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8화
콰앙!
마력을 담은 검끼리 부딪친다. 굉음이 대련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지크의 검이 여느 때처럼 폭풍같이 쏟아진다. 그레이그는 이를 악물고 검을 놀렸다.
쾅! 쾅! 쾅!
몇 번의 공격을 간신히 쳐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크의 공격 중 일부에 불과했다. 나머지 공격은 그대로 그레이그의 몸에 떨어졌다.
서걱! 서걱! 서걱!
자신의 몸이 베이는 소리가 그레이그의 귀에 그대로 들어 왔다. 뒤이어 느껴지는 후끈한 통증은 덤이었다. 붉은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모습이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하지만 그레이그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지크의 공격이 끊긴 그 찰나의 순간에 자신의 몸을 확인했다.
‘아직 움직일 수 있어!’
이런 고통은 이미 몇 번이나 겪었다. 이제는 고통만으로 상처가 어떤지, 몸을 더 움직일 수 있는지 없는지도 어렴풋이 알 수 있게 됐다.
비틀!
하지만 그레이그의 생각이 틀렸던 것일까. 그레이그의 다리에 힘이 풀리며 자세가 무너졌다.
후웅!
그 빈틈을 지크의 검이 매섭게 노렸다.
그때, 그레이그의 눈이 빛났다.
휘익!
언제 힘이 풀렸나 싶을 정도로 굳건하게 다리에 힘을 주더니 검을 휘둘렀다. 내포된 검의 위력이 절대 중심이 흔들려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속임수였다.
‘이대로 한 대만!’
하지만 그레이그의 희망은 빗나갔다.
스윽!
지크가 무척이나 손쉽게 상체를 틀었다. 그레이그의 검이 허무하게 빗나갔다. 동시에 허벅지에서 올라오는 타는 듯한 통증.
“끄윽!”
이번엔 정말로 힘이 빠져 주저 앉아버렸다. 그레이그는 서둘러 허벅지를 봤다. 그의 허벅지에 구멍 하나가 뻥 뚫려 있었다. 지크의 검에 꿰뚫린 것이다.
“속임수를 쓴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상대가 그 속임수를 알아채고 역으로 속일 것까지 계산을 해야지.”
옆에서 지크가 낄낄거리며 조언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훈수를 뒀다. 그레이그가 이를 악물며 일어서려고 했다. 하지만 허벅지의 상처가 너무 커 제대로 서지 못했다.
지크가 신관에게 눈짓을 했다. 신관이 다가와 그레이그에게 성법을 사용했다. 피를 꿀렁꿀렁 내뱉던 커다란 상처부터 작은 상처까지 순식간에 치유가 됐다.
“매번 신세를 집니다.”
요 근래 계속 그들을 부려먹었던 터라 지크가 간단히 감사의 말을 건넸다. 신관이 가볍게 웃었다.
“명예 성기사께서 교단을 도와주신 것에 비한다면 이 정도는 일도 아니죠. 무엇보다 저는 경력도 있지 않습니까.”
그 신관은 예전, 지크가 백작가를 나갈 당시 혈투를 벌였을 때 지크를 치료해준 자였다.
“예전 지크 님께서 그 몸으로 싸운다고 하셨을 때는 정말로 기겁을 했었는데 말이죠.”
그레이그의 치료를 끝낸 신관이 일어섰다.
“자, 끝났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셔도 됩니다. 이만 끝낼 생각이거든요.”
“뭐? 벌써?”
그레이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가 하늘을 봤다. 해는 아직 한가운데 떠 있었다. 보통은 한참은 더 이 치료란 이름의 무식한 대련을 했는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던가.
“뭐야, 설마 너 더 베이고 싶은 거냐? 계속 당하기만 하더니 혹시 그 쪽 취향에 눈을 뜬 거야? 아무리 내가 네 심리 치료를 하고 있긴 하다만 그것까지는 어떻게 하지 못하는데?”
“그럴 리가 있냐!”
그레이그가 빽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지크의 의심의 눈은 풀리지 않았다. 신관도 은근슬쩍 그레이그와 거리를 뒀다.
그레이그는 씩씩대며 지크를 노려보더니 곧 저택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크는 낄낄대며 바라봤다.
“그럼 말씀대로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신관도 떠났다.
구경을 하던 구경꾼들도 그레이그가 저택으로 들어가자 전부 사라진 상황. 그레이그가 흘린 피가 아직 흥건한 대련장엔 지크 그리고 구경꾼 중 유일하게 아직 남아 있던 라일라만이 남았다.
그녀가 지크에게 다가왔다.
“오늘은 일찍 끝났네?”
“이젠 슬슬 필요 없거든. 오히려 지금까지는 그레이그를 괴롭히는 게 즐거워서 조금 오래 끌었을 뿐이야. 그런데 그것도 이제 지겨워지고 있어.”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라고 생각을 하고는 있었지만 직접 전해 듣자 한숨이 나왔다.
“그럼 네 그 자칭 치료는 끝난 거야?”
“아니, 아직.”
지크는 그레이그가 사라진 곳을 쳐다봤다.
“지금 건 혈전에 익숙해진 것에 불과해. 일단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치료가 되긴 했지. 혈전에 대한 트라우마가 거의 사라졌으니까. 완전히 망가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버티긴 버텼네, 저 녀석.”
“트라우마가 사라졌다면 치료가 끝난 거 아냐?”
“심각한 게 아직 남았어. 솔직히 그거에 비하면 혈전의 트라우마는 별거 아니지.”
“그게 뭔데?”
“얕보던 나에게 온갖 망신을 당했다는 것. 솔직히 이유는 그게 제일 클걸? 쪽팔림도 쪽팔림이고 나와 비교를 하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위축도 됐을 거야. 자연히 자신감도 박살 났을 테고.”
애초에 지크가 노린 것이 그것이었지 않은가. 그리고 돌아와 보니 그 계획은 무척이나 잘 통해서 그레이그를 아주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그건 어떻게 해결할 건데?”
“아주 간단해. 녀석에게 사실을 인식시켜 주면 돼.”
“무슨 사실?”
지크는 어깨를 폈다. 그리고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이야기한다는 듯 목에 힘을 줘 말했다.
“이 형님께서는 애초부터 녀석과는 하늘과 땅 차이, 비교를 하는 것조차 비웃음당할 정도로 차원이 다른 존재라는 사실. 그렇다면 나보다 뒤떨어지는 것이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지. 그건 자연의 이치만큼이나 당연한 사실이니까. 뭐, 겸사겸사 녀석에게 자신감도 심어주고.”
“…….”
새삼 느끼지만 정말로 엄청난 자신감이다. 하지만 저 말이 어찌 보면 틀린 점이 없단 것이 더더욱 경악스러운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래서 그 엄청난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서 뭘 할 건데? 당연히 생각은 해 뒀지?”
“응? 별로 생각 안 해뒀는데?”
“뭐?”
“몬스터 토벌이라도 데리고 다닐까 생각중이긴 하지만, 자세한 건 지금부터 생각해야지.”
“그런 중요한 걸 지금부터 생각하면 어떡해!”
라일라가 언성을 높였지만 지크는 태연했다.
“어차피 내가 그 녀석에게 붙어만 있으면 돼. 이 압도적인 재능을 옆에서 쭉 본다면 아무리 녀석이라도 절로 존경심이 들지 않겠냐?”
“으이구, 이 화상아!”
라일라는 결국 지크의 등짝에 손바닥을 날렸다.
* * *
백작가에 돌아온 뒤로 한스는 이곳저곳에 인사를 하러 다녔다. 지크와는 달리 한스는 백작가에 악감정 따위는 없고 백작가에서도 한스를 무척이나 반겼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한스를 가장 반긴 것은 역시 백작 부인이었다. 마치 잃어버린 자식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한스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녀에게 유모란 존재는 무척이나 특별한 존재였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를 돌봐준 것은 물론, 처음 백작가에 후처로 들어와 한창 사라에게 괴롭힘을 받고 있을 때 그녀를 버틸 수 있게 해준 지지대였던 것이다.
당연히 유모의 손자인 한스가 무척이나 애틋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유모는 노환으로, 그녀의 아들과 며느리, 한스에게는 부모 되는 사람들은 병으로 세상을 떠난 터라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스를 자신의 곁에서 편하게 머무르게 하고 싶은 백작 부인이었지만 한스는 그 호의를 거부했다. 그에게 있어 지금의 자신은 지크의 종이자 제자였던 것이다.
백작가에 도착한 후 며칠 동안 푹 쉬었다. 한스에게는 고향이자 집으로 돌아온 것이라 심리적으로 더 편하기도 했다. 그저 몸이 굳지 않을 정도의 수련만 하고 고향에 돌아온 편안함을 마음껏 누렸다.
하지만 충분히 쉬었다 생각한 한스는 다시 검을 잡았다.
훙! 훙!
한스의 검이 매섭게 휘둘러진다. 손에 들린 건 기초 수련용으로 따로 만든 검. 온몸에 신경을 곤두세운 채 한 번 한 번을 신중하게 검을 내려친다. 연습 때 올바른 자세를 몸에 때려 박아 넣어놔야 한다. 그래야 어떤 예상치 못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생각하는 것보다 빨리 몸이 반응할 것이다. 안정적이고 위력적이게.
“벌써 나와 계셨네요.”
목소리가 들려오자 한스가 자세를 풀었다. 라라가 연습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라라 씨도 훈련을 하시려는 겁니까?”
“네. 이제는 검을 휘두른다고 눈치 주는 사람도 없겠다, 만족할 때까지 휘둘러야죠.”
그리고 라라는 허리춤에 매어둔 검을 뽑아들었다.
몇 번 검을 휘두른 그녀가 주변을 둘러봤다.
“정말 좋은 연습장이에요.”
“스틸월 백작가는 왕국에서도 알아주는 기사 가문이죠. 이곳은 그 스틸월 백작가의 연습장 중에서도 좋은 곳입니다. 백작님의 가족분들이나 기사단의 높으신 분들만 이용할 수 있는 곳이죠.”
그리고 지크가 백작에게 이용권을 받아낸 곳이기도 했다.
“자세히 아시는군요.”
“예전엔 이곳을 쓸고 닦은 적도 꽤 많았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여기 백작가의 하인이라고 했었지.’
하지만 그의 신분 따위 이제는 별 상관이 없다. 아무리 신분에 극렬한 집착을 갖고 아랫사람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머리에 쥐꼬리만큼의 상식을 갖추고 있다면 한스 정도의 실력자를 신분 하나 때문에 홀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얘기를 들어보면 이제는 하인도 아니라고 하지 않던가. 한스의 반응을 본다면 딱히 자신의 과거 신분에 신경을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라라도 한스 정도의 실력자를 과거에 하인이었다는 사실만으로 평가를 뒤집을 사람도 아니었다.
즉, 한스의 과거 따위는 그들에게 그 어떤 의미도 갖지 못했다.
“대련이라도 한번 할까요?”
“그래 주신다면야 저야 고맙죠.”
라라가 반색했다. 수준 높은 사람과의 대련은 배우는 것이 많다. 라라로서는 한스 정도의 실력자와 하는 대련은 언제든 환영이었다.
한스가 수련용 검 대신 일반 검을 꺼냈다. 둘이 살짝 거리를 두고 검을 든 채 마주섰다.
“먼저 오세요.”
“거절하지 않을게요.”
라라가 한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쾅! 쾅! 쾅!
제법 마력까지 넣어 맞붙는 터라 연습장에 굉음이 울려 퍼졌다. 상당히 멀리까지 퍼져나간 굉음에 사람들이 호기심을 안고 슬금슬금 연습장 주위에 몰려들었다.
물론 연습장 자체가 일부 사람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곳이라 그 수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 면면만은 스틸월 영지에서도 내로라하는 자들이었다.
“음….”
반백의 머리와 수염을 가진 기사 한 명이 둘의 대련을 유심히 쳐다봤다. 스틸월 백작가 최고, 최강의 기사라 칭해지는 자. 강철검 기사단의 단장인 미헨 타이너였다. 볼일이 있어 근방을 지나가던 그가 수련장에서 터지는 굉음에 호기심을 가지고 찾아온 것이 조금 전이었다. 그리고 한스와 라라의 대련을, 그는 말없이 쭈욱 지켜봤다.
“…한스라고 했었지?”
미헨이 입을 열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예전에 백작 부인을 모시던 하인으로, 백작 부인을 돌본 유모의 손자라고 합니다.”
미헨도 기억에 있는 자였다. 백작가에 있는 하인들을 전부 아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한스는 그럭저럭 유명했다. 백작 부인이 아끼는 하인이었으니까.
아니, 그런 연유가 아니더라도 애초에 지크가 백작가를 뛰쳐나가기 전, 한스를 데려간 걸 미헨도 직접 봤다.
그때는 별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백작 부인이 아낀다고 해도 하인은 하인. 그저 눈물, 콧물 흘리며 지크에게 질질 끌려가는 모습에 혀를 찬 것이 전부였다. 게다가 당시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지크의 활약에 신경이 전부 쏠려 있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만난 한스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검을 놀리는 것도 예사롭지 않으며 뿜어지는 마력도 육중하다. 실력을 전부 파악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기사단에 꿀리지 않을 거라는 건 확실하다.
백작가를 떠난 후부터 검을 배웠을 터. 한스의 나이와 검을 배운 시기를 생각하면 저 실력은 놀랍다 못 해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