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2화
그렌 제너드. 요 근래 플로드 백작가에 머물고 있는 손님이다. 자그마치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 직위를 받은 자로서 백작의 고민 몇 개를 해결해준 공로로 백작가에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들과 더불어 더욱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기도 했다.
“그래, 스틸월 영지는 어떻습니까?”
그렌이 물었다. 그의 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마치 먹잇감을 찾는 뱀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것 같다.
하지만 그건 잠깐이었다. 더러운 일 쪽으로 머리가 상당히 잘 돌아가고 눈치도 빠른 클린트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우리가 찾는 낌새는 없었습니다.”
“그래요?”
그렌은 담담히 대답했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직도인가.’
부하들을 조금 더 채근할 필요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렌은 그대로 클린트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 애초에 자기가 원하는 바가 없으면 그는 엑스트라들에게 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것들은 그저 자신을 빛내주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었다.
하지만 클린트의 다음 말에 그렌은 다시 그의 말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스틸월 영지의 장자가 돌아왔다는 걸까요?”
“…스틸월 영지의 장자요?”
“네. 지크 스틸월이라고, 저희 백작님의 손자이기도 한 자죠. 스틸월 백작과 사이가 틀어져 가문을 나갔다고 들었는데 이번에 가보니 돌아와 있더군요. 다만….”
클린트는 지크가 자신에게 했던 태도를 생각하며 살짝 이를 갈았다.
“성격은 지랄맞더군요. 누가 그 천한 스틸월의 피를 이은 놈 아니랄까 봐.”
그렇게 지크에 대한 험담을 한 그는 백작의 저택을 쳐다봤다.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하도록 하죠. 저는 일단 백작님께 보고를 해야 해서요.”
“바쁘신 분을 잡고 있었군요. 실례했습니다. 어서 가시죠.”
클린트는 그렌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렌은 혼자 남았다. 그의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지크 모어가 스틸월 가문에 돌아갔다고?’
원래라면 지크는 스틸월 가문에서 나온 후 다시는 귀환하지 않았어야 한다. 그는 아예 스틸월 가문에 대한 신경을 끄고 살았다. 하지만 지금, 지크가 스틸월 영지에 있다고 한다.
‘이것도 변수에 의한 건가.’
하지만 그렌은 실망하지 않았다. 고작 이 정도로 실망하기에 이번 시간선은 정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이 소식에 기뻐했다.
원래 스틸월의 멸망에 지크는 껴 있지도 않았다. 스틸월을 몰살시킨 건 그의 출생까지 더럽히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지크가 그의 가문에 신경도 쓰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렌은 그저 본인의 저열한 만족감만을 충족시키면 그만이었다.
스틸월을 멸망시킬 도구도 무척 만족스러웠다. 명색이 지크의 외가가 아니던가.
지크의 외가가 지크의 가문을 멸망시킨다. 그 짜릿함에, 그렌은 스틸월 멸망 계획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그게 마인을 만드는 것도, 그래서 자신이 용사가 되게 만들어주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때문에 이곳으로 왔다. 감히 자신을 제치고 용사로서 추앙받기 시작한 지크의 근본을 없애기 위해서.
한 마디로 화풀이였다.
스틸월 가문의 멸망은 그렌의 계획으로는 조금 더 뒤의 일이었지만 이미 이 시간선에서 정해진 계획 같은 건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일찌감치 스틸월을 끝내려 했다.
한데, 지금 스틸월에 지크 모어가 있다고 한다.
‘이번에야말로 내가 진정한 용사라는 걸 알려주겠어!’
그렌은 주먹을 꽉 쥐었다. 살짝 마력을 돌린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거대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몸이 욱신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서 자신이 얻은 이 새로운 힘을 온 세상에 자랑하고 싶었다. 그 대상이 지크라면 더더욱 기쁠 것이다.
‘계획을 더 앞당긴다.’
그의 노예가 뭐라고 항의를 하겠지만 그딴 건 알 바 아니었다. 노예는 그저 주인이 시키는 대로 앞길을 깨끗이 닦아놓기만 하면 된다.
‘기다려라!’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우월성을 보여줄 것이다. 스틸월의 화려한 몰락과 함께.
* * *
그레이그가 혈전에 익숙해졌다는 이유로 지크는 요새 그레이그와의 대련을 줄이고 있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그레이그를 패는 게 질렸다는 것이었다.
‘슬슬 녀석과 몬스터 사냥이라도 나갈까.’
이제는 ‘위대한 형님’ 작전을 시행할 때가 온 것 같다. 물론 백작 부인이 길길이 날뛰겠지만 그걸 막는 거야 백작이 할 일이다.
‘직접 두들겨 패는 것과 굴리며 괴롭히는 건 차이가 있지. 조금 더 즐길 수 있겠어.’
지크가 음흉하게 웃을 때였다.
“아, 지크 님!”
멀리서 스녹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엘레나와 함께였다. 바깥에서 오는 걸 보니 둘이 외출이라도 하고 온 모양이었다.
지크 일행이라고 매일 한 무리로 움직이는 건 아니지만, 요새는 같이 움직이는 사람들이 거의 정해져 있었다.
지크와 라일라, 한스와 라라, 스녹과 엘레나. 물론 간간이 셋, 넷으로 다니기도 하고 다른 사람과 다니기도 했지만, 주로 같이 다니는 무리는 그랬다.
“데이트라도 하고 오는 거냐?”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지크의 농에 스녹과 엘레나가 단호히 말했다. 하지만 스녹의 어깨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있는 노웸이 한숨을 거하게 쉬는 걸 보니 아마도 본인들이 자각만 못 했을 뿐인 모양이었다.
조금 더 놀려먹을까 하다가 지크는 관뒀다. 무척이나 관대하게도 이 풋풋한 녀석들을 한동안 놓아두기로 했다.
“좋아, 믿어 주마.”
그 한 마디를 남기고 지크는 그들을 지나치려 했다.
“지크 님.”
스녹이 지크를 붙잡은 건 그때였다.
“뭐냐?”
“사소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만, 도시 밖에 묘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소문?”
지크가 몸을 돌렸다. 스녹이 고작 옆집 누구가 바람이 났네, 저 집은 싸게 파는데 이 집은 비싸게 파네 같은 시시콜콜한 소문을 주워왔을 리 없다.
“뭔데?”
“스틸월 백작님이 비밀리에 밸르를 신앙하는 밸리드 교인이고 스틸월 영지 곳곳에 밸리드의 비밀 신전이 있다고 하더군요. 특히 이곳 비올사 어딘가에는 대규모의 밸리드 신전이 있다고도 하고요.”
“참신한 개소리군.”
지크는 귀를 후볐다.
지크는 분명 스틸월 백작가를 싫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짓된 이유로 스틸월 백작가를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차라리 근거도 없이 그냥 싫다고 하는 게 낫지.’
그 정도야 별것도 아니잖은가. 다른 사람이 들으면 검지를 머리 옆에 대고 빙빙 돌릴 만한 생각을 역시 지크는 태연하게 했다.
“역시 거짓말이겠죠?”
“그딴 사교 놈들의 혀 놀림에 넘어갈 만큼 백작의 머리에 근육 뇌는 무르지 않아.”
지크는 대놓고 자기 아버지를 비꼬았다.
“밸리드 놈들에 대한 소문이라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 말씀드렸습니다.”
“잘했다. 하지만 밸리드 놈들에 대한 헛소문은 세계 어디에든 퍼져 있어. 명백한 세계의 공적이니까. 가벼운 소문 같은 건 무시해도 된다.”
스녹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크가 다시 갈 길을 가려 했다. 하지만 이번엔 엘레나가 지크의 발을 막았다.
“하지만 소문이 꽤 넓게 퍼져 있었어요. 얼마 전에는 그런 소문이 없었는데 말이죠.”
“넓게 퍼져 있어?”
지크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저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다.
“알았다. 이 일은 내가 알아보마.”
스녹과 엘레나가 떠난 후, 지크는 생각에 잠겼다.
‘밸리드 놈들의 소문이라….’
일단 소문이 헛소문이란 사실 하나는 확실했다. 스틸월 백작의 성정을 생각하면 도저히 밸리드일 수가 없었다.
‘둘 다 똑같이 성깔이 개같긴 하지만 방향성이 다르지.’
그렇다면 정말로 그냥 헛소문일까. 하지만 엘레나가 조금 이상함을 느꼈다는 게 수상했다.
경험은 없을지언정 머리는 끝내주게 좋던 그녀가 아니던가. 그런 그녀가 여행을 다니며 지크와 라일라의 생각과 행동을 보고 들으며 상당한 경험을 쌓았다. 그녀가 이상함을 느꼈다면 한번 의심해볼 만하다.
‘그러고 보니 소문은 세 개였지.’
전부 스틸월 영지와 밸리드가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라 어쩌면 하나의 소문으로 들을 수 있지만 스녹이 말한 소문은 분명 세 개였다.
‘스틸월 백작이 비밀리에 밸르를 신앙하는 밸리드 교인이다.’라는 것이 하나.
‘스틸월 영지 곳곳에 밸리드의 신전이 있다’라는 것이 또 하나.
‘비올사 어딘가에 대규모의 밸리드 신전이 있다’라는 것이 마지막 하나.
그중 지크가 거짓이라 확신하는 건 스틸월 백작이 비밀리에 밸르를 신앙하는 밸리드 교인이라는 것 하나뿐이었다.
‘나머지 두 개는 사실일지도 모른단 말이지.’
순간 지크는 회귀 전을 떠올렸다. 변덕으로 찾았던 스틸월 백작가는 몰살당해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설마 그게 이것 때문이었나?’
밸리드 문제라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만약 스틸월 영지가 밸리드와 내통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면 혹은 누명을 썼다면, 아무리 왕국의 강철벽이라 목소리를 높이는 스틸월이라도 꼼짝없이 멸망할 수밖에 없다.
당장 카르위먼이 파문장부터 날리고 성기사들을 불러 모을 것이며, 스틸월이 동료라 생각했던 크로뇽 왕국 또한 냉정하게 고개를 돌릴 것이다.
그렇게 세상 모든 것에서 외면당한 가문의 결말은 당연히 멸망뿐이다.
밸리드란 그런 존재였다.
‘조금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지크는 백작가를 나서 탐문에 들어갔다.
대충 소문은 스녹과 엘레나가 말한 정도였다. 얼핏 보면 군데군데 퍼져 있어 그냥 시장바닥에 나도는 흉흉한 소문 정도 같다.
하지만 엘레나가 말한 대로 퍼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소문치고는 상당히 넓게 퍼져 있었다.
‘일부러 퍼뜨린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단정하기엔 또 애매했다. 소문이란 것이 한번 퍼지기 시작하면 정말로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 것이니까.
그러나 보통 소문이 빨리 퍼질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때가 많다.
‘누군가 작정하고 퍼뜨리거나 아니면 확연한 진실에 근거한 소문이거나. 아니면 둘 다거나.’
당장 확답을 내릴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잠시간 눈을 둘 이유로는 충분한 소문이다. 당분간 계속 백작가를 나올 필요성이 생겼다.
그리고 얼마 뒤, 지크는 소문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퍼지는 것을 느꼈다. 지크의 예상이 맞을 가능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소문도 점점 더 구체화가 되어가고 있었다. 밸리드의 신전이 있는 곳이라 추정되는 곳이 특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쯤 되니 백작가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처음에는 언제 어디서나 도는 헛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소문이 너무도 구체적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백작가는 소문의 출처를 찾기 시작했다. 그들도 혹시 누가 일부러 소문을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닿은 것이다.
동시에 밸리드의 신전이란 소문의 장소도 찾기 시작했다. 정말로 소문이 사실이라면 가장 먼저 그 신전을 찾아 부숴버릴 생각이었다. 혹시나 생길 의심을 해소할 방법은 역시 그것이 최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백작가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소문대로 스틸월 영지에서 밸리드의 신전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신전을 발견한 건 스틸월 영지의 병사들이 아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