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1화
산 아래로 피알루가 보인다. 어둠 속에 잠긴 채 간간이 비치는 불빛이 도시의 전경을 작게나마 비추고 있었다.
그렌은 스산한 눈으로 그 모습을 쳐다봤다. 몬스터들에게 모조리 짓밟히고 파괴되어야 했을 도시가 멀쩡한 모습이 눈엣가시 같다. 뭐만 하면 지크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하는 시민들도 짜증 났다.
당장이라도 부숴버리고 싶은 도시다.
‘기회가 된다면 주춧돌 하나 남기지 않고 쓸어버리겠어!’
정당한 용사인 자신을 내버려 두고 다른 이를 칭송하는 것만으로도 저 도시는 파괴되어 마땅한 곳이었다.
저벅!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그렌이 뒤를 쳐다봤다. 어둠 속에서 일단의 무리가 그의 뒤에 다가와 있었다.
전부 다 로브를 푹 뒤집어쓰고 있는 자들. 그렌의 부하인 로브를 쓴 자들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로브들과는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주인님.”
가장 앞에 있던 자가 앞으로 나서며 로브를 벗었다.
그는 예전 비올루윈에서 지크 일행의 동상을 살피고 세계수가 있는 유적지에 있던 바로 그 자였다.
“무슨 일이야, 울텔.”
로브들을 거의 소모품 취급하는 그렌이지만, 눈앞의 사내만큼은 달랐다. 로브들을 이끄는 조직의 수장으로, 그렌의 목적을 이루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으니까.
하나 그래도 그의 부하에 불과하다. 그렌은 불쾌감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웬만하면 날 찾지 말라고 했을 텐데?”
“요새 일이 잘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렌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내 뒤를 캔 건가?”
“당치도 않습니다. 다만 제 임무는 주인님의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뒤에서 도와드리는 것. 그 때문에 정기적으로 부하들에게서 보고를 받지요. 주인님께서도 알고 계신 일이 아닙니까.”
당연히 그렌도 알고 있다. 그저 짜증 나는 통에 반쯤 화풀이로 내뱉은 말일 뿐이다. 하지만 울텔이 저렇게 꼬치꼬치 반박을 하는 모습에 짜증이 더 올라왔다.
“물론 주인님께서는 생각이 있으셔서 그럴 겁니다. 제가 어리석어 그 생각을 읽지 못해 주인님에 대한 지원에 실수를 하게 될까 걱정이 됩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시고 어리석은 제 궁금증을 풀어주시길 바랍니다.”
울텔은 몸을 바짝 낮췄다. 척 보니 그렌은 상당히 짜증이 나 있는 상태다. 하지만 그는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저 꼭두각시를 다루는 데는 이골이 나 있어.’
7살 먹은 애도 아니고 자신을 조금만 치켜세워주면 제 잘난 맛에 화를 풀어버리는 게 그렌 제너드란 인간이다. 이미 몇 번이나 이 방법으로 놈을 주물러 왔다.
이번에도 울텔은 그렌이 화를 풀 거라 생각했다. 심통은 조금 더 오래가겠지만.
그러나 울텔의 생각은 빗나갔다.
그렌이 한 걸음 다가온다. 그의 눈을 보고 울텔은 흠칫 놀랐다. 그의 눈이 새까맣게 죽어 있었다.
덥석!
“컥!”
그렌이 울텔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렸다.
로브들이 움찔거렸다. 명목상으로 여기 있는 자들은 그렌의 부하들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렌은 울텔의 목적을 위한 꼭두각시일 뿐. 인형 따위가 감히 자신들의 주인의 멱살을 잡은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 움직이지도 않았다. 울텔의 명령이 있기 전까지 그들은 이 연극을 계속해야 했다.
“이봐, 울텔. 내가 누구지?”
“저, 저희의 주인…님이십…니다….”
호흡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상태에서도 울텔은 필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래. 내가 주인이지. 그리고 내 명령은 절대적이다. 너희들은 입 닥치고 따르면 되는 것뿐이야. 그런데 이렇게 멋대로 행동을 한다고? 너희도 내 계획을 방해하는 거냐!”
억지다. 울텔이 그렌을 이렇게 찾아오는 일은 종종 있었다. 분명 울텔이 충성스럽게 그렌을 따르는 이는 절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트집 잡힐 일은 최소한으로 줄이려 노력했다.
‘이 자식, 뭔가 있었군!’
분명했다. 울텔이 알기로 이런 식으로 그렌이 행동하는 건 이전 시간 선에도 없었다. 뭐가 제대로 어긋난 게 분명했다.
“죄,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더욱 주의하겠습니다!”
울텔이 그렌에게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그렌의 분노는 쉬이 가라앉을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단순한 화풀이일 뿐이었으니까.
그렌이 열이 받은 이유는 울텔과는 무관한 일이 분명했다.
울텔은 짜증이 났다. 생각 같아서는 이 녀석을 잡아 사정없이 짓밟고 싶었다. 하지만 그렌의 효용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젠장! 어떻게 해야 하지?’
자칫하다가는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
그건 상관없다. 어차피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저 용사 병신이 있는 이상 시간은 되감길 테니까.
하지만 그냥 죽음을 받아들이기엔 이 시간선의 변수가 너무도 많았다. 특히 시스템의 이상 반응이 걸렸다.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되지만….
‘회귀 능력에 이상이 생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모든 계획이 무너진다.
‘최악에는 여기서 이놈을 죽여야 할 수도 있어!’
다행히도 상황은 최악으로까지 치닫지는 않았다.
털썩!
“쿨럭! 커헉!”
울텔은 땅에 주저앉은 채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흡입했다.
“뭐, 됐다. 어차피 네 놈이 필요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이 지랄을 떨었다고?’
당장 그렌의 따귀를 올려붙이고 싶은 울텔이었지만 그 욕망을 꾹꾹 눌렀다. 오히려 고개를 더 숙였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내 힘들, 당장 사용하겠어.”
“네?”
울텔이 저도 모르게 반문하며 그렌을 올려다본다. 그렌의 눈썹이 꿈틀대는 걸 보고 바로 다시 고개를 박았다.
“그것들은 차근차근 사용해야 합니다, 주인님! 부작용이 너무 큽니다!”
‘적당히 고집부려라, 쓰레기 같은 놈! 그걸 함부로 사용했다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 네놈이 가장 잘 알면서!’
그렌 제너드의 재능은,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좋지 않다. 아니, 좋지 않을 걸 넘어서 무척 떨어진다. 실제로는 한스는커녕 일반 기사들의 재능과 비교해도 부족하다.
그런 그렌이 최강의 재능을 가진 지크 모어조차 토벌할 수 있는 용사 파티의 리더가 될 수 있었던 건 바로 클로원이 남긴 유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태생적으로 적은 마력을 보충했고 신체 능력도 끌어 올렸다. 거기에 엄청난 회귀를 통해 얻은 검술과 경험을 적용하니 용사로 불려도 흠잡을 수 없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그럼에도 지크를 따라잡을 순 없었지만.
하지만 아무리 클로원의 유산이라도 한계는 있는 법. 타고 나지 않은 힘을 강제로 주입하는 것이라 극도로 조심해야 했다. 시간을 두고 용법을 지켜 차츰차츰 힘을 얻어야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
한데, 그렌은 지금 그 용법을 모조리 무시하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괜히 힘을 빨리 얻겠다고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힘을 흡수하다가 몸이 터진 게 몇 번이냐!’
라일라의 기억을 통해 그 사실을 안 울텔은 혀를 차며 미련한 그렌의 행동을 욕했었다. 그 재능 없음을 비웃는 건 덤이었다.
“울텔.”
“네!”
“나는 하겠다고 했다.”
절대로 막을 수 없는 고집이 느껴진다.
“…알겠습니다. 준비해 놓겠습니다.”
울텔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바로 죽진 않겠지?’
회귀로 쌓아온 경험도 있을 테고 지금껏 흡수한 힘도 적지 않으니, 초반처럼 몸이 터져 나가 회귀가 발동한다는 웃기지도 않는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은 적다.
‘그래도 상당한 무리가 따를 거다.’
그러나 이미 그에 대해선 신경을 껐다. 어차피 고통을 당하는 건 저 용사 병신인 것이다.
그따위 것보다 울텔에게는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시스템의 이상과 관련되어 있을지 모를 정보를 얻어야 했다.
‘저놈이 갑자기 발작을 하는 것도 관련이 되어 있을지 몰라.’
울텔은 조심조심 그렌에게 말을 걸며 정보를 얻으려 했다. 다행히 울텔이 말을 조심히 잘해서 그런지, 그렌은 기분이 나빠 보이는 건 여전했지만 또 다시 발작을 하지는 않았다.
짧은 대화가 오고 가고, 그렌은 울텔을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근 시일 내에 힘들을 모두 갖고 오도록.”
“네!”
그렌은 울텔의 일행을 두고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래! 당장 힘이 필요해!’
자신의 실패의 증거인 멀쩡한 피알루의 성벽을 보고 그렌은 이를 갈았다.
‘더 이상 지크 모어에게 내 것을 빼앗길 순 없어!’
루벨라도 레오나도 엘레나도 라라도. 거기에 더해 명예마저 지크 모어에게 강탈당하고 있었다.
‘절대로 용서 못 해!’
하지만 그가 당장 힘을 얻으려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그렌은 그 이유에 대해 철저하게 외면했다. 떠오르려는 생각을 한사코 지웠다.
여러 시간선에서 에스텔레이드는 항상 그렌의 것이었다. 그렌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이 바로 에스텔레이드일 정도다. 태양의 용사라는 이명이 붙은 것도 에스텔레이드 때문이 아니던가.
그 에스텔레이드를 들지 못했다. 왜 그런 것일까.
‘어쩌면….’
다시 들려던 생각을 황급히 지워 없앴다. 하지만 감정마저 없애지는 못했다. 그 생각을 떠올리려 할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건 분명 공포였다.
그렌은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계속해서 스며드는 불길한 생각을 떨쳐내며 신경질적으로 걸었다.
그 생각은, 그렌으로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 * *
“…갔군.”
그렌이 사라졌음에도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울텔이 일어났다. 부하가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개자식! 능력도 없는 놈이 성격만 더러워서는!”
울텔이 침을 뱉었다.
“계획이 이뤄졌을 때 이 세상의 고통이란 고통은 모두 주며 죽이겠습니다.”
“안 돼! 저놈은 내 거다.”
그 달콤한 순간을 부하에게 양보할 순 없다.
“어쨌든 만나보길 잘했군. 보고 받은 것보다 계획이 심하게 꼬였어.”
“이런 일이 많이 있었습니까?”
“아니.”
적어도 정보가 많이 쌓이고 음모가 체계적으로 정립된 이후 이 정도로 뒤틀린 시간선은 없었다.
“그럼 대체 원인이 뭘까요?”
“변수에 자주 관련된 놈이 하나 있긴 하지.”
울텔이 차갑게 그 이름을 내뱉었다.
“지크 모어.”
예전 비올루윈에 세워져 있던 놈의 동상이 생각났다. 과연 최초 시간 선의 용사는 다르다는 것일까.
‘코어가 녀석에게 붙으면서 변수가 된 것일까. 다른 놈도 아니고 그놈이 변수가 됐다면 엄청나게 골치 아픈데.’
울텔은 지크가 얼마나 강하고 적으로 두면 얼마나 골치 아픈지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어.’
울텔도 부하들을 이끌고 산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 * *
지크 일행이 피알루를 떠나는 날이 왔다. 도시에서 찬양받는 영웅들답지 않게 지크 일행은 조용히 피알루를 빠져나왔다. 도시를 떠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시장이 대대적인 배웅을 준비하려고 했지만 지크가 딱 잘라 거절했다. 지금까지 받은 정도면 충분했다.
“더 이상 용사 취급받으며 칭송받는 게 안 맞았단 거지?”
“두드러기가 날 것 같더라.”
지크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고 라라가 눈을 깜박였다.
“어째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죠?”
조심스레 옆에 있는 한스에게 물었다. 한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크 님은 용사라는 호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신기한 사람이네요.”
명예로운 호칭이 아니던가. 라라는 지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건 다른 법이니까요.”
“그건 그렇죠.”
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