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0화
“그 후로 짐을 챙겨서 나왔어요.”
라라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끝냈다. 하지만 지크 일행 중 누구도 따라 웃는 사람은 없었다.
“정말로 너무하네.”
라일라가 불쾌하게 말했다.
이미 그렌의 본성을 알고 있는 그녀로서 그렌의 행동이 이상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을 리도 없었다.
다른 이들도 그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크만은 뭔가 생각할 것이 있는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마음의 정리는 거의 끝이 났으니까요. 오히려 이제는 시원하기도 한 걸요.”
매몰찰 정도로 그렌에게 무시를 당했을 때, 당연히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그녀가 그렌에게 안고 있던 감정을 생각하면 그 아픔은 놀랄 정도로 가벼웠다.
그걸 느꼈을 때, 라라는 새삼 깨달았다.
자신의 그렌에 대한 감정이 정말로 식어 버렸다는 것을. 마지막 남았던 감정의 찌꺼기도 그렌의 마지막 말에 완전히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
“그래요. 그런 형편없는 남자는 더 이상 생각지 말아요. 브라우닝 씨는 더 멋진 만남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요.”
“후훗, 감사해요.”
라일라의 위로가 든든한 힘이 되었는지 라라도 제법 미소를 지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브라우닝 씨.”
“뭐든지요.”
예전엔 지크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라라지만 이미 그 감정은 거의 다 희석되어 있었다. 지크의 질문에 라라는 흔쾌히 대답했다.
“제너드 씨의 변화가 좀 갑작스럽군요. 혹시 뭔가 짐작 가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저도 그렌의 진짜 모습을 모르게 돼버렸으니까요. 그래도 굳이 이상한 점을 생각하면….”
라라는 저번 전투에서 에스텔레이드 옆에서 가만히 서 있었던 그렌의 모습을 알려줬다. 그 말을 듣는 즉시 지크의 눈이 빛났다.
‘녀석이 에스텔레이드 근처에 서 있었다고?’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겠습니까?”
라라는 그 당시의 상황을 조금 더 자세히 말했다. 한스도 그녀의 설명을 도왔다. 애초에 라라가 그렌을 만난 이유가 한스가 에스텔레이드를 놓쳐서 일어난 일이었으니.
지크는 머리를 굴렸다.
‘그 새끼 성격상 자기 앞으로 날아온 에스텔레이드를 보기만 할 리 없어.’
라라는 그렌의 토르니움도 땅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고 했다.
‘에스텔레이드가 날아온 걸 보고 바로 토르니움을 내팽개친 건가?’
가능성은 있다.
‘그렇다면 녀석이 에스텔레이드를 들려고 한 건 분명할 거야.’
하지만 그렌은 에스텔레이드를 들지 못했다. 라라의 설명에 따르면 그저 에스텔레이드의 옆에서 넋이 나간 듯 멍청하게 서 있다고 했었으니까.
그게 말해주는 상황은 하나.
‘그 새끼, 에스텔레이드에게 거부당했구나!’
용사랍시고 거들먹거리던 놈이 성검에게 거부당하다니!
‘아, 젠장! 그때의 얼굴을 봤어야 하는데!’
지크에겐 드물게도 무척이나 후회되고 미련이 남는 일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 모습을 초상화, 동상, 시 등등 모든 예술적 흔적으로 남겨 대대손손 전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지크가 좋아하는 이유는 그렌이 맛봤을 절망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말로 녀석이 회귀의 힘을 잃은 거야!’
그렌이 에스텔레이드를 잡지 못했다는 사실이 강력한 증거였다.
지크는 에스텔레이드가 주인을 고르는 데 관하여 무척이나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한스나 라라, 라일라라면 모르지만 적어도 지크 자신이나 그렌은 절대로 에스텔레이드를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두 개. 에스텔레이드를 정의로운 자만이 들 수 있다는 말이 틀렸거나 지크와 그렌이 에스텔레이드의 조건에서 예외 취급을 받을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크는 후자라고 생각했다.
‘클로원에 관련된 힘을 갖고 있는 자는 조건을 무시하고 에스텔레이드를 들 수 있는 거야.’
지크는 손가락에 박혀 있던 운명을 비트는 열쇠 때문이었을 테고 그렌은 회귀 능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데 에스텔레이드가 더 이상 그렌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회귀 능력이 사라진 거지.’
그 짜증 나는 지크 브레이브의 말을 믿지 않은 건 아니지만 증거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옆을 보니 라일라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오고 있다. 그녀도 지크와 같은 답을 내린 것이다.
‘어쨌든 나에겐 좋은 소식뿐이군.’
그렌의 능력이 사라진 또 다른 증거를 얻었고 녀석이 얼빠진 모습을 보였다는 만족스러운 정보도 얻었으며 라라 브라우닝도 녀석에게서 떨궈냈다.
‘재능이 있는 녀석이야.’
그렌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재능이 떨어지는 방패를 들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지크 자신과의 싸움에서 훌륭한 일각을 담당한 그녀다. 본격적으로 검을 갈고 닦는다면 훨씬 높은 경지에 이를 것이다.
‘살짝 가르쳐볼까?’
물론 한스나 스녹처럼 본격적으로 가르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계기 정도는 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그럼 어쿠스는 그 사람의 의견을 따른 건가요?”
엘레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라라에게 묻는 모습이 보인다. 그래도 동향 사람이라고 피나가 걱정되는 모양이다.
“네. 자신의 학파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명성이 필요하다고 했으니까요.”
엘레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 이상 뭐라 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동향 사람이라도 그녀와 피나는 어디까지나 얼굴을 아는 지인에 불과했으니까. 그것도 가문끼리의 사이도 좋지 않은.
엘레나가 입을 다물자 이번엔 한스가 질문을 했다.
“브라우닝 씨는 이대로 도시를 떠날 생각이십니까?”
“네. 더 이상 이 도시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괜히 그렌 일행과 얼굴을 부딪친다면 어색하기만 할 테고요.”
“계획은 있으시고요?”
“구체적인 건 없어요. 그저 여행을 계속하면서 곤란에 빠진 사람들을 도우려고요. 제가 여행을 떠난 이유가 그것이었으니까요.”
그녀가 한스를 향해 생긋 웃었다. 잃어버렸던 여행 초기의 마음가짐을 상기시켜준 한스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그럼 저희 일행에 잠시 동행하는 건 어떻습니까?”
“…네?”
한스의 제안은 갑작스러웠다. 라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른 일행도 놀란 기색이었다. 그러나 한스는 담담하게 지크에게 허락을 구했다.
“괜찮겠습니까, 지크 님?”
“상관없어.”
안 그래도 그녀를 살짝 가르쳐볼까 생각도 하지 않았던가. 그렌의 추태를 알려온 공도 있으니 지크는 무척이나 수월하게 허락했다.
‘게다가 나중에 그렌 제너드를 만났을 때 라라 브라우닝이 우리 쪽에 있다면 절대로 좋은 얼굴을 하지 않을 테니까.’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을 상상하며 지크는 속으로 낄낄거렸다.
라라는 당황했다. 자기의 의도는 상관치 않고 사태가 흘러가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브라우닝 씨? 저희 일행은 절대 제너드 씨의 일행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야. 뭘 얻다가 비교하고 있어? 당연히 우리 쪽이 훨씬 위지!”
지크가 한스에게 한소리를 했다.
“어,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좀 당황스러운데요.”
“뭐, 우리도 당장 이 도시를 떠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 천천히 생각해도 됩니다.”
지크가 말했다.
“…그럼 잠시 생각을 해볼게요.”
하지만 라라 본인이 생각해도 나쁜 이야기만은 아니다. 일단 생각할 시간을 벌긴 했지만 라라의 마음은 이미 지크 일행에 합류를 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 * *
최근 계속해서 축제와도 같은 분위기를 내던 피알루였지만, 오늘의 분위기는 달랐다. 거리에서 들리는 왁자지껄함은 사라지고 엄숙함이 도시 곳곳에 깊게 깔렸다.
보통 성벽은 시민들에게 개방되어 있지 않다. 추락의 위험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엄연히 군사 시설인 까닭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성벽 위에 시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성벽 위만이 아니었다. 피알루 주변 산에도 사람들이 올라 군데군데 모여 있었다.
피알루 옆 평원에서 진행되는 장례식을 보기 위해서였다.
몬스터와의 전투는 피알루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 피해가 없을 리 없었다.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그들은 대부분 피알루에 사는 사람들의 아버지이고 남편이었으며 아들이었다.
자신들을 위해 죽어간 사람들의 마지막을 보며 시민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죽은 자들의 가족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기절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장례식은 묵묵히 진행되었다.
카르위먼에서 나온 신관들이 축사를 하고 가득 쌓인 통나무에 불을 붙인다. 거센 불길이 통나무를 태우며 그 위에 놓인 시체들에 옮겨 붙는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봤다.
그중에는 늑대의 송곳니의 단원들도 있었다. 그들도 이번에 적잖이 피해를 입었다. 특히 부단장인 닉과 그가 끌고 나갔던 단원들의 피해가 무척이나 컸다.
물론 그건 몬스터와의 전투가 아닌 지크와 틸에게 죽은 것이지만.
그러나 닉의 음모는 도시에 알려지지 않았다. 자연스레 닉을 따라갔던 용병들도 마찬가지. 그들은 이 일을 뒤에서 꾸미던 흑막을 쫓다가 죽은 것으로 되었다.
“으아아아아아앙! 아빠아아아아!”
엘리가 타오르는 불길을 향해 손을 뻗는다. 당장이라도 불길로 달려갈 것 같은 아이를 맥스가 필사적으로 잡아챘다. 그의 눈도 충혈되어 있었다. 아무리 닉에게 불만이 쌓여 있었다고는 해도 오래된 사이인 것이다.
그 옆에는 다른 늑대의 송곳니 용병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도 착잡한 표정으로 닉과 동료들의 마지막을 눈에 담았다.
틸은 늑대의 송곳니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크와 함께 있었다. 그는 닉이 누워 있는 곳을 묵묵히 쳐다봤다.
“약속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문득 틸이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별 감흥 없이 장례식을 쳐다보고 있던 지크가 틸을 쳐다봤다.
“이걸로 엘리도 손가락질을 받지 않겠죠.”
여전히 맥스에게 붙잡힌 채 발버둥을 치는 엘리를 쳐다본다. 틸의 눈에 슬픔이 감돌았다. 하나 남은 가족인 아버지마저 사라진 엘리는 이제 천애의 고아가 된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범죄자의 아이라는 낙인은 찍히지 않을 터. 동료 용병들도 그녀를 안타깝게 죽은 동료의 아이로서만 대할 것이다.
“틸 씨는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겁니까?”
“용병단을 추슬러야죠. 피해가 너무 많이 나왔습니다.”
다행인 것은 그 대부분이 이번에 새로 받아들인 용병들이라는 것이다.
“아예 근본부터 다시 만들 생각입니다. 배신자가 너무 많이 나왔어요.”
나중에 받아들인 용병들은 어쨌든, 윌터와 엘리를 납치하려던 자들은 원래부터 있던 부하들이다.
“부하들의 모든 마음을 알아낼 수는 없겠죠. 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신뢰 가는 자들로만 용병단을 만들 겁니다.”
“예전의 늑대의 송곳니로 돌아가려는 거군요.”
틸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기만 해도 상당히 고된 일이 될 것 같군요.”
“그래서 당분간은 피알루에 머물 생각입니다. 다행히 도시에서 당분간은 계약을 연장하고 싶다 하니 그사이 용병단을 개편해야죠.”
전쟁은 끝났지만 혹시나 하는 상황에 대비해 피알루는 당분간 전력을 유지할 계획이었다.
“당신이라면 해낼 수 있겠죠. 응원하겠습니다.”
“지크 씨는 어쩌실 겁니까?”
“슬슬 이곳을 떠나야죠. 여행하는 중이니까요.”
피알루에서 얻을 건 다 얻었으니 이제 윈두르가 새로 가리킨 곳을 찾아야 했다.
“혹시 나중에 뭔가 일이 있다면 저희를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갚고 싶으니까요.”
“기억해두겠습니다.”
두 사람은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봤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