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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451화 (451/628)
  • 제451화

    플로드 백작가에서 사신이 찾아왔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지크는 콧방귀를 뀔 뿐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아마도 사신이 스틸월 백작가에서 지크의 편을 들어주러 왔다고 확신하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아닌 제 놈들을 위해서일 테니까.’

    어떻게든 자신들과 관련이 있는 지크를 스틸월 백작으로 만든 후, 스틸월 백작가를 도모하려는 음모가 너무 노골적이라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지크의 플로드 백작가에 대한 소속감이나 동질감 같은 것은 스틸월 백작가보다도 없었다.

    ‘딸이랑 손자가 있는데도 전쟁 거는 놈들한테 무슨.’

    그 때문에 안 그래도 성질 더럽던 어머니가 폭주해서 자신의 유년 시절을 외톨이로 만들어 버렸지 않던가. 굳이 나서서 패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그들의 말을 따를 생각도 없었다.

    지크는 라일라와 한스를 끌고 백작가에 들어섰다. 플로드의 사신에 대한 생각은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스틸월 백작가가 알아서 쫓아내 주겠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여기 계셨군요.”

    누군가 지크를 향해 급히 다가왔다. 트레얼이었다. 지크가 그를 쳐다봤다.

    “무슨 일입니까?”

    백작의 앞에서 대놓고 신경전을 벌인 것과 달리 상황이 대충 정리된 후로 둘은 서로 존대를 하고 있었다. 애초에 둘 다 상대에게 악감정은 없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그만 방에 머물러 주실 수 없는지요.”

    지크는 피식 웃었다.

    “플로드 백작가에서 온 사람 때문에 그럽니까?”

    “…알고 계셨습니까.”

    “한스가 가르쳐 주더군요.”

    “알고 계시다면 이야기가 빠르군요. 그들이 갈 때까지만 방에 계시면….”

    “굳이 그럴 필요 있겠습니까.”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트레얼이 대놓고 인상을 찡그리고 지크가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인 듯한 낯선 남자 한 명이 몇 명의 사람을 이끌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곁에 있던 스틸월 병사들의 표정이 트레얼과 비슷하다.

    이토록 명백한 반응을 보여준다면 싫어도 상대의 정체를 알 수밖에 없다. 이번에 왔다는 플로드 백작가의 사신이 분명했다.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트레얼이 나서 말했다. 슬쩍 지크를 몸으로 가리는 게 그가 지크와 대화를 나누는 걸 꺼리는 모양새가 분명했다. 지크는 일단 관망했다.

    “백작님과 말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한데, 그 와중에 뜻하지 않은 만남을 가지게 됐군요.”

    사신의 눈이 지크를 향했다.

    “설마 지크 스틸월 공자가 돌아와 계셨을 줄은….”

    트레얼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그에 비해 지크는 감탄했다.

    ‘이 녀석들, 꽤 준비 잘 해왔는데?’

    지크를 한눈에 알아본 걸 일컫는 것이다. 아무리 플로드 백작가가 지크의 외가라고 해도 그들은 지크를 잘 모른다.

    아무렴 평화를 만들자며 가문끼리 결혼을 해놓고 그걸 한 번에 날려버린 작자들에게, 명색이 자신들의 후계자를 보여줄 정도로 스틸월가는 어리숙한 자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사신은 지크를 바로 알아봤다.

    ‘초상화 같은 걸 구해서 철저하게 내 얼굴을 익힌 거겠지. 나이를 먹어 얼굴이 조금 변했지만 못 알아 볼 정도는 아니니까.’

    사신이 트레얼을 향해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이것 참, 너무한 것 아닙니까. 우리가 지크 공자님을 찾아왔다는 걸 잘 아시면서 이렇게 숨기시다니요.”

    “숨긴 적 없소. 이 분은 더 이상 우리 스틸월 백작가의 일원이 아니시니, 굳이 소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 여겼을 뿐이오. 무엇보다 당신들은 더 이상 백작가에 머물지 못 하지 않소.”

    당장 쫓아내라는 백작의 명령이 있었지만 저들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백작가에서 최대한 뭉그적거렸다.

    스틸월은 거친 변경백의 가문이고 상대는 적성 영지의 사신이다. 당연히 수틀리면 물리력을 써서라도 강제로 끌어낼 셈이었다. 하지만 상대도 그걸 아는지 스틸월 백작가 병사들의 쥐꼬리만 한 인내심을 넘지 않도록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며 최대한 뻐겼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사신은 트레얼을 지나쳐 지크에게 다가갔다. 트레얼이 막으려 했지만 마치 장애물을 피하는 쥐새끼처럼 사신은 트레얼을 피했다.

    “처음 뵙습니다, 지크 공자님. 전 플로드 백작님을 모시고 있는 클린트 주드라고 합니다.”

    지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팔짱을 끼고 클린트를 쳐다봤다.

    “역시 다시 돌아오실 줄 알았습니다. 공자님의 할아버님인 플로드 백작님께서도 무척이나 기뻐하실 겁니다.”

    “그 작자가 왜 기뻐한다는 거요?”

    “네?”

    클린트가 얼빠진 소리로 되물었다. 귀족가의 자제라고는 믿기지 않는 험하고 거친 말투에 놀란 것이다.

    그러나 트레얼과 사신들을 감시 및 안내하던 병사들은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막았다. 저 빌어먹게 짜증나는 사신의 당황한 얼굴을 보니 지금까지 겪은 분노와 짜증이 스르르 사라졌다.

    그리고 묘한 기대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지금껏 스틸월 백작가가 지크의 예상치 못한 말과 행동에 얼마나 휘둘렸던가. 그걸 저 얄미운 플로드 백작가의 사신 놈이 당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왜 기뻐하다니요. 당연히 손자인 지크 님을 아끼고 계시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 작자’라는 호칭은 애써 외면하며 클린트가 말했다. 하지만 지크는 코웃음을 쳤다.

    “제 딸과 손자를 방패 삼아 평화를 위장한 뒤 사위의 뒤통수를 치는 분이 나를 아끼고 있다라. 이야, 이거 기뻐서 몸이 부들부들 떨리네.”

    지크가 과장되게 몸을 떨었다. 클린트의 얼굴이 굳었다. 아무리 잘 보여야 할 상대라지만 지크는 지금 플로드 백작을 조롱하고 있던 것이다.

    “…공자님의 말씀은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 아무리 귀족의 세계가 비정할 수밖에 없다지만, 당하는 사람에게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백작님도 그 결정에 무척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그 때문에라도 공자님께 많은 지원을 해….”

    “필요 없소.”

    더 이상 들을 필요 없다 판단한 지크는 단호하게 클린트의 말을 끊었다.

    “지원은 무슨. 딸과 손자를 이용해 평화를 위장하고 기습까지 했으면서 역으로 처맞고 쫓겨나간 인간들의 지원? 필요도 없고 설혹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당신들의 능력이 의심스럽소.”

    “…….”

    클린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지크가 입에 올린 사건은 현재 플로드 백작가에서는 절대로 입에 담으면 안 되는 사건이었다.

    평화라는 명분하에 스틸월 영지의 경계심을 내리고 기습을 가한 플로드 백작가였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들은 스틸월 백작가의 반격에 철저하게 깨져나갔다.

    남은 것은 제 피붙이까지 동원해 평화를 위장한 후 공격을 한다는 불명예스러운 일까지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패했다는 조롱과 모욕뿐.

    때문에 플로드 백작가에서 그때의 일은 언급조차 금지였다. 한데, 지크는 대수롭지 않게 그것들을 깨부순 것이었다.

    당장이라도 분노를 내뿜고 싶은 클린트였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옆에서 조롱의 눈길로 쳐다보고 있는 스틸월 백작가의 사람들을 더 이상 보고 싶지도 않았다.

    “…공자님의 의사는 알았습니다. 귀환을 축하드리며 다시 뵙길 바라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지금껏 어떻게든 내쫓길 시간을 늦추며 백작가 안을 탐색하려 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클린트는 재빠르게 일행을 이끌고 움직였다.

    병사들이 급히 그들에게 붙었다. 백작가를 나갈 때까지 감시를 해야 했다. 하지만 병사들의 발걸음이 묘하게 가벼워 보였다.

    클린트의 일행과 병사들이 사라지자 트레얼이 실없이 웃기 시작했다. 크게 폭소를 터뜨린 건 아니지만 그의 유쾌함을 표현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큭큭큭큭! 아, 요 근래에 가장 재밌었던 장면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친우들과 술을 마시며 한껏 웃음을 터뜨릴 주제를 건졌다.

    “설마 도련님이 가문의 편을 들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재미있는 광경을 본 것도 포함해서 말이죠.”

    혹시 아직 스틸월 가문에 미련이 남은 것일까. 트레얼은 살짝 기대감을 가졌다.

    “응? 내가 무슨 편을 들었단 말입니까?”

    지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가문의 편을 들어 플로드의 사신에게 모욕을 준 것 아니었습니까?”

    “아닙니다만? 내가 왜 스틸월의 편을 듭니까? 그냥 저 녀석이 헛소리를 찍찍 해대니 정신 좀 차리라고 가볍게 충고 비슷한 걸 해준 것뿐입니다.”

    충고? 저 악의가 뚝뚝 떨어지는 빈정거림이? 트레얼은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는 슬쩍 지크의 옆을 봤다. 라일라가 머리를 짚고 한스가 살짝 한숨을 쉬는 모습이 보였다. 다시 지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뭐가 문제냐는 듯 태연한 얼굴로 서 있었다.

    ‘…백작님의 의견처럼 이분은 그냥 후계자 자리에서 제외시키는 게 나을지도.’

    지크가 실력을 드러낸 이후 처음으로 트레얼의 마음속에서 지크에 대한 지지가 감소하는 순간이었다.

    * * *

    클린트는 스틸월의 영지를 떠나 플로드 영지로 진입했다. 영지에 들어서자 그는 일단 안도했다. 스틸월 영지에서는 당당하게 행동을 했었지만 그는 내심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언제 스틸월 백작이 변덕으로 자신의 목을 쳐 날릴지 몰랐던 것이다.

    그 정도의 사이였다. 스틸월 백작가와 플로드 백작가는.

    하지만 그것도 끝이었다. 일단 플로드 백작가의 영토에 들어왔으니 한숨 놔도 됐다. 아무리 플로드 백작가가 스틸월 백작가에 비해 힘이 좀 달린다지만 자신의 영토 안에서 다른 귀족 세력이 함부로 날뛰게 둘 정도로 엉망은 아니었던 것이다.

    일단 마음이 편해지자 클린트는 본격적으로 이번 스틸월 영지행의 성과를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웬만한 것들은 예전과 비슷비슷했다. 스틸월 백작은 여전히 무례의 극치였고 다른 이들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망나니 같은 놈들.’

    스틸월 백작가에서는 깍듯이 예를 갖추던 그였지만 대대로 서로 다투던 가문이다. 당연히 그도 스틸월 백작가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솔직히 아무리 그의 주군의 명령이라지만 스틸월 백작가에 사신으로 가는 건 거부하고 싶었다.

    ‘그래도 이번엔 공을 세웠으니 보람은 있군.’

    클린트는 히죽 웃으며 스틸월 백작가에서 만난 예상치 못한 만남을 떠올렸다.

    스틸월 백작가의 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떠났다 하는 첫째 공자, 지크 스틸월. 플로드 백작의 외손자이기도 한 그가 돌아와 있던 것이다. 그의 행방을 주의 깊게 찾고 있던 플로드 백작가로서는 분명 좋은 일이었다.

    ‘싸가지는 없었지만.’

    그와 나눈 대화를 생각하자 다시금 불쾌함이 비집고 올라왔다.

    ‘쓰레기 같은 스틸월 백작가에서 자랐으니 그 정도 천박함은 어쩔 수 없겠지.’

    그러나 상관없었다. 어쨌든 목적한 바는 이루었다.

    ‘하지만 백작님도 참 가능성 낮은 일을 시도하시는군.’

    자신의 핏줄을 이은 자를 스틸월 백작으로 만들어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게 말이야 좋지, 그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플로드 백작도 그다지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지는 않고 있을 터.

    ‘찔러보는 정도야 뭐. 그렇게 경비가 드는 일도 아니니. 하지만 목숨 걸고 스틸월 영지에 다녀야 하는 사람들의 생각도 좀 해주시면 좋겠는데 말이야.’

    클린트는 한숨을 쉬었다.

    그가 탄 마차는 계속해서 움직여 플로드 백작가에 도착했다.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다녀온 곳이 스틸월 영지다 보니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한 것 같다.

    클린트가 보고를 위해 백작가에 들어가려 할 때였다.

    “주드 씨가 아니십니까.”

    클린트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그는 목소리의 주인과 악수를 나누며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제너드 씨.”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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