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2화
지크의 일행과 동행한 시간은 짧았지만, 라라는 슬슬 이 일행의 분위기를 알 수 있었다.
리더인 그렌에게 상당한 권한이 있는 건 맞지만 기본적으로 파티원끼리 평등했던 전 파티와는 다르다.
리더인 지크가 정점에 서 있는 철저히 수직적인 관계. 그나마 라일라가 지크를 편하게 대하고는 있지만 나머지 셋은 지크에게 복종하고 있었다.
‘아니, 드웨인 씨는 좀 다른가?’
그녀는 지크보다는 라일라를 따르는 느낌이었다. 지크도 그녀에게는 조금 무르게 대하는 편이었고.
하지만 한스와 스녹은 달랐다. 그들의 지크에 대한 충성은 정말로 상상 이상이었다.
‘지크씨에게 가르침을 받는 이들이라 그럴까?’
지크와 그 제자들. 그리고 라일라와 그 제자. 이렇게 두 무리가 한데 뭉친 것이 지크 일행이라고 라라는 판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두 무리 사이에 뭔가 알력 같은 것이 보이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서로 간의 강한 신뢰가 느껴졌다.
‘편해.’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가 그렇게 느낄 정도로 이 파티는 안정적이었다. 분명 굉장히 수직적인 파티임에도 불구하고 편안함을 느끼다니.
저번 파티에 있을 때 너무 불편함을 느꼈던 반동일 수도 있다.
파티원끼리 평등한 파티에서는 불편함을 느끼고 수직적인 파티에서는 편안함을 느끼다니. 그렌의 파티가 얼마나 비정상적이었는지 그녀는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해가 지고 지크 일행은 야영을 준비했다.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터라 나름 안락한 야영 자리가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불을 올리고 마법 상자에서 재료를 빼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보글보글 맛있는 냄새가 주변에 퍼진다. 배가 고프지 않더라도 절로 군침이 돌 만한 냄새다.
하지만 그 냄새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채앵!
“크윽!”
검이 크게 튕겨나간다. 한스의 몸이 휘청거렸다. 하지만 곧 중심을 잡고 다시 덤벼들었다.
채앵!
한스의 검이 빠른 속도로 휘둘러졌다. 하지만 그의 공격은 너무도 쉽게 막혔다.
퍼억!
“커헉!”
복부에 발이 꽂힌다. 한스가 나뒹굴었다.
“다시!”
지크가 크게 소리쳤다. 한스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다. 상당히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그는 다시 검을 부여잡고 지크를 향해 덤벼들었다.
라라는 그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굉장해!’
둘의 공방은 감탄이 나올 만한 것이었다. 마력을 사용해 붙는다면 주변이 초토화될 것이 자명하기에 둘은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 대련을 하고 있었다.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 대련을 하는 건 널리 퍼진 수련 방법이었기에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둘 다 수준이 높아.’
한스의 검은 정말로 유려했다. 그가 싸우는 것을 봐 왔기에 그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감탄이 나왔다. 한스의 실력은 그 정도로 대단했다.
그러나 더욱 경악스러운 건 지크의 실력이었다.
채앵! 채앵! 채앵!
사정없이 몰아치는 검격의 폭풍. 한스는 그 공격을 막기에 급급했다. 정말로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그런 의심이 절로 생겨날 정도로 지크의 공격은 그 궤를 달리 했다.
채앵!
결국 한스가 검을 놓쳤다. 자신의 목에 겨눠진 검을 보고 한스는 순순히 손을 들었다.
“예전보다 쥐꼬리만큼 나아지긴 했군. 그래도 아직 멀었다. 계속 수련해.”
“네!”
나뒹구는 검을 줍고는 한스가 크게 대답했다.
“다음은 브라우닝.”
지크가 자신을 보자 라라가 벌떡 일어섰다.
“준비해.”
“알았어요!”
라라는 자신의 검을 들고 지크의 앞에 섰다.
“덤벼.”
지크의 말이 끝나자 라라는 크게 기합을 내지르며 검을 들고 달려갔다. 지크와 라라의 검이 맞부딪쳤다.
‘빈틈이 없어!’
계속 검을 휘두르며 지크의 빈틈을 찾는 라라였지만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최선을 다하는 그녀에 비해 지크는 누가 봐도 쉬엄쉬엄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라라의 검은 지크의 검을 뚫지 못했다.
휘익!
“윽!”
오히려 간간이 날아드는 지크의 시원찮은 공격에 등허리가 섬뜩해졌다.
퍼억!
“악!”
지크가 검면으로 라라의 팔뚝을 때린다. 라라가 힘없이 나가 떨어졌다.
“그만해?”
제자인 한스, 스녹과는 달리 지크는 라라에게는 그리 닦달을 하지 않았다. 대련을 하기 싫다 하면 바로 검을 집어넣을 것이다.
그러나 라라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계속할게요!”
황급히 일어나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날아오는 지크의 공격을 받아냈다.
지크는 정말로 사정 봐주지 않고 라라를 공격했다. 베지만 않을 뿐, 때리고 걷어찼다. 하지만 라라는 오히려 웃었다.
수준 높은 검사와 하는 대련은 그녀의 실력을 올려줄 것이다. 그렌의 파티에 있을 때 이런 대련은 불가능했다. 그녀가 검을 잡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하는 그렌이 대련을 해줄 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신관인 첼시나 마법사인 피나와 대련을 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랬기에 라라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도 즐거웠다.
채앵!
라라의 검이 튕겨나갔다. 결국 지크의 공격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네? 아직 더 할 수 있어요!”
온몸이 욱신거리지만 라라는 조금 더 대련을 원했다. 지크와 대련을 할 때마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실력이 느는 것 같았다. 자신이 원하는 검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다는 것에 라라는 압도적인 충실감을 느끼고 있었다.
“밥 다 됐다. 오늘만 날이 아니야.”
하지만 지크는 매정할 정도로 라라의 권유를 무시했다. 라라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스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한스가 물었다.
“어땠어요?”
“재미있었어요.”
이토록 충실한 여행은 그렌과 막 여행을 떠났을 때 정도밖에 느껴보지 못했다. 욱신거리는 고통 따위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일행은 완성된 요리를 서로 간에 나눴다. 일행 모두 상당히 배가 고팠기에 받는 즉시 요리를 입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그들의 단란한 식사를 방해하는 방해꾼이 나타났다.
스튜를 한가득 입에 퍼 넣던 지크가 못마땅한 얼굴로 숲 한쪽을 바라본다.
“쯥! 밥 먹을 때 오고 지랄이야, 저것들은.”
“몬스터야?”
“응.”
한스와 스녹이 먹던 그릇을 내려놓았다. 당장 튀어나가 몬스터들을 격살할 기세였다.
“먹던 거 먹어.”
지크가 들고 있던 숟가락을 허공에 몇 번 찔렀다. 순간 라라는 느낄 수 있었다. 소름끼치는 마력이 숲 안으로 날아간 것을.
쿵! 쿵! 쿵!
저 멀리서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라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가까이 있는 나무 몇 그루에 손가락만 한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보였다.
‘대체 이 사람은….’
검술만 대단한 것이 아니다. 정말로 힘에 관련된 것이라면 만능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지크의 능력은 대단했다.
하지만 지크도 일행도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저 정도는 이미 놀랄 거리도 안 된다는 뜻이다. 한스도 스녹도 내려놓은 그릇을 다시 들고 음식을 먹고 있다. 몬스터들을 격살한 지크도 별일 아니라는 듯 투덜거리기만 했다.
“이럴 땐 사각뿔의 원혼이 아쉽네. 그것만 있었다면 저런 것들이 귀찮게 굴지도 않을 텐데.”
사각뿔의 원혼과 일각뿔의 한탄은 모조리 파괴됐다. 여러 사람이 사각뿔의 원혼을 상당히 탐낸 것이다. 몬스터들을 조종할 수 있는 아티팩트라니. 그걸 갖고 있으면 여러모로 써먹을 수 있다.
하지만 지크가 그걸 줄 리 없었다. 후환이 남지 않도록 지크는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사각뿔의 원혼은 물론 일각뿔의 한탄까지 모조리 부숴버렸다.
아쉬움을 보이는 사람들이 몇 있었지만 대놓고 반발하는 자들은 없었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 물건인지는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없어진 걸 아쉬워해서 뭐 하겠어. 그리고 너라면 그리 힘든 일도 아니잖아.”
“뭘 모르네, 라일라. 원래 귀찮음이란 건 사소한 것에서 더욱 발휘되는 법이야. 멀리 여행을 떠나는 것보다 집 앞에 볼일을 보러 가는 게 더 귀찮은 법이라고.”
“그딴 개똥철학은 필요 없으니까 다른 생산적인 일에 머리를 써.”
둘이 가볍게 투덕거렸다. 라라도 저게 일상이란 건 이제 안다. 처음에는 살짝 불안해했지만 지금은 능숙하게 둘의 다툼을 무시하고 자신의 음식을 먹었다.
저녁을 먹은 후 뒤처리까지 한 일행은 하나둘 잠자리에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크는 잠을 자지 않고 윈두르를 가만히 쳐다봤다. 윈두르의 날이 구부러져 다음 목적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마음이 복잡해?”
“복잡하긴 뭘.”
라일라의 말을 딱 잘라 부정했다.
“그래도 뭔가 상념 같은 게 있지 않아? 다음 장소가 장소잖아.”
“아직 정해진 건 아니야.”
“너답지 않게 왜 현실 부정을 하고 그러니? 적어도 그곳을 경유하는 건 확실하잖아. 한스는 벌써부터 조금 들뜬 것 같던데.”
“그 녀석은 거기서 나쁜 기억이 없을 테니까.”
오히려 모두에게 사랑을 받고 컸다.
“너는 나쁜 기억이 있고?”
“나쁜 기억이 있는 게 아니라 나쁜 기억밖에 없어. 오죽하면 내가 정신이 들자마자 깽판부터 쳐놓고 나왔을까. 뭐, 그건 재미있었지만.”
“그래도 난 조금 기대가 돼. 네가 자란 곳이잖아.”
“기대할 것 없어. 중앙에서도 먼 변경이라 즐길 거리 같은 건 별로 없으니까. 허구한 날 옆 나라와 치고받는 곳이라서 더 그렇지.”
“그런 건 상관없어. 난 그저 네가 자란 곳을 보고 싶은 것뿐이니까.”
“아마 많이 실망할 거다.”
지크는 툴툴거리다 윈두르를 노려봤다.
“하필 안내를 해도 그 곳이냐. 차라리 험지라도 다른 곳이 낫지.”
그리고 구부러진 윈두르의 날을 손가락으로 잡고 힘을 줬다. 억지로 윈두르의 날을 돌릴 모양이었다. 하지만 윈두르의 날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고집스럽게 한 곳을 계속 가리켰다.
“포기해. 네가 그런다 해도 목적지가 변하진 않을 테니까.”
“목적지가 아니라 경유지야.”
“네가 그렇게 믿고 싶다면 그렇게 믿으렴.”
라일라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평소라면 바로 반격을 할 테지만 지금 지크는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아, 젠장! 왜 진짜 그곳이냐고.”
윈두르가 가리키고 있는 방향으로 똑바로 나아가면 곧 그곳이 나온다.
스틸월 영지. 지크와 한스의 고향이었다.
지크로서는 당연히 무척이나 반갑지 않은 곳이다. 윈두르를 따라가며 설마설마 했지만 정말로 스틸월 영지 지척까지 올 줄은 몰랐다.
“뭐, 됐어. 스틸월 영지는 넓어. 설마 비올사까지 가게 되진 않겠지.”
스틸월 영지의 주도 비올사에는 스틸월 백작의 저택이 있다. 지크로서는 정말로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하지만 라일라가 쓸데없이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저기, 지크.”
“뭐야?”
“보통 그런 말을 하면 꼭 이루어진다고 하던데. 혹시 그런 미신 믿니?”
“시끄러.”
지크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 * *
“아, 젠장!”
지크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윈두르를 원망스럽게 쳐다봤다. 하지만 윈두르는 꿋꿋이 눈앞의 도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옆에서 라일라가 말했다.
“말했지? 그런 말을 하면 꼭 이루어진다고.”
몇 년 전, 회귀 후 지크가 여행을 시작한 곳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