다.
지크는 바로 다가갔다. 크기는 사람이 허리를 숙이면 들어갈 만한 정도.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을 살폈다.
‘누군가 드나들었군. 그것도 많이’
지크의 눈이 빛났다. 감이 왔다.
“여기다.”
“뭐?”
“밸리드의 신전, 여기라고.”
“그걸 어떻게….”
그레이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지크는 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레이그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그뿐, 한숨을 내쉬고 그도 지크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굴 안은 어둠으로 가득했지만 두 사람에게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 울퉁불퉁한 굴 바닥을 성큼성큼 걸어가길 얼마. 굴이 제법 넓어졌다. 허리를 펼 수 있을 정도의 크기가 되더니 곧 집 한 채 정도는 충분히 들어갈 정도의 규모가 됐다.
“이 생선 대가리 자식들은 어떻게 이런 개같은 곳을 잘 찾아내는지 몰라. 생선 대가리가 아니라 바퀴벌레를 모시는 거 아냐?”
자신이 말하고도 무척이나 일리 있는 설이라며 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계속 걸었고 굴의 규모도 조금씩 커졌다.
“여기군.”
그들의 눈앞에 건물 하나가 나타났다.
“…이게 밸리드의 신전.”
그레이그가 침을 꿀꺽 삼키며 눈앞에 나타난 건물을 쳐다봤다.
“너는 처음 보나?”
“처음이고 뭐고 이걸 본 사람은 우리 가문에도 없을걸?”
“뭐, 그럴 만도 하지.”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과 은밀성을 가진 놈들이니만큼 밸리드 신도나 신전을 직접 본 사람은 세계에서도 손에 꼽힌다.
오죽하면 ‘밸리드는 죽인다!’라는 말이 상식적인 언어로서 뇌리에 박혀 있는 카르위먼의 성기사들조차 밸리드의 신전을 보지 못한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일까.
“이참에 봐 둬라. 그리고 이딴 형편없는 집 짓고 사는 놈이 있으면 발견할 때마다 쳐 죽여.”
그게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지크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의 눈으로 신전을 살피는 그레이그를 내버려 두고 지크는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신전은 웬만한 집 두 채 정도의 규모였다. 지크의 예상대로 그다지 크지 않다.
‘인적은 없군.’
신전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역시 볼 때마다 역겹게 생긴 밸르의 석상이었다. 그 앞으로 제단이 보였다.
‘흠, 구조만 봐서는 소규모 기도회를 올리는 곳 같은데.’
종종 제물도 올리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 제물이 제대로 된 제물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제단에 말라붙어 있는 피딱지들이 그 증거였다.
그레이그도 신전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눈이 밸르의 석상에 고정됐다.
“저게 밸르야?”
“밸르는 무슨. 그냥 생선 대가리라고 불러. 생선한테 이름을 붙여주는 정신 나간 취미를 가진 미친놈들의 신앙 따위 존경할 가치도 없으니까.”
아무리 악신이라지만 세상에 공포의 존재로 군림하는 신을 저렇게 깎아내리다니. 어쩌면 처음으로, 그레이그는 지크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부정적인 대단함이었지만.
지크는 신전을 구석구석 뒤졌다.
‘버려진 곳 같지는 않은데. 이 근처에 사는 밸리드의 신도가 사용하던 건가?’
하지만 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이 들렀던 마을에 있는 사람들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설마 그 마을 사람들이 밸리드의 신도일까.
‘그런 기미는 없었어.’
하지만 또 모른다. 밸리드 놈들은 정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놈들이었으니까.
그다지 특별한 것이 발견된 것이 없자 지크는 굴을 나가 신호를 보내 기사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들을 이끌고 다시 신전을 뒤지기 시작했다.
신전을 본 기사들의 반응도 그레이그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밸르의 석상을 흘끔흘끔 보면서 신전 이곳저곳을 뒤졌다. 하지만 머릿수가 늘어났음에도 뭔가 발견되는 것은 없었다.
지크 일행은 일단 굴 밖으로 나왔다.
“우선 밸리드의 신전이 있다는 말은 사실이었군요. 골이 아프게 되었습니다.”
대니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스틸월 영지에 돌고 있는 소문은 세 개. 그중 한 개의 소문이 맞아떨어졌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다른 두 개의 소문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할 터.
문제는 그중 하나의 소문이 스틸월 영지를 끝장낼 만한 소문이라는 것이다. 그레이그와 다른 기사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죠?”
그레이그가 대니를 보며 물었다.
“일단 저 신전을 철저하게 부숴야 합니다. 우리가 밸리드와 관련이 없단 걸 알려야죠.”
지크도 같은 생각이었다. 물론 지크가 신전을 부수려는 이유는 스틸월에 대한 위기 때문이 아니었다.
혹시 신전을 부수는 중 음모에 관한 단서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하나였고 그냥 밸리드 놈들의 신전을 때려 부수고 싶은 생각이 다른 하나였다.
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그들의 생각은 일치했다.
망치나 곡괭이 같은 것은 없지만, 저 정도 소규모 신전을 해체하는 데 그런 도구 따위 필요 없다. 마력을 칼에 담아 몇 번 휘두르면 단단한 돌이라도 진흙이 잘리듯 잘릴 것이다.
의견이 일치했으니 일단 저 꼴 보기 싫은 신전을 부수기 위해 다시 굴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손님이 왔군.”
“손님?”
지크의 말에 대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곧 얼굴을 굳히고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산을 올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던 것이다.
‘저걸 나보다 훨씬 먼저 알아차렸다고?’
대니 크리스넌은 스틸월 영지의 최정예 기사단인 강철검 기사단의 부단장이다. 한데, 지크가 그보다 훨씬 더 빨리 지금 산에 올라오고 있는 사람들의 기척을 감지했다.
‘강해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였나!’
등허리에 식은땀이 흘러내릴 정도다. 고작 몇 년 만에 이 정도 실력을 쌓는 것이 정말 가능하단 말인가.
대니가 가장 먼저 깨달았을 뿐, 다른 기사들도 하나둘 대니가 깨달았던 것을 알아채기 시작했다. 기사들의 시선이 지크에게 몰린다. 그중에 그레이그의 것도 있었다.
하지만 지크는 그 시선들에 신경 쓰지 않았다.
“저자들은….”
번쩍거리는 갑옷에 찍힌 문양이 그들의 정체를 알리고 있었다. 대니가 신음을 흘렸다.
“카르위먼의 성기사.”
대니도 독실한 카르위먼의 신도였기에 평소라면 그들을 꺼릴 이유는 없다. 오히려 먼저 다가가 호탕한 웃음을 보이며 인사를 나눴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성기사들이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성기사들도 스틸월의 기사들을 인식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상대해도 되겠죠?”
지크가 대니에게 말했다. 지금껏 지크는 의외로 대니의 말을 순순히 따르고 있었다. 그가 고삐를 쥐고 흔드는 건 그레이그뿐, 조언이나 요청을 할지언정 기사들을 마음대로 휘두르거나 하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상대는 카르위먼의 성기사. 그렇다면 아무래도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 칭호를 받은 지크가 조금 더 상대하기 편할 것이다. 대니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크는 성기사들 앞으로 나섰다.
“카르위먼의 성기사들이시군요.”
“네. 고귀한 카르나의 충실한 신도인 윈스틴 다이너라고 합니다.”
성기사들을 이끄는 건 아직 성녀가 정해지지 않았을 때, 첼시의 호위를 맡고 있던 윈스틴이었다. 그는 지크의 뒤에 있는 기사들을 봤다. 정확히는 그들의 갑옷에 새겨져 있는 문장을 확인했다.
“여러분들은 스틸월 백작가에서 나오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지크라고 합니다. 일단 스틸월의 협력자죠. 카르위먼에서 명예 성기사 직위를 갖고 있기도 합니다.”
윈스틴 뒤에 있던 성기사들이 감탄성을 내뱉는다.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 그것 하나만으로도 성기사들의 존중을 받기 충분하다. 그러나 윈스틴은 달랐다.
‘명예 성기사 지크?’
들어본 이름이다. 루벨라를 구해주고 그녀에게 공을 세우게 해 성녀의 자격을 받게 한 놈. 첼시를 성녀로 세워 그 벨리 와이그를 넘어선다는 계획을 철저하게 짓밟은 개자식.
‘그게 이놈이라고?’
지크가 명예 성기사를 상징하는 브로치를 보여줬다. 신분이 확인됐다. 윈스틴의 손이 꿈틀댔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눈앞의 개자식의 목을 날려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그 벨리 와이그를 넘어서는 것. 여기서 사적인 감정으로 미래를 망칠 수는 없다.
윈스틴은 미소를 지었다.
“아, 지크 님! 들어본 적 있습니다. 루벨라 님을 여러모로 도와주셨다고 하셨죠.”
윈스틴은 지크와 악수를 나눴다. 당장이라도 쥐고 있는 지크의 손을 으스러뜨리고 싶은 걸 필사적으로 참았다.
지크와 윈스틴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중요한 일을 하기 전에 나누는 잡담 같은 것.
하지만 그 모습을 본 그레이그와 기사단은 자못 충격을 받았다. 지크가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란 사실이 새삼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이야, 저 진지한 성기사들이 엄청 사근사근한데?”
“확실히 명예 성기사는 뭔가 다르긴 한가 봐.”
“조용!”
잡담을 나누는 부하들의 입을 닫게 한 대니는 슬쩍 그레이그를 쳐다봤다.
그레이그는 지크의 등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