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9화
‘소문은 들었었지만….’
왕도 웨스틸버드에서 지크와 같이 나타난 한스가 엄청난 실력을 뽐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미헨은 그리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리 한스가 재능이 있었다고 해도 배움의 기간이 무척 짧았기 때문이다. 지크의 검 실력과는 별개로 가르침의 실력에 대한 의구심도 한몫했다.
게다가 한스가 들고 있다는 범상치 않은 검도 그의 실력을 박하게 평가한 이유 중 하나였다. 백작에게 직접 당시의 상황을 들었었지만, 그래도 직접 보지 못한 만큼 상당히 보수적으로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지금 미헨은 그 판단을 정반대로 돌려놓아야 했다.
‘강하다.’
그가 내린 한스에 대한 평가는 단순했고 그렇기에 강렬했다.
라라의 실력도 나쁘지 않다. 아니, 정말로 뛰어났다. 솔직히 그녀가 허락만 한다면 당장에라도 기사단에 집어넣고 싶었다. 그것도 그의 직속이자 영지 내에서 최정예란 칭호를 받는 강철검 기사단에.
그러나 한스의 실력은 그런 라라를 완전히 웃돌고 있었다. 대련이라고는 하지만 누가 봐도 한스가 라라의 검술을 봐주고 있는 모양새였다.
“어느 정도 실력일 것 같냐?”
“적어도 우리 아래는 아닌 것 같지 않아?”
뒤에 있는 부하 기사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한스의 실력을 평가하기에 바빴다. 자존심 강한 기사들 대부분이 한스의 실력을 자신들보다 아래에 두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만큼 한스의 실력은 확실했다.
기사들의 대화 주제가 곧 바뀌었다.
“저 녀석, 분명히 백작가에서 나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냥 하인 아니었어?”
“백작 부인이 아끼시긴 했지만 딱 그 정도였지.”
“그런데 이 짧은 시간 내에 어떻게 저렇게 강해진 거야?”
마지막 말에는 부러움과 시기, 질투가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미헨은 충분히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왕국의 강철벽 스틸월 가문의 기사로서 하루하루 실력을 올리기 위해 강도 높은 수련을 계속하는 그들이다. 한데,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저 평범한 하인이었던 자가 감히 경시하지 못할 실력을 가지고 나타나다니. 솔직히 무슨 수를 쓴 건지 멱살을 잡고 흔들며 묻고 싶을 정도였다.
‘아니, 물을 필요는 없지.’
이유야 뻔하지 않던가.
“뭣들 하느냐.”
묵직한 음성이 들린다. 미헨은 급히 몸을 돌렸다. 백작이 천천히 연습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미헨과 기사들이 주군에 대한 예를 표했다. 백작이 손을 들어 올리자 기사들이 자세를 원래대로 돌렸다.
백작은 천천히 미헨의 옆에 섰다. 그리고 대련을 눈에 담았다. 백작이 온 것을 모르는지 아니면 신경을 쓰지 않는 건지 한스와 라라는 대련을 계속하고 있었다.
백작은 스틸월 영지의 사정상 당연히 수준 높은 무력을 가지고 있었다. 애초에 지크를 홀대한 대외적 명분이 후계자에 걸맞은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던가. 스틸월 백작이란 자리는 그런 자리였다.
때문에 백작 또한 두 사람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대단하군.”
“그렇습니다. 가능만 하다면 두 사람 다 강철검 기사단에 들이고 싶을 정도입니다.”
미헨의 시선이 한스에게 못 박혔다.
“그리고 한스는, 솔직히 잘만 가르친다면 제 후계자 자리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되고요.”
스틸월 영지의 최정예 기사단 강철검 기사단의 단장 후계자. 그 말은 함부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미헨 타이너라는 인물이 허튼소리를 입에 담을 자도 아니었다.
기사들이 술렁였다. 설마 미헨이 그 정도로까지 한스를 평가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백작은 입을 꾹 닫고 대련에 집중했다. 한스의 감탄이 나올 정도로 유려한 검술이 눈에 들어 왔다.
백작 부인이 아끼던 하인인 만큼 백작도 한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백작 부인의 비호 때문에 하인 중에서도 조금 건방진 끼가 있긴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그 외엔 평범한 하인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성장했는지….”
저도 모르게 한탄이 나왔다.
“재능이 아니겠습니까.”
미헨의 말에 백작의 후회가 더 커졌다. 만약 진작에 저 재능을 알아봤으면 당장 기사로서 교육에 들어갔을 것을.
“물론 재능만으로는 저렇게 되기 힘들겠지요. 아마 지크 도련님의 교육도 상당한 도움이….”
말을 하다 말고 미헨이 입을 다물었다. 슬쩍 백작의 눈치를 봤다. 아무래도 지크에 대한 화제는 백작 앞에서 선뜻 말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백작은 아무 대꾸도 없었다. 하지만 그리 심기가 편치 않다는 건 뻔했다. 뒤에서 조그맣게 의견을 주고받던 기사들도 눈치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난 이만 가겠네.”
“네! 살펴 가십시오!”
떠나는 백작의 등 뒤로 기사들이 예를 표했다.
“어쩌자고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백작이 완전히 떠나자 기사 한 명이 미헨에게 타박했다. 미헨도 할 말이 없었다.
“말이 헛 나왔어.”
하지만 그렇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고작 이 정도 말을 했다고 불이익을 줄 정도로 백작은 꽉 막힌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틀린 말도 아니고.’
지크 그리고 한스. 두 명의 재능이 너무도 아쉬웠다.
‘저 둘이 백작가에 남았다면 백작가는 더욱 더 강해졌을 것을….’
* * *
한편, 라일라와 스녹, 엘레나는 다른 연습장에 있었다.
“스녹, 준비해주렴.”
“네!”
스녹이 미리 준비해둔 돌들을 꺼냈다. 돌들은 대략 사람 머리만 한 크기였다. 백 수십여 개의 돌들이 스녹 아래 잔뜩 쌓였다.
라일라가 엘레나를 돌아봤다.
“준비는 됐니?”
“네!”
엘레나가 지팡이를 꽉 잡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스녹, 시작해!”
라일라의 말에 스녹이 능력을 사용했다. 그의 발치에 있던 돌덩이 하나가 둥실 떠오르더니 허공으로 휙 날아갔다. 동시에 엘레나의 지팡이에 마력이 응집됐다.
후웅!
지팡이 앞에 불덩어리 하나가 생성되더니 하늘로 쏘아졌다. 목표는 스녹이 날린 돌덩이였다.
콰앙!
불덩어리가 정확하게 돌에 명중했다. 하늘에 화려한 불꽃이 수놓였다.
라일라가 스녹을 향해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스녹이 이번엔 돌덩이 두 개를 날려 보냈다.
쾅! 쾅!
이번에도 엘레나의 마법이 정확히 돌덩이 두 개를 파괴했다.
엘레나에게 자신감이 붙었다. 계속해서 날아오는 돌덩이를 능숙하게 맞혔다. 하지만 돌덩이의 숫자가 불어나고 속도도 점점 더 빨라지자 놓치는 것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후웅!
“아!”
불덩이가 아깝게 돌덩이를 스치고 지나가자 엘레나가 안타까운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불덩이를 계속 쏘아댔다.
스녹의 아래에 깔린 많은 돌덩이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엘레나가 지팡이를 내렸다.
“훨씬 좋아졌구나.”
라일라의 칭찬에 엘레나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아직 멀었어.”
엘레나의 어깨가 축 쳐졌다. 라일라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변화하는 그녀의 행동이 퍽 재미있었다.
“스녹, 다음 걸 준비해주렴.”
“네!”
이번에 스녹이 꺼낸 건 미스릴 덩어리였다. 귀하기 짝이 없는 금속이지만 클로원의 유적을 탈탈 턴 지크 일행에겐 흔해빠진 금속이었다. 금속덩어리들이 스녹의 힘에 의해 커다란 덩어리로 뭉쳤다.
“엘레나.”
라일라의 명령에 엘레나가 미스릴 덩어리에 지팡이를 겨눴다.
콰아아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마법의 속도와 정확성이 중요하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지금 시전된 마법은 철저하게 위력에 치우쳐 있었다.
엘레나가 연속으로 마법을 쏘아보냈다.
그렇게 엘레나의 마법 연습은 계속됐다.
연습장에서 계속 화려한 불꽃이 폭발을 하니 당연히 이곳에도 구경꾼이 모여들었다. 한스와 라라가 대련을 하고 있는 곳보다 구경꾼은 더 많았다. 보기 힘든 마법사가 마법을 시연하는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굉장하군.’
트레얼은 꽤 초반부터 엘레나의 수련을 보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도 마법사의 마법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저 정도면 상당히 대단한 마법사가 아닌가.’
스틸월 백작가의 집사로서 마법사의 기본적인 정보는 알고 있었다. 방금 엘레나가 보여준 마법으로 정확하진 않더라도 그녀의 수준을 짐작해 볼 순 있었다.
그녀는 절대로 그저 그런 마법사가 아니었다.
‘한데, 그런 그녀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저 사람은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란 말인가.’
라일라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다. 왕도에서 일어난 사건 때, 지크의 일행으로 나타났다던 마법사가 그녀일 것이다.
과연 이야기대로 대단한 미녀였다. 그녀를 본 귀족들 몇이 상사병에 걸려 몸져누웠다는 소문이 절대로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다. 거기에 상당한 솜씨를 가진 엘레나를 가르치는 실력까지 갖추었다니.
‘저자의 실력도 대단하고.’
대지를 마음대로 다루는 스녹에 대해서도 얘기를 들었다. 그도 왕도에서 상당한 활약을 했다고 했었다.
‘파티원 한 명 한 명이 정말로 대단한 사람뿐이야.’
그리고 그 파티원들 모두를 지크가 철저하게 휘어잡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트레얼은 정말로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사람의 위에 서야 하는 귀족으로서 가장 필요한 능력이었다.
‘정말로 아쉬워.’
무력도 머리도 뛰어난 데다가, 저런 인재들을 완전히 휘어잡고 있는 카리스마까지.
물론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도 고작 다섯 명이다. 부려야 할 사람의 숫자가 많아진다면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예 능력을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분명 낫다.
“자네, 여기 있었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인지는 확인할 필요도 없다. 트레얼은 몸을 돌려 예를 표했다.
“오셨습니까, 백작님.”
“음.”
백작이 옆에 서자 트레얼도 자세를 바로 했다. 둘은 나란히 서 마법 수련을 구경했다.
엘레나의 마법을 지켜만 보던 라일라가 지팡이를 쥐었다. 시범을 보이려는 것이었다.
화르르르르르륵!
거대한 불기둥이 연습장에서 하늘을 찢을 듯 날아올랐다. 무척이나 엄청나고 장엄한 광경. 여기저기에서 경탄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부분이 그저 시각적인 효과만을 보고 감탄을 터뜨리는 자들이다. 온갖 생각을 머릿속으로 굴리던 트레얼도 이번엔 이쪽에 속했다.
하지만 백작을 포함한 실력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불꽃이 아니라 그 불꽃을 만든 라일라를 쳐다봤다.
‘엄청난 마력!’
조금 전까지 본 마법과 지금의 마법은 완전히 궤를 달리한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똑똑히 느껴졌다.
“저 분들, 어떻게 백작가에 모시지 못할까요?”
트레얼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백작으로선 두 번째로 듣는 말이었다.
조금 전 미헨이 한스와 라라를 백작가로 데리고 오지 못할까 말하던 걸 듣지 않았던가.
백작의 내심도 그들과 같았다. 그들 정도의 인재라면 어떤 조건을 걸어서라도 백작가에 끌어들이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생각도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대단한 인재들을 모으고 선도하는 것이 바로 그가 무시하고 쫓아낸 큰 아들인 것이다.
“지크 님이 오셨군요.”
트레얼의 말대로 지크가 연습장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마법의 연습이 중단됐다. 세 사람이 지크에게 다가가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정말로 친해 보이는군요.”
백작은 트레얼의 말 속에서 미약한 아쉬움을 느꼈다.
지크가 만약 아직까지 후계자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면, 지크의 동료들도 자연스럽게 백작가로 끌어들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품고 있는 게 분명했다.
백작은 대꾸하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