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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453화 (453/628)

제453화

지크는 스틸월 백작과 마주하고 있었다. 지크를 대할 때 언제나 좋지 못한 표정을 짓는 백작이지만 지금은 한층 더했다.

부리부리한 눈은 당장이라도 살기를 줄기줄기 토해낼 것 같았고 실룩이는 입은 온갖 험한 말을 쏟아낼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부풀어 오른 팔뚝이 검을 잡고 온갖 것을 파괴할 것 같은 험악한 기세. 누구도 지금의 백작에게 말 한마디 붙이기 힘들 것 같았다.

그러나 지크는 역시 그런 백작에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거참! 새로운 친구들은 어쩌다가 사귀셨습니까? 그것도 집 한쪽을 떡하니 내줄 정도로 친한 사이라니. 친구는 가려 사귀어야 한다고 듣지 않았습니까?”

“…시비를 걸 거면 가라. 지금은 네놈과 말장난할 기분이 아니다.”

자기 기세대로 날뛰는 백작이 저렇게 목소리를 착 까는 것을 보니 확실히 여유는 없는 모양이었다.

더 이상 들이받았다가는 정말로 칼부림이 날 터. 두려운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앞뒤 안 가리고 들이받을 생각도 없었다.

‘하긴, 사태의 심각성을 모를 사람은 아니니까.’

영지에 흘러다니는, 스틸월 가문이 밸리드와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헛소문. 하지만 이번에 밸리드 놈들이 진짜로 발견되면서 단순한 헛소문이 아니게 되었다.

슬슬 의심의 기운이 흐르게 됐다.

물론 스틸월 백작가가 당장 밸리드로 낙인찍히진 않았지만 사안이 사안이다. 정말로 밸리드란 누명이라도 써버리면 가문이 아작나는 것이다. 당연히 백작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당장 정확한 사태의 파악과 가능하다면 소문의 출처를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이 사태가 어떤 다른 이의 음모라면 철저하게 분쇄해야 한다.

“조사대를 파견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리 남습니까?”

백작이 조금 놀란 눈초리로 지크를 쳐다봤다.

“너도 갈 생각이냐?”

“명색이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가 밸리드 놈들이 나타났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죠.”

조사대에 지크를 끌어들이자는 목소리는 가문 내에서도 있었다. 명색이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가 아니던가.

솔직히 백작으로서도 구미가 당기는 일이긴 했다. 지크를 이용한다면 누명을 훨씬 더 쉽게 벗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백작은 여지껏 망설이고 있었다.

자존심 때문은 아니었다. 까딱 키를 잘못 움직였다간 스틸월이란 배 자체가 산산이 부서질지 모를 이 판국에 자존심을 세울 정도로 백작은 머저리가 아니었다.

문제는 지크조차 자신을 의심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백작으로서는 아직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지크는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였으니까.

“…조사대를 감시할 생각이더냐.”

“뭔 감시?”

지크는 뚱딴지같은 얘기를 듣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가 증거를 인멸하러 간다는 이야기가 있다.”

“벌써 그딴 소문이 돌 정도면 심각하긴 한 모양입니다.”

지크는 피식 웃었다.

“차라리 잘됐습니다.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인 내가 같이 간다면 그딴 헛소문 따위는 자연스레 지워지겠죠. 아무리 같은 핏줄이라지만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가 밸리드를 싸고돈다는 소리는 못 할 테니까요.”

“…의심하지 않는 모양이구나.”

“누구를요? 백작님을?”

지크는 어림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왕국의 강철벽이란 이름을 싸고 돌며 밸리드에 영지를 팔아먹느니 손수 부숴 버리겠다 할 백작님이 어떻게 밸리드가 될 수 있습니까? 차라리 근처 정원에서 잡은 개미 새끼를 신이라고 부르며 모시고 있다는 게 더 설득력 있죠.”

“그러느냐.”

백작은 고민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짧았다. 어차피 부탁을 할지 망설이고 있던 참이 아니었던가. 솔직히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좋아. 말해놓지.”

“언제 보낼 겁니까?”

“내일.”

“빠르기도 하네.”

하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크는 그곳에 참여하겠다고 했고 백작은 허락했다. 용건이 끝났으니 방으로 나가려던 지크가 멈칫했다.

“아, 하나 조건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일이 일이니만큼 백작은 웬만한 것은 흔쾌히 들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크의 말을 듣고 볼을 떨어야 했다.

“그레이그 녀석도 같이 갈 겁니다.”

형님의 위엄을 보여주는 작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 * *

조사단의 숫자는 단출했다. 지크와 그레이그와 기사들 몇 명이 전부.

하지만 그 몇 명의 기사들은 전부 강철검 기사단에서도 수위에 드는 기사들에, 그들을 이끄는 건 강철검 기사단의 부단장인 대니 크리스넌이었다.

스틸월 백작가에서 지금의 상황을 얼마나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인선이었다.

그들은 날이 밝자마자 말을 타고 도시를 나왔다. 한시라도 빨리 도착하기 위해 말을 달렸다. 그 덕에 그들은 상당히 빠르게 목적지 근처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은 어디서나 볼 법한 평범한 농촌 마을이었다. 하지만 마을에 인적은 드물었다. 작은 마을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근처에서 발견되었다는 밸리드의 신전 때문일 터였다.

“어이쿠! 어서 오십시오, 나리들!”

촌장이 그들을 열렬히 반기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자신들의 마을에 군대가 오는 것을 반기는 마을은 없다. 아무리 국가적으로 허가받은 무력단체라고는 하지만 그들이 움직이는 살인기계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혹시나 저 칼이 자신들에게 향하지 않을지 걱정하며 지내는 게 달가울 리 없다. 그런 마을 사람들이 무력단체를 환영한다면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 무력단체보다 더 그들에게 위협이 되는 것이 있을 것.

그건 산적이 될 수도 있고 타국의 군대가 될 수도 있으며 전혀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번에 그들을 위협하는 건 무시무시한 생선 대가리의 신전이었다.

대니가 앞으로 나서 말을 했다.

“근처에 밸리드의 신전이 있다고 해서 왔다.”

“네, 네! 있습니다! 그 흉물스러운 게 정말로 있었어요!”

말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지 촌장이 눈을 질끈 감는다. 밸리드를 좋아하는 인간 따위는 없고 밸리드의 끔찍함에는 누구나 치를 떨지만, 아무래도 순박한 농촌의 사람들은 더더욱 그랬다.

그들은 근처에 밸리드의 신전이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 마을에 온갖 부정한 일들이 일어나 마을 사람들이 픽픽 죽어 나가지 않을까 걱정했다.

때문에 그들은 기사들이 당장이라도 그 신전을 박살 내줬으면 했다.

“어디에 있지?”

“저, 저 산입니다요!”

촌장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마을과 조금 떨어진 곳에 우뚝 솟아 있는 산이었다. 그다지 특색 같은 것도 보이지 않는, 어디서나 산 하면 흔히 떠올릴 그런 모습.

하지만 밸리드의 신전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산은 조금 다르게 보였다. 과장 좀 보태서 저 스스로 벌떡 일어나 검은 돌과 썩은 나무를 토하며 난동을 부리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였다. 아니, 촌장은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대니는 당장 기사들을 이끌고 움직일 기세였다. 하지만 지크가 말렸다.

“크리스넌 경.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왜 그러십니까?”

“오늘 하루는 일단 마을 근처에서 숙박을 하고 내일 오르지 않겠습니까?”

대니가 눈살을 찌푸렸다.

“당장 가서 모조리 때려 부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제안을 하는 사람이 부하나 다른 이였다면 당장 의견을 무시하고 저 산으로 멧돼지처럼 달려갔겠지만, 상대는 지크였다.

백작의 가족이나 옛 후계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갑작스럽게 터진 사건에 위협을 느끼긴 하면서도 백작가는 이게 정말로 스틸월 그 자체를 흔들진 못할 거라고 봤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사건을 가볍게 여기지도 않았다.

정말로 상황이 최악에 최악을 거듭해서 음모가 백작가를 완전히 뒤덮는다면 지크란 존재는 백작가에 마지막 등불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그가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였으니까. 그의 지지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건 능력 있는 옛 후계자를 그리워하네 같은 감정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때문에 대니는 깍듯하게 지크를 대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고 싶거든요. 저곳에 신전이 있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여기 사람들의 입에서 소문이 퍼진 건지 등등 말이죠.”

“음.”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저 산에 있을 빌어먹을 밸리드의 신전인지 개집인지를 때려부수는 것도 분명 급한 일이지만, 가장 중요한 건 이 엿 같은 일이 왜 생겼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야영을 하도록 하죠.”

“네? 바로 가시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촌장은 한시라도 빨리 기사들이 밸리드의 신전을 때려부수길 기대하는 모양이었다.

“일단 너희들에게 물어볼 게 있다. 여기 계신 분이 너희들에게 질문을 할 테니 거짓없이 대답을…!”

“경은 뒤로 물러나 있어요.”

바들바들 떠는 촌장에게 거의 윽박지르듯 말하는 대니를 지크는 뒤로 물렸다.

안 그래도 공포에 눈이 돌아간 사람에게 협박이라니. 공포 때문에 알고 있는 지식도 까먹게 생겼다.

“자, 괜찮습니다. 무서워할 것 없어요. 저분도 빨리 이 소문의 근원을 찾아 이 사건을 해결하려고 했을 뿐이니까요. 성정이 거칠어서 그렇지 악감정은 없습니다. 일단 진정부터 하시고 질문에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지크가 잔잔하게 얘기를 하자 당장이라도 숨넘어갈 것 같던 촌장의 신색이 차츰차츰 평안해졌다.

그 이후에도 지크는 촌장을 안심시키며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그레이그를 위시로 사람들이 지크를 경악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봤지만 지크는 무시했다.

* * *

밤하늘에 별이 떴다. 아무리 밤이라도 군데군데 불빛이 보이는 도시와는 다르게 마을은 해가 지자마자 완벽한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자그마한 불빛 하나 없는 그 곳은 완벽하게 어둠의 세력이었다.

당연히 바깥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시기가 시기이니 더 그런 감도 있었다.

마을 사람 누구도 함부로 바깥에 나돌아다니다 밸리드의 악마들에게 납치당하고픈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공포스러운 밤거리를 태연히 걸어다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지크였다.

밤의 어둠 따위는 그에게 장애물조차 되지 않았고 밸리드 놈들의 습격 따위는 오히려 그가 바라는 바였다.

그는 천천히 거리를 거닐며 오늘 들은 정보를 정리했다.

‘여행자라….’

촌장을 포함해 마을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어느 날 이 마을에 어떤 여행자가 들렀다고 한다.

보통 외부인을 경계하는 것이 시골 사람들이라지만 그는 상당한 친화력과 돈으로 마을 사람들의 경계를 허물었다고 한다.

도시에서 도는 이야기라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줬고 마을 사람들은 그가 하는 이야기에 흥미를 가졌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한창 스틸월 영지에 돌고 있는 소문을 들은 것도 그 때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을 사람들은 재수없다는 생각을 가졌지만 그리 걱정하지는 않았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고 소문이 가리킨 지역은 그 지역이 맞긴 하지만 범위 자체는 꽤나 넓었다.

정말로 밸리드 놈들의 신전이 있다면 낯선 이가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은 보여야 하지 않던가.

즉, 이 근처에 밸리드 신전은 없다.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재수 없는 소문이라며 바닥에 침을 뱉는 정도였다.

하지만 어느 날, 이 마을을 중심으로 여행을 하고 있던 여행자가 사색이 된 얼굴로 돌아왔다. 그리고 허둥지둥 짐을 챙겨 마을을 나가려고 했다.

당연히 마을 사람들은 그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물었다. 걱정했다. 그가 머물면서 상당한 친분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가 던진 한마디는 사람들은 얼어붙게 했다.

“배, 밸리드! 밸리드의 신전이 정말로 있었어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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