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5화
“그딴 예절 따위는 어디서 배워 먹은 게야!”
당연히 백작은 언짢은 심사를 그대로 표현했다. 스틸월 영지의 사람이라면 누구든 두려워할 백작의 노여움이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자는 이 영지에서 거의 유일하게 백작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였다.
“일단 이곳에서 배운 예절은 아닙니다.”
“당연하지! 그딴 되먹잖은 예절을 우리 집안에서 가르칠 리가 있겠느냐!”
“그렇긴 하죠. 되먹잖은 예절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 이곳에서 배운 적은 없죠. 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요.”
백작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
예전 웨스틸버드에서 지크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백작가에서 배운 게 무례 같은 것밖에 없다고 빈정거리던 모습.
“지금 나랑 말장난을 하자는 게냐!”
“그런 생각 따위는 전혀 없습니다. 혹 백작님께서 원하시더라도 거절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좀 바빠서 말이죠.”
그러며 지크는 어깨까지 으쓱였다.
백작의 얼굴이 시뻘게지기 시작하자 옆에서 사태를 보고 있던, 집사인 트레얼이 급히 중재를 했다.
“백작님, 일단 진정하십시오.”
먼저 폭발하기 직전의 백작을 말린 트레얼이 이번엔 지크를 돌아봤다.
“그리고 당신은 백작님을 그만 도발하시오. 아무리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라도 그 이상의 도발은 용납지 않소. 사적인 관계를 믿고 그러는 거라면 더더욱! 당신은 스틸월의 이름을 포기했으니까.”
다른 이들이 도련님이라고 호칭하는 것과 달리 트레얼은 철저하게 지크를 타인으로 대했다. 사실 트레얼의 대우가 옳았다. 지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들이 도련님이라 부르는 걸 백작이 묵인해주고 있는 것일 뿐. 하지만 그것도 곧 백작의 의지하에 바로잡힐 일이었다.
행동만 보면 트레얼은 다른 이들과 달리 지크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은 것 같다.
하나, 사실은 정반대였다. 그만큼 지크를 차기 백작으로 삼고 싶어 하는 사람은 백작가에 많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마력을 개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레이그를 꺾은 지크의 무력과 정신력을 높게 평가했다면, 트레얼은 상황을 몰아가는 지크의 계략에 더욱 주목했다.
때문에 지크가 돌아왔다는 걸 들었을 때, 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불안정한 후계자보다는 성격이 거칠어도 무력과 계략 모두가 수준급인 자가 후계자에 더 어울리지.’
거기다 장자이기도 하다.
물론 후계를 포기했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기엔 예전에 보여줬던 지크의 카리스마가 너무도 눈에 밟혔다. 게다가 트레얼은 원래부터 지크를 차별하지 않은 소수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럼에도 이번엔 백작의 편을 들어야 했다. 지크는 무례했고 그는 백작가의 가신이었으니까.
물론 더 기다리다 두 사람의 관계가 정말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탄해 버릴까 부랴부랴 끼어든 감도 있었다.
“조심하죠.”
지크가 한 발 물러섰다. 애초에 본능적으로 거친 말이 나왔을 뿐, 그도 처음부터 백작을 도발할 마음은 없었다. 게다가 트레얼은 백작가에서도 몇 없는, 악감정이 없는 자였다.
지크와 백작의 다툼이 일단 멎었다. 하지만 냉랭한 분위기만은 그대로였다.
“여긴 어쩐 일로 온 게냐. 분명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나간 녀석이.”
백작의 어투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하지만 그건 방금 전의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을 때와 비교해서 그런 것이지, 지금도 충분히 차가웠다.
“그랬었죠. 백작님께서 한 번만 더 눈에 띄면 두 동강을 낼 거라는 말도 하셨었고요.”
백작의 볼이 씰룩였다. 하지만 당장에 두 동강 내겠다고 검을 들고 날뛰진 않았다. 옆에서 트레얼이 안도했다.
“당연히 그냥 돌아온 건 아닙니다. 용건이 있어서 돌아온 거죠.”
“용건?”
“백작가의 저택에 볼일이 있어서 말이죠. 가능하다면 출입증 좀 주셨으면 합니다. 아, 저택을 좀 손상시킬 수도 있으니 그에 대한 허가도 겸해서 말이죠.”
콰앙!
백작이 의자의 팔걸이를 내리쳤다.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진 팔걸이가 너무도 손쉽게 부러져 나갔다.
주변에 있던 가신들의 눈길이 싸늘해졌다. 트레얼도 눈살을 찌푸렸다.
예전 지크가 당한 괴롭힘과 여러 가지 사정이 겹쳐 백작에 대한 지크의 도발을 어느 정도 넘어가주던 그들이었지만 지크의 계속된 도발은 분명 도를 넘은 것이었다.
특히 대대로 이어져 온 백작의 저택을 손상시키겠다니.
“살짝 오해를 하신 모양이군요. 적어도 지금 말은 모욕을 할 의도가 아니었습니다만.”
“그딴 헛소리를 내가 받아들일 성 싶더냐! 그게 모욕이 아니면 뭐라는 게야!”
백작의 살벌한 기세를 보면 절대로 허락을 해주지 않을 모양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다.
“그레이그 녀석과 만난 건 알고 계시죠. 그 녀석, 상태가 많이 안 좋더군요.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는 백작가의 후계자라니. 백작가를 떠난 저도 절로 걱정이 들더군요.”
“뻔뻔하게 잘도 그딴 말을…!”
그레이그를 저렇게 만든 원흉이 저딴 말을 지껄이다니. 당장 검을 잡아 예전에 말한 대로 저 녀석을 두 동강 내야 하지 않을까 백작이 생각할 때였다.
“그 녀석을 고쳐 드리죠.”
“…뭐?”
“그레이그 녀석을 예전의 모습으로 회복시켜 드린다고 했습니다.”
백작은 얼이 빠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다.
“백작가의 모든 이들이 나서도 해내지 못했던 걸 네가 해내겠다고?”
“제가 좀 잘나서 말이죠.”
지크가 턱을 치켜드는 모습을 백작은 아니꼽게 쳐다봤다.
“네 놈의 뭘 믿고?”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 그리고 여기 크로뇽 왕국의 루즈 후작가와 윈플 후작가에 얽힌 음모를 밝힌 자. 당장 백작님에게 내밀 수 있는 건 이 두 가지겠군요.”
트레얼은 아쉬움을 느꼈다. 왕국의 수도 웨스틸버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대강 들었다. 때문에 지크가 후계자 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었다. 왕자와 왕세자에게도 좋은 이미지를 심었을 테니, 지크가 백작이 된다면 상당한 도움도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지금 백작가로서는 별다른 해결책은 없지 않습니까? 이 상태로 그레이그를 두고 보겠다면야 생각을 달리 하겠습니다만.”
“…….”
꼴 보기 싫은 아들놈이지만 분명 능력이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무엇보다 백작도 그레이그를 이렇게 둘 수만은 없었다.
“…정말로 치료할 순 있고?”
“원래 치료 가능성을 확신하는 자는 없죠. 다만 가능성이 높은 건 확실합니다.”
“원하는 건 뭐냐.”
지크가 손가락 두 개를 폈다.
“하나는 제가 녀석에게 어떤 치료를 하건 절대로 상관하지 말 것. 특히 백작 부인은 잘 좀 말려주시죠. 아마 무척이나 기겁을 하실 테니까요.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아까 말씀 드린 겁니다. 저택 출입증과 저택을 훼손할 권리 말이죠.”
첫 번째는 찝찝하긴 하지만 충분히 이해가 가는 조건이다. 하지만 두 번째 조건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이 저택에서 뭘 하려고 그런 조건을 내거는 것이냐.”
“찾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곳에 보물이라도 묻혀 있단 게냐?”
“글쎄요. 저도 찾아봐야 아는 일이라서 말입니다.”
“만약 거부한다면?”
지크는 싱긋 웃었다.
“제가 가진 모든 인맥을 총동원해서 백작가를 압박, 두 번째 조건을 성사시킬 겁니다.”
“…네 놈이 지금 날 협박하는 게냐!”
여태껏 그 어떤 압력에도 끄떡도 하지 않고 묵묵히 영지를 지켜온 백작에게 지크의 저 말은 지금까지 들은 최고의 도발이었다. 그건 다른 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기사들은 모욕감에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지크도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껏 도발을 할 때 짓던 비웃음을 지우고 정색을 했다.
“그만큼 이 일이 단순하게 백작가를 욕보이게 하려는 행위가 아니라는 걸 알려드리는 겁니다. 제게는 엄청 중요한 일이죠. 그러니 서로 좋게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백작님은 그레이그를 치료하고, 저는 제 목적을 이루고 말입니다.”
백작은 여전히 성난 눈길로 지크를 노려봤다. 하지만 당장 지크를 끌어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걸 봐서는 꽤나 고민하는 눈치였다.
“…좋다. 어디 한번 해 봐라. 그레이그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을 때, 네가 원하는 걸 들어 주마.”
“좋은 판단이십니다.”
지크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면 이만 물러가죠.”
볼일은 끝났다. 더 이상 백작을 대면할 이유가 없었다.
“…정말로 백작의 후계자 자리엔 관심이 없는 모양이군.”
지크가 돌아왔다고 했을 때 백작에게 가장 먼저 생각난 건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지크는 후계자 자리와 관련된 말은 일절 하지 않았다.
“당연하죠. 저에게 스틸월은 너무 작습니다.”
“하! 크로뇽 왕국의 강철벽조차 네놈을 품을 수 없다고? 그럼 네놈은 어느 정도 자리가 되어야 네 그릇에 맞다고 생각하느냐. 왕이라도 돼야 하더냐?”
민감한 말이기에 주변 가신들이 움찔했다. 지크는 백작을 자세히 살폈다. 함정 같은 건 아닌 것 같았다. 그저 어처구니가 없어 던진 질문일 뿐.
때문에 지크는 별 망설임 없이 진심을 말했다.
“클로원의 황제 자리라면 생각해 보죠.”
“황제라니, 오만이 지나치구나. 하나, 클로원이라니. 그런 나라도 있더냐?”
들어보지 못한 나라이기에 백작은 그저 지크가 되도 않은 허풍을 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클로원의 존재를 아는 자가 옆에 있었다면, 그 엄청난 배포에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 * *
“어쩜 넌 나가자마자 사고를 치니?”
라일라의 한심하다는 눈빛이 지크의 얼굴을 찔러댄다. 그러나 그건 오늘도 온갖 희귀 금속을 두른 것 같은 지크의 뻔뻔한 얼굴에 튕겨나갔다.
“사고가 아니야. 우연찮게 마주친 사건을 내게 유리하게 이용한 거지.”
“잘나셨어, 아주.”
코웃음을 치며 지크의 변명을 흘려 넘긴 라일라가 주변을 살폈다.
“여기가 네가 자란 곳이구나.”
그러며 방 여기저기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지크가 그레이그의 치료를 맡기로 한 후, 백작은 지크의 일행도 전부 백작의 저택에 초대를 했다. 지크를 본격적으로 백작가의 손님으로 취급한 것이다.
물론 지크 일행에 한스가 있다는 것도 일행을 초대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살펴봐야 소용없어. 여기는 내 방이 아니니까.”
“아, 그래. 유감이네.”
그래도 라일라는 방을 살펴보길 멈추지 않았다.
“다음에 네가 자란 방을 볼 수 있으려나?”
“돌아다니는 하인 아무나 붙잡으면 중요한 곳이 아닌 이상 저택 안내를 해 줄 거다. 내 방이었던 곳은 그다지 중요한 곳이 아니었으니 보여주겠지.”
“그럼 나중에 부탁해 봐야겠네.”
라일라가 다시 지크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도 놀랐어. 네가 네 동생의 치료를 맡겠다니.”
“윈두르가 가리킨 곳이 백작가의 저택인 만큼, 백작가를 통째로 몰살할 생각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 타협이 필요했으니까. 게다가 저택을 나올 때 생각했거든. 우리 어머니 패악질 때문에 여기 인간들이 고생한 만큼, 기회가 되면 한 번쯤은 도와주겠다고 말이야.”
“흐음, 그렇구나.”
일단 납득 가는 말이기에 라일라는 수긍했다. 하지만 이어진 지크의 말에, 그녀는 ‘그러면 그렇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병세가 병세인 만큼, 조금은 ‘거친’ 치료를 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 그레이그 놈이 얼마나 비명을 지르든 말이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