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7화
지크는 백작의 부름을 받고 백작의 방으로 가는 중이었다. 이유까지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지금 부를 용건이야 뻔하다.
그레이그에 관한 일.
표독하게 지크를 노려보던 백작 부인이 백작을 닦달했을 거라는 게 너무도 빤히 보였다.
하지만 그에 겁 따위 먹을 리 없는 지크다. 그의 발걸음은 정말로 걱정이라곤 1도 없어 보였다.
지크는 백작의 방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선객이 있었다.
백작의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백작 부인. 그녀는 지크가 들어오자마자 험악한 눈초리를 날렸다. 하지만 지크는 오히려 웃어줬다.
여기서는 이런 반응이 더 상대를 약 오르게 만든다. 예상대로 백작 부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크는 백작의 앞으로 가 고개를 까딱였다. 백작에게 하는 예라고는 무척이나 부족하지만 이제 와 그런 걸 입에 담는 사람은 없었다.
“불렀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왜 불렀는지는 알고 있느냐?”
“생각나는 건 하나밖에 없죠. 그레이그에 관한 일 아닙니까?”
“당연한 것 아니냐!”
대답은 백작이 아닌 백작 부인에게서 나왔다.
“백작가의 후계자를 그런 식으로 학대하다니! 그것도 백작가 안에서! 설마 고이 넘어 갈 거라고 생각한 게냐!”
“학대라뇨. 백작 부인께서 뭔가 커다란 오해를 하고 있으시군요. 그건 치료입니다.”
“치료? 어디에 그딴 치료가 있단 말이냐!”
“무척이나 전문적인 치료법이라 백작 부인께서는 잘 모르실 겁니다. 하지만 원래 약은 쓴 것이 효과가 좋은 법입니다. 그리고 독한 약일수록 그 부작용도 강하죠. 지금 하는 치료도 그와 비슷한 겁니다.”
“뚫린 입이라고 잘도…! 당장 멈춰! 얻다 대고 그딴 짓거리를 치료라고 하고 있는 게야!”
“싫습니다.”
“뭐…?”
지크는 백작 부인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백작을 불만스럽게 쳐다봤다.
“이건 약속이 좀 다르지 않습니까, 백작님. 제가 녀석에게 어떤 치료를 하든 절대로 상관하지 말라고 부탁드렸을 텐데요. 특히 백작 부인은 제가 따로 언급까지 해가며 잘 말려달라고도 했습니다. 그걸 전부 무시하시다니. 솔직히 불쾌합니다.”
“…정말로 그게 효과가 있을 거라고 보느냐.”
백작의 어투도 과히 좋아 보이진 않았다. 하나 약속한 게 있어서일까. 그는 분명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여타의 설명은 없이 지크는 그저 한 마디만으로 긍정했다. 백작이 머리를 짚었고 백작 부인이 발작했다.
그러나 지크는 두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이건 관심이 없었다.
“용건이 그게 끝이라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더 이상은 시간 낭비 같군요.”
그리고 지크는 등을 돌렸다.
“기다리지 못해! 말 안 끝났다!”
“끝났습니다, 백작 부인. 백작님이 약속을 하신 이상 지금 이야기는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꼭 제가 치료를 중단하길 원하신다면 백작님께서 약속을 취소하도록 하시죠. 아, 아니면 백작님이 직접 하시겠습니까?”
“백작님이 어찌 아들을 그렇게 대하실 수 있단 말이냐!”
“그럼 이야기는 끝났군요.”
그리고 지크는 문을 열고 방을 나갔다. 방문을 닫기 전 보인 광경은 백작 부인이 백작의 팔을 잡고 애원하는 모습이었다. 백작도 무척이나 고뇌하는 표정. 하지만 끝끝내 그가 지크를 부르는 일은 없었다.
그건 곧 암묵적인 허락.
‘계속 굴릴 수 있겠군.’
지크는 흐뭇하게 웃었다.
* * *
오늘도 지크의 자칭 ‘그레이그 심리 치료’는 계속되고 있었다. 지크의 검이 그레이그의 검을 때리자 그레이그가 주춤주춤 물러섰다.
검을 놓치진 않았지만 위력 때문에 그레이그의 검이 옆으로 크게 튕겼다.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퍽!
복부에 지크의 발차기가 먹혔다.
우당탕!
그레이그는 대련장을 굴렀다. 그가 대련장을 구른 건 이미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제는 거의 하루의 절반은 누워서 보내는 것 같을 정도였다.
“일어나, 이 자식아!”
지크가 그레이그를 재촉한다. 그레이그가 비척비척 일어섰다. 꼴에 무가의 자식이라고 그렇게 맞고 베이는데도 무기를 놓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크는 불만족스러웠다.
‘이 짓도 슬슬 질리는데.’
남 괴롭히는 것만큼은 질리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지크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팔딱거리는 반응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레이그는 지크가 원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평소라면 여기서 상대의 다른 약점을 찔러서 강제로 반항하게 만들지만, 일단 상대를 치료하고 있는 중인지라 적을 상대할 때 같은 방식은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일단 혈전에는 익숙해졌어.’
고작 대련 좀 심하게 했다고 전쟁터 같은 데에서 눈부신 활약을 할 순 없을 테지만 적어도 자기가 좀 심하게 상처를 입었다고 해서 냉정을 잃고 당황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고작 그런 걸로 치료가 끝난 것은 아니다.
‘날 이길 리는 없지만, 적어도 이빨 정도는 드러내보게 만들어야지.’
지금 그레이그는 완전히 주눅이 들어 지크의 공격을 막는 데만 급급하고 있다. 이걸 혈전에 익숙해졌다고 할 수는 없다.
혈전에서 받은 충격을 완전히 날려 버리려면, 여기서 자기 피를 보더라도 미친개처럼 달라붙어야 한다.
‘죽을 걱정도 없고 부상을 입어도 바로 회복을 할 수 있어. 이런 기회는 좀처럼 없지. 하여간 저 녀석은 정말로 운이 좋은 녀석이라니까.’
자신 같은 위대한 인물을 형으로 뒀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 세상의 최대 행운을 누리는 놈이다.
물론 만약 그레이그가 들었다면 바로 악을 쓰면서 달려들 생각이었지만.
쾅!
다시 한번 지크의 검이 그레이그의 검을 때린다. 그레이그의 몸이 크게 흐트러졌다. 하지만 꿋꿋이 자세를 바로 잡았다.
지크가 살짝 빈틈을 보였다. 그레이그가 움찔했다. 하지만 빈틈을 파고들지는 않았다. 지크가 일부러 빈틈을 보여준 걸 깨달은 건 아니다. 그저 지크를 공격하는 것에 겁을 먹고 있는 것뿐이다.
지크가 입꼬리를 들어 오렸다.
‘역시 조금 더 독한 약을 써야겠어.’
“뭐냐, 너. 할 생각은 있는 거냐?”
지크가 검을 어깨에 걸쳤다.
“네 이빨이 나한테 닿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만, 그렇다고 설마 이빨을 드러내는 법마저 까먹은 건 아니겠지?”
그레이그에게서 답은 없었다. 그저 빨리 이 지옥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이미 지크의 도발에도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는 그레이그도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쯧쯧! 그렇게 해서 내 형제라고 어디 가서 말할 수 있겠냐? 아, 하긴. 배다른 형제니까 어쩔 수 없나. 물려받은 피가 반은 다르니까.”
그레이그가 지크를 쳐다봤다.
“아버지는 한 사람. 하지만 두 형제 사이에 이토록 차이가 난다면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지 않겠어?”
“…닥쳐.”
“어라? 말을 할 수 있네? 난 갑자기 네가 말을 하는 법을 잊어버린 줄 알았지 뭐냐. 음, 그래도 닥치진 못 하겠다. 내가 틀린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닌 것 같거든. 뭐, 내 어머니 성격이 진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럽긴 했어도 네 어머니보다는 확실히 능력은 있었던 모양이야. 자식들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걸 보면 확실….”
“닥치라고오오!”
콰앙!
그레이그의 검이 지크의 검과 부딪쳤다. 마력이 줄기줄기 뿜어지는 그레이그의 검. 그의 눈에 핏발이 섰다.
“하하핫! 뭐야! 엄마가 욕먹는 꼴을 보기 싫어?”
“닥쳐! 닥쳐! 닥쳐!”
콰앙! 콰앙! 콰앙!
그레이그가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검술을 사용하는 게 아닌, 그저 분노에 몸을 맡겨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기세 때문에 일격 일격이 묵직하기 그지없다. 스틸월 백작가의 체계적인 훈련 덕에 분노에 휩싸인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자세가 그리 흐트러지지 않은 것도 요인이었다.
“네 어머니가 무슨 짓을 했는 줄 알아! 내 어머니한테! 나한테!”
그때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지옥이었다. 백작이 최대한 보호를 해줬지만 사라 스틸월의 음습함은 정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언제나 수심에 가득 찬 모습으로 자신을 안고 우는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선했다. 당시는 몹시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마 평생 잊히지 않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유모가 읽어준 이야기 속에 나오는 마왕의 모습을 그녀로 상상했을까.
보통 그 정도로 미워했으면 독살이라도 시도할 만하건만, 사라 스틸월은 그들 모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는 철저하게 지양했다. 백작의 눈치를 보거나 죽이는 건 너무 심하다 생각한 게 절대 아니다.
평생을 살려서 곁에서 괴롭히기 위함이었다.
퍼억!
지크의 주먹이 그레이그의 얼굴에 꽂혔다. 그레이그가 다시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는 벌떡 일어나 다시 지크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얼굴에 독기가 흘렀다.
“그걸 지금 나보고 알아주라는 거냐? 처음으로 형님한테 고민을 토로하는 동생의 슬픔을 귀담아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다만, 그래도 사실은 사실이지. 너와 나의 차이가 결과를 말해주고 있잖아. 이 형님은 거짓말을 하면 혀에서 가시가 돋아버려 네가 듣기 좋은 말을 해 줄 수가 없어!”
“닥치라고!”
콰아앙!
다시 한번 둘의 검이 부딪쳤다.
대련 이후 처음으로 싸움다운 싸움이 이어진다. 당연히 지크가 압도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레이그는 포기하지 않고 덤벼들었다. 아니, 그건 포기하지 않았다기보다 눈이 뒤집혔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콰직!
지크의 검이 그레이그의 팔에 파고들었다. 원래라면 여기서 비명을 지르며 물러날 그레이그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후웅!
자신의 팔뚝은 보지도 않은 채 다른 손으로 검을 휘둘렀다.
‘나한테서 배웠군. 이 녀석도 재능은 있다니까.’
퍼엉!
지크가 그레이그의 검면을 쳐 튕겨낸다. 하지만 그레이그는 이를 악물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팔의 상처가 커졌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지크는 무척이나 흡족했다. 드디어 자신이 원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 이래야 치료에 효과가 있지!’
그리고 그레이그를 후려 패는 감촉도 더 좋아지고 말이다.
‘어머니! 감사!’
그리고 지크는 다시 본격적으로 대련에 임하기 시작했다.
* * *
지크와 그레이그가 대련을 시작한 이후, 대련장 주변은 꼭 몇몇의 구경꾼이 상주하고 있었다. 오늘은 지크 일행도 그에 포함되어 있었다.
라일라가 옆에 있는 한스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크의 어머니, 그렇게 대단하셨니?”
한스는 생각에 잠겼다. 사라 스틸월에 대한 사실을 말한다는 건 곧 그녀를 욕한다는 것과 같다. 때문에 자신이 그녀에 대해 말을 했을 때 과연 지크가 자신을 가만히 둘 것인가를 생각해야 했다.
‘상관없나?’
종종 하는 말을 들어보면 지크도 딱히 그녀에게 정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그녀를 비판하는 말도 종종 하지 않았던가.
“일화를 하나 설명해 드리자면요. 어렸을 때 제가 밥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오셔서는 먹던 빵을 뺏어서 신발로 짓이기셨어요. 그리고 그걸 다른 음식이 있는 접시 위에 고이 두고 가셨죠.”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이 입을 벌렸다.
“그런데 제가 기억에 남는 건 괴롭힘 자체가 아닌 마님의 표정이었어요. 보통 사람을 괴롭힐 때 비웃음이라든가 분노라든가 그런 표정이 보이잖아요? 하지만 마님의 얼굴엔 아무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어요. 그저 길을 가다 돌멩이를 살짝 건든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때 확실히 알았죠. 마님은 엄청나게 무서운 분이시라는 걸.”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