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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444화 (444/628)

제444화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가 놀랐다. 아니, 기겁을 했다. 영지의 후계자가 누군가의 발에 차여 날아간 것이다. 두 눈으로 보고도 지금 일어난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껏 그레이그를 말리고 있던, 그레이그의 호위를 담당하는 기사는 한층 더 했다. 신변을 지켜야 할 그레이그가 웬 괴한에게 피해를 입은 것이다.

등줄기부터 얼어붙는 감각이 이런 것일까. 놀라움과 더불어 이 사태에 대한 뒷감당 걱정이 그의 심부를 억눌렀다.

호위에 실패한 것이다. 그냥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미래에 대한 암담함이 그의 분노를 격화시켰다.

기사가 검을 잡았다.

“어떤 놈이…!”

상대를 확인할 것도 없이 그대로 베어버리려 했다.

콱!

기사의 검이 반쯤 뽑히다 멈췄다. 지크가 기사의 검이 모두 뽑히기 전에 검자루를 손으로 막은 것이다.

‘어느새?’

기사는 이번엔 다른 의미로 모골이 송연했다. 순식간에 다가와 자신의 검을 막은 상대의 실력이 범상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무리 그레이그의 행패 때문에 짜증이 나 주변에 신경을 쓰는 걸 소홀히 했다고 해도 상대가 그레이그를 습격할 때까지 아무런 조짐도 느낄 수 없었다.

실력자가 분명했다.

기사가 마음을 바로 하고 전력으로 상대를 죽이기 위해 움직이려 할 때였다.

“혀, 형?”

그레이그의 말에 기사는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형이라고?’

그레이그의 형이라면 한 명밖에 없다. 백작가의 눈엣가시이자 무능했던, 하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그때의 태도를 두고두고 후회하게 만든 사람.

그리고 그레이그를 유능한 후계자에서 지금의 방탕아로 전락시킨 이.

기사는 눈을 크게 뜨고 상대를 살폈다. 기억 속 모습보다는 더 성숙해 보인다. 그러나 그 얼굴은 분명 기억에 있었다.

“…지크 도련님?”

“이러나저러나 전부 기억은 하네?”

지크는 막고 있던 검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기사도 더 이상 지크를 습격하려고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들어오는 걸 막고 있던 기사 한 명이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 왔다. 안의 사태가 그들이 예상한 것보다 급박하게 돌아가자 수습을 하기 위해서였다.

“도, 도련님! 폭력은 안 됩니다!”

지크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그레이그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그를 만류하려고 했다. 아무리 상대가 그레이그의 형인 지크라고 해도 그레이그는 명색이 영지의 후계자인 만큼 폭력을 눈감아줄 수는 없었다.

아니, 방금 전 그레이그를 걷어찬 것만으로도 중죄였다. 엄연히 지크는 계승권을 포기하고 나간, 백작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인 것이다.

“걱정 마라. 더 이상 안 때려.”

지크는 가는 도중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의자를 집어 그레이그의 앞에다 놓고 앉았다.

“쯧쯧! 꼴이 말이 아니구나.”

누가 들으면 동생을 걱정하는 형의 대사 같다. 하지만 말하는 지크도 듣는 그레이그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둘의 사이는 그런 게 아니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

그레이그가 반항적인 눈초리로 노려본다. 하지만 지크의 스산한 눈이 자신을 향하자 움찔 시선을 피했다.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지크가 가문에 있을 때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자신이 지크 스틸월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다니.

하지만 반항심으로 지크의 눈을 쏘아보려 해도 저절로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그의 눈을 볼 때마다 머리가 그때의 생각을 떠올린다.

자신이 이렇게 변해버린 그 사건의 기억을.

흠칫!

저도 모르게 몸이 한 번 떨렸다. 온 몸에 피 칠갑을 한 채 광기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지크의 모습. 꿈에서 수십, 수백 번을 본 기억이다.

자신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그레이그의 모습을 지크는 흡족하게 바라봤다.

‘뿌린 씨앗이 제대로 결실을 맺었군.’

그때의 패배를 극복했다면 한층 더 유능한 후계자가 됐을 텐데, 아무래도 극복하지 못한 모양이다. 지크의 기대대로.

‘그러니 이런 데서 술 먹고 행패나 부리고 있었겠지.’

정말로 그림으로 그린 듯한 타락이지 않은가. 상상력을 조금 더 키워보라며 한 소리를 해주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자신을 무시하던 놈이 쓰레기 같은 놈이 되어 밑바닥을 뒹구는 걸 보는 건 지크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일이었으니까.

“걱정 마라, 돌아온 건 아니니까. 그저 이 영지에 용건이 있을 뿐이거든.”

뒤의 기사들이 작게 실망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이 정도로 인망을 잃었나?’

백작에게 대놓고 반항한 후 후계자 자리를 포기하고 뛰쳐나간 장자가 돌아오는 걸 기대하다니.

물론 이블린의 사건 때 웨스틸버드에서 일어난 일이 알음알음 퍼져서 그런 것이기도 할 것이다. 지크와 한스가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 있단 것과 더불어 지크가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란 것도 알려졌을 테니까.

하지만 그레이그에 대한 실망이 크지 않았다면, 본인들은 숨긴다고 숨기지만 그럼에도 저렇게 티가 날 정도로 실망하진 않았을 것이다.

기사들에겐 다행히도 그레이그는 눈치를 채지 못 한 모양이다. 그는 눈앞의 지크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심력을 모두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도시를 거닐다 웬 소란이 일어서 구경차 왔더니, 네가 술을 내놓으라고 난리를 치고 있더군. 명색이 스틸월 백작가의 후계자가 할 일은 아니지 않더냐?”

그레이그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도 지금의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게 보이는지는 알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크에게만큼은 듣고 싶지 않았다.

“제 발로 가문을 나갔으면서 이제 와 무슨 관심이야! 신경 꺼!”

“그러고 싶다만 넌 내 동생이지 않냐. 신경이 안 쓰일 리가.”

물론 둘 사이에 형제의 정 같은 게 강할 리 없다. 지크의 말은 어디까지나 조롱의 의미밖에 없다.

그레이그가 이를 갈았다. 그러나 그건 지크를 기쁘게 해주는 반응에 불과했다.

생각 같아서는 여기서 속을 더 긁어버리고 싶지만, 지크는 그만 물러가기로 했다.

‘스틸월 백작가랑 정면충돌을 할 필요는 없지.’

필요하다면 망설임 없이 윈두르를 휘두를 지크였지만 지금은 백작 저택 안에 볼일이 있다. 게다가 대놓고 많은 피를 보게 된다면 용사의 칭호를 얻으려는 계획에도 크게 차질이 생긴다.

‘이거 정말로 귀찮네. 그렌 제너드는 이걸 회귀 때마다 했던 거야?’

그 집착과 실행력 하나만큼은 분명 존경할 만한 놈이었다.

지크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다 처먹었으면 일어나 집에나 가라. 더 이상 남에게 폐 끼치지 말고.”

“상관하지 마!”

“완전히 어린애가 다 됐군. 그만하고 가.”

“상관하지 말라고 했…!”

퍽!

그레이그의 말은 계속 이어지지 못 했다. 지크가 그의 목덜미를 내려친 것이다. 그레이그의 눈이 뒤집어지며 그대로 쓰러졌다.

“고, 공자님!”

뒤에서 기사들이 허둥지둥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크는 그레이그를 짐짝처럼 어깨에 둘러멨다.

“가자.”

“네?”

“가자고. 어차피 이 녀석, 이 상태로 너희들끼리만 데려갔다가는 뒷감당하기 더 힘들어질 텐데?”

“그, 그야….”

이미 지금의 사태만으로도 상당한 문책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지크가 직접 그레이그를 데려간다면?

“아니면 그냥 너희들이 데려갈 테냐? 그랬다가는 이러저래 곤란하지 않냐? 늬들, 원래라면 날 체포해야 하는 상황인 건 알지?”

기사들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어렸다.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당장 체포를 못 하겠으면 신변 확보는 해야 문책이 조금은 줄어들겠지.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망설여져서 윗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처리하려 했다는 핑계도 되고 말이야.”

두 기사는 서로를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지크는, 오랜만에 자신의 집으로 귀향을 하게 됐다.

* * *

지크는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들이 머무르고 있는 숙소의 침대도 상당히 고급스러운 침대였지만 역시 귀족가, 그것도 백작가 저택의 것보다 좋지는 않았다.

‘이것 참, 기분이 묘하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하지만 버린 고향. 아무리 의도치 않았다지만 스스로의 발로 돌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지크가 있는 곳은 백작가의 손님방이었다. 그의 방은 이미 남아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뭐, 일단 첫 발은 내디뎠군.’

윈두르가 가리킨 목적지가 백작 저택 안이라는 걸 알았을 때, 지크는 머리를 굴렸다. 일단은 가문에서 제명당한 몸.

그렇다고 백작 가족과 좋은 관계인 것도 아니다. 다짜고짜 찾아가 만나달라고 했다면 만나줄 가능성은 적었다.

‘그레이그를 만난 게 좋았어.’

그레이그를 만난 건 어디까지나 우연이었지만, 지크는 그의 상태를 보고 바로 머리를 굴렸다.

이 상황을 백작 저택에 들어갈 수 있게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아들을 쥐어 팬 자. 그게 집을 나간 장자라면 일단 백작을 대면할 가능성이 크다. 항의를 하든 분노를 표출하든 어떤 이유에서든.

‘다짜고짜 감옥에 처박을 가능성도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군.’

하지만 일단 손님방에 지크를 두었다 하더라도 감금이라는 상황은 변함이 없다. 아마 상황 파악이 모두 끝난다면 지크를 부를 터.

‘정 안 되면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라는 신분을 앞세워 만날 시도를 하려 했었는데, 그것보다 훨씬 낫지.’

만남을 거부당할 가능성도 적지 않고, 만나준다고 해도 지크가 저택을 헤집도록 허용해줄 가능성은 더더욱 적었다.

하지만 그레이그랑 엮는다면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언제쯤이나 되어야 올까나.’

백작가로 오기 전, 가게의 점원에게 돈을 주고 일행에게 전하는 편지를 맡겼으니 일행이 자신의 행방에 대해 걱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크는 편안하게 고향집에서 한껏 여유를 부렸다.

똑! 똑!

“지크 님. 백작님이 부르십니다.”

문 밖에서 들린 목소리에 지크가 빙긋 웃었다.

* * *

지크는 두터운 카펫이 깔린 복도를 걸었다. 양옆에 있는, 백작이라는 작위치고는 검소한 장식물들이 보인다.

‘예전 생각이 떠오르네.’

회귀 후, 한스와 바이너를 신나게 밟은 후에 백작의 방으로 갈 때 걸은 길이 바로 이 길이었다.

곧 둘은 백작의 방의 앞에 도착했다. 하인이 방문을 두드렸다.

“백작님! 지크 님을 모셔왔습니다!”

“…들여보내라.”

하인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지크를 향해 고개를 숙인 채 손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지크가 뚜벅뚜벅 안으로 걸어갔다.

방 안 풍경은 여전했다. 가구며 장식물이며, 철사 같은 수염을 기른 백작까지.

지크는 빙긋 웃으며 백작의 앞까지 걸었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백작님. 건강해 보이시니, 굳이 안부를 여쭐 필요는 없어 보이는군요.”

지크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일단 첫 인사는 평범하게 하려고 했지만 저도 모르게 혀가 꼬여버렸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경악을 하는 가운데, 백작의 입술이 일그러지는 게 보인다. 지크는 그 모습을 태평하게 지켜봤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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