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3화
“자, 뭐 해! 어서 들어가야지!”
“기다려 봐. 마음의 준비를 좀 하고.”
“헛소리 말고. 무슨 드래곤이랑 싸우러 가는 거야?”
“차라리 그게 마음은 편하겠다.”
라일라가 지크의 등을 밀었다. 지크는 약간의 저항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도시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한스.”
“네!”
“네가 앞장서라. 고향에 돌아왔잖냐.”
“지크 님의 고향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래. 내 고향이기도 하지. 좋은 기억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쓸데없는 소리 말고 앞장이나 서.”
일행은 성문을 통과했다. 경비병이 지크나 한스를 알아보는 기색은 없었다. 지크는 아무리 차별받고 있다 하더라도 백작가의 정통 후계자였고 한스는 일을 하던 저택에서만 대부분 머무르는 하인이었다. 일개 말단 경비병이 얼굴을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도시 안에 들어오자 일행의 반응은 세 개로 엇갈렸다. 지크와 한스의 고향이란 소리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일행과 감개무량한 얼굴을 하고 있는 한스. 그리고 똥 씹은 듯한 표정의 지크였다.
일행은 일단 숙소를 잡았다. 각자의 방으로 들어간 후 지크는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윈두르를 들었다.
“똑바로 가리켜라.”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것이, 한스나 스녹이 봤다면 바로 딱딱하게 몸이 얼어붙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지크의 협박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스으윽.
윈두르의 날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지크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하필 거기냐.’
윈두르가 가리킨 곳을 모를 리 없다. 그가 세상에 나올 때까지 계속 살던 곳이니까.
스틸월 저택. 스틸월 백작의 가족이 살고 있는 곳이다.
지크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 마음을 다 잡았다.
‘그래. 까짓 거 들어가지, 뭐.’
애초에 겁 따위 먹은 것이 아니다. 짜증나는 기억밖에 없는 곳이니 들어가기 싫어했을 뿐.
‘간 김에 다시 한번 뒤집어 놓을까?’
스틸월 백작가 사람들이 들으면 거품을 물 만한 생각을 태연히 하는 그였다.
지크는 몸을 일으켰다. 일단 저택에 돌아갈 결심은 굳혔지만 일단 도시의 분위기부터 파악해 볼 생각이었다.
숙소를 나와 시가지를 돌아다닌다. 소년 시절을 보낸 도시지만 지크에겐 무척이나 낯선 도시다. 부모의 인정을 받겠다고 계속 수련만 하면서 보냈으니 도시에 나와 볼 일이 없었다.
‘나름 잘 갖춰져 있는 도시군.’
스틸월 영지를 넘어 주변 영지의 중심 도시라고까지 할 만한 곳이 바로 비올사다. 변경백의 도시인만큼 투박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나름 세련된 모습도 갖춰져 있었다.
정처 없이 거닐던 지크의 발길이 유흥가 쪽으로 향했다. 해가 진 시각임에도 특색이 특색인 만큼 유흥가는 꽤 활발한 모습이었다. 가게들이 문 앞에 피워놓은 불꽃들이 조금이나마 거리를 밝혀주고 있었다.
지크가 어기적거리며 주변을 돌아보고 있을 때였다.
와장창!
무언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조금 떨어진 어떤 가게에서였다.
‘싸움인가?’
저런 재미있는 사건을 놓칠 수야 없다. 지크는 떨어진 고깃덩이를 발견한 개마냥 종종걸음으로 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가게는 상당히 크고 고급스러웠다. 누가 봐도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오고 가는 곳이다.
‘오, 부자 놈들끼리 붙은 건가?’
보통 체면이나 상대의 힘 같은 것 때문에 부자들은 다툼이 있더라도 물리적인 충돌은 적다. 하지만 적다뿐이지 없는 건 아니다.
‘부자 놈들끼리의 싸움은 그 나름의 맛이 있지.’
속없이 낄낄대며 가게에 접근했을 때였다.
벌컥!
가게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나왔다.
‘어라? 저 녀석들은?’
가벼운 차림을 한 채 허리에 검을 찬 자 둘이 가게 입구에 마치 경비를 서듯 섰다. 아마 소란을 일으킨 자의 부하들이 현장을 통제하는 듯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기사들이잖아.’
그들의 가슴 어림에 뚜렷이 박힌 문장은 스틸월 백작령의 최정예, 강철검 기사단의 일원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강철검 기사단이 직접 호위를 하는 대상은 몇 되지 않는다. 그리고 가게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 나오자 지크는 히죽 웃었다.
상대가 누군지 안 것이다.
가게에서 난 소란에 하나둘 구경꾼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그들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가게를 쳐다봤다. 원래 싸움이란 것이 가게에는 불이익밖에 주지 못 하는 것이지만 아무 상관없는 타인에게는 무척이나 흥미로운 사건인 것이다.
하지만 함부로 가게에 접근하지 못 했다. 가게 문을 지키고 있는 두 기사 때문이었다. 이 도시에 스틸월 백작가보다 더 위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없었다. 그저 가게를 둘러싸고 수군거릴 뿐이었다.
“또야?”
“정말로 백작가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현장을 보진 못했지만 구경꾼들은 어떤 사태인지 대충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건 그만큼 이런 사건이 빈번하다는 뜻. 지크는 무척이나 기꺼운 마음으로 군중을 헤치고 가게 앞으로 접근했다.
“물러나라!”
“여기는 출입 금지다!”
두 기사가 험악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누가 봐도 기분이 안 좋은 것이 명확하다.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좋은 꼴을 못 볼 것 같았다.
그러나 지크는 그 경고를 무시했다. 당연히 기사들의 반응도 더욱 안 좋아졌다.
“물러나란 소리 못 들었나!”
지크는 계속 걸었다. 결국 기사들이 검을 뽑았다.
챙! 챙!
날카로운 소리에 구경꾼들이 움찔 물러섰다.
“마지막 경고다! 더 이상 명령을 무시한다면 널 체포…!”
“너희들이 누구였더라?”
지크는 말을 끊고 두 기사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기억 날 리 없었다. 아무리 영지 최정예인 강철검 기사단의 일원일지라도 지크가 그 일원을 모두 기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강철검 기사단은 다르다. 그들이 모시는 백작의 가족들의 얼굴을 외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게 설령 후계자 경쟁에서 밀린 힘없는 장자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 자식이 끝까지…!”
자신들의 말을 끊고 오히려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겁대가리 없는 놈을 한 기사가 제압하려 할 때였다.
덥석!
옆에 있던 동료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자, 잠깐!”
“왜 그래?”
지크가 감탄했다.
“아직 내 얼굴을 기억하는 놈이 있었네? 기특한 녀석이군.”
칭찬을 해 줄 놈이 하나 있었다.
* * *
가게 안은 엉망이었다. 탁자가 뒤집어져 고급술과 안주가 허망하게 바닥에 흩뿌려져 있다. 부서진 유리병이나 그릇 같은 것들은 하나같이 고급품. 가게 입장에서는 한숨이 나올 상황이다.
평소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신분이 높은 자라도 이 가게는 신분이 높은 자들만이 오고 가는 곳. 다른 이들의 눈치 때문이라도 쉽게 행패를 부릴 수 없다. 게다가 스틸월 영지는 치안도 높은 편이다.
하지만 지금 행패를 부리는 자에게만큼은 예외였다.
“내 말 들리지 않는 거냐! 술 더 가져오라니까!”
가게 안에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듣는 이조차 절로 짜증이 솟구칠 것 같은 기분 나쁜 목소리다. 혀가 꼬여 있는 것이 만취한 것이 분명했다.
당연히 가게의 점원이라고 짜증이 나지 않을 리 없다. 당장이라도 뒤통수를 후려친 후에 실컷 밟아버리고 싶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상대였다. 그게 신분이건 재력이건 무력이건. 솟아오르는 짜증을 어떻게든 무마한 뒤 상대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공자님. 하지만 저희도 더 이상 공자님께 술을 드리지 말라고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말끝을 흐리며 곁에 있는 자를 바라본다. 공자를 호위하는 기사다. 술을 더 이상 제공하지 말라는 것도 그의 명령이었다.
그도 이 상황이 골치 아픈지 손가락으로 머리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뭐? 누가 그딴 명령을 내렸단 말이야! 난 이 영지의 후계자란 말이다!”
“제가 그랬습니다, 공자님.”
공자가 기사를 죽일 듯 노려본다. 하지만 기사는 덤덤하게 말했다.
“백작님의 명령이셨습니다. 일정량 이상의 술을 마시게 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백작. 공자의 아버지다. 그도 감히 백작의 이름 앞에서 행패를 부릴 수는 없는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러니까 한 병만 더 먹겠다고 했잖아! 내가 언제 계속 먹겠대?”
“그렇게 드신 술이 벌써 네 병째입니다.”
물론 그 흔적은 공자가 테이블을 뒤집어엎을 때 산산이 부서져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제 정말로 일어나셔야 합니다. 더 이상 귀환이 늦어졌다가는 다시 백작님과 백작 부인께 큰 꾸중을 들으실 겁니다.”
“젠장!”
마치 어린아이 같다. 공자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음식을 지근지근 발로 밟았다. 가게 점원들의 표정이 더 안 좋아졌다. 안 그래도 음식물은 청소하기 힘든데 저렇게 발로 짓밟기까지 해 버리면 더욱 힘들어지는 것이다.
점원들의 표정을 보며 기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공자는 백작가를 이어야 할 자다. 그런데 벌써부터 이렇게 사고를 치며 영민들에게 안 좋은 감정을 심어주다니.
기사의 눈이 점원에게서 떠나 가게의 다른 손님들을 바라봤다. 밖에서 들어올 구경꾼들은 막았지만 원래 여기서 먹고 마시던 손님들을 쫓아낼 순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전부 공자의 추태를 보고 있었다.
후일 그들의 위에 서야 할 인간의 추태를.
‘대체 어디부터 잘못된 건지.’
아니, 그건 알고 있다. 그날의 결투. 사람들이 승패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며 가볍게 생각한 그 결투 하나가 모든 걸 뒤집어버렸다.
공자는 그 전까지 굉장히 유능한 후계자였다. 실력도 인성도 모자람 없는, 오히려 뛰어난 편에 속했다.
그러나 그 결투 이후 공자는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엇나갔다. 공부를 손에서 놓고 오로지 술을 찾으며 바깥으로 나돌았다. 백작과 백작 부인이 혼내도 보고 얼러도 봤지만 그 모든 것이 통하지 않았다.
‘자기 동생을 꼭 이렇게까지 만들어야 했나.’
영지를 뛰쳐나간 그에 대한 원망이 솟아올랐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럴 만도 했지.’
영지에서 그가 당한 차별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미지근한 원망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미래가 차단당해 백작가가 걸어나갈 암울한 길밖에 예상이 되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차라리 첫째 공자를 확실한 후계자로 밀었다면.’
아마 지금 진상을 아는 모든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이봐.”
“네?”
“너 지금 그 새끼 생각했지.”
공자의 눈이 희번덕였다.
“지금 그 새끼랑 날 비교했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생각을 들켜 뜨끔했지만 기사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지금 그 말을 긍정했다가는 어떤 난리가 날지 훤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공자는 납득한 것 같지 않았다.
“씨발! 내가 모를 줄 알아! 그 새끼가 백작위를 잇는 게 나았다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새끼들이 잔뜩이야! 너도 그런 거잖아!”
“절대 아닙니다!”
공자가 일어섰다. 술에 잔뜩 취해 몸이 비틀거린다. 취기 어린 눈에 울분이 치솟았다. 그가 기사의 멱살을 잡았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전부 지크! 지크! 지크! 그렇게 지크가 좋으면 그 새끼를 찾아 와! 이 빌어먹을 후계자 자리 얼마든지 넘겨 줄 테니까!”
“공자님! 말이 심하시…!”
퍼어억!
순간 기사 앞에 있던 공자의 몸이 날아갔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그는 자기가 뒤집어엎은 잔해 위로 굴렀다.
“아악!”
유리 파편 등 날카로운 것들이 그의 몸에 틀어박혔다. 냄새나는 음식이 그의 몸을 물들였다.
“어떤 새끼…!”
감히 자신을 걷어찬 정신 나간 놈을 향해 그가 분노를 표출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그는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어, 어….”
“오랜만이구나, 그레이그. 잘 지냈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