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9화
몬스터의 습격이 끝난 후 피알루의 사람들은 오랜만에 모든 근심을 벗어던진 채 기쁘고 즐거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건 나이, 신분, 지위, 성별에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극히 소수의 인원만은 지금 피알루를 감싸고 있는 즐거움과 정반대의 감정을 안고 있었다.
라라는 숙소에 돌아왔다. 숙소는 여전히 조용했다. 전쟁이 끝났다지만 도시가 예전 같은 활기를 완전히 되찾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다. 곧 있으면 이 숙소에도 다시 예전처럼 산맥 너머로 교역을 하려는 상인들이 북적댈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얼마 전보다 더욱 인적이 없었다. 그들과 함께 숙소를 사용하던 지크 일행이 시장이 제공해준 저택으로 옮겨 갔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숙소에 있는 자들은 그들 일행뿐이었다.
라라는 숙소의 계단을 올랐다. 길게 뻗은 복도를 따라 자신의 방문 앞에 섰다. 그녀의 시선이 그렌의 방문에 머물렀다.
그 사건 이후 그렌은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끼니도 거른 채 그저 하염없이 방에 틀어박혔다. 일행이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었다.
당연히 걱정되었다. 고작 몇 끼 정도 굶는다 해서 어떻게 될 그렌이 아니었지만 방에 틀어박히는 것 자체가 무슨 문제가 있다는 뜻 아닌가.
그렌에 대한 대부분의 희망을 놓아버린 라라였지만 걱정이 안 될 수는 없었다.
그래도 한때 사랑하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철컥!
잠금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그렌의 방은 아니었다.
“지금 들어오는 건가요?”
피나가 방에서 나왔다.
“네.”
그걸로 대화는 끝이었다. 서로 간에 침묵이 감돈다. 같이 행동하며 서로 목숨을 지켜줄 일행끼리 이토록 먼 거리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렌의 파티가 비정상적임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방에 처박힌 그렌이나 마음가짐을 완전히 새로이 한 라라와는 다르게 피나는 전투 이후로 별 변화가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차가운 얼굴을 한 채 냉기를 풀풀 날려댔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인 것은 아니었다.
“또 안 먹었네.”
피나가 그렌의 방문 앞에 쭈그려 앉았다. 라라는 그렌의 방문 앞에 간단한 식사가 담긴 쟁반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피나가 가져다 둔 모양이었다.
하지만 쟁반 위 식사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오늘도 안 나온 건가요?”
“그런가 봐요.”
피나가 방문을 쿵쿵 두드렸다.
“슬슬 나오는 게 어때! 언제까지 처박혀 있을 거야!”
그녀가 답지 않게 큰 소리를 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여전한 침묵뿐이었다. 몇 번 더 노크를 했음에도 마찬가지.
결국 피나는 포기했다.
“혹시 짐작 가는 이유라도 있나요? 브라우닝 씨는 그렌과 오래 여행을 했잖아요.”
“…아니요. 모르겠어요.”
그렌이 왜 방에 틀어박혔는지. 그리고 지금껏 알던 그렌이 정말로 그의 본 모습이 맞는지조차 몰랐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의 그렌은 라라가 반했던 그가 아니라는 점뿐이었다.
“도대체 왜 저러는지.”
피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파티의 리더인 그렌이 폐인처럼 생활을 하고 있으니 파티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다. 숙소에서 한 걸음만 밖으로 나아가도 사람들이 환한 얼굴로 온갖 소란을 피우고 있었지만, 이 숙소만은 음울하기 짝이 없었다.
“윈드네 씨는 어떤가요?”
그렌만큼은 아니지만 첼시도 전투 이후 상당히 변한 사람 중 하나였다.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다니긴 하지만 언뜻언뜻 비치는 초조감이 라라의 눈에는 보였다. 게다가 그녀도 방 안에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 있었다.
‘예전에는 툭 하면 그렌과 붙어 있었는데.’
“글쎄요. 요새 그 분도 본 적이 없어서.”
일행이란 작자들이 친근감도 없는 데다가 아무리 리더가 이상 증세를 보인다고 해도 서로 간에 관심조차 없다니.
‘정말로 이상한 파티였구나.’
자신의 일행에 대해 말을 하던 한스가 생각났다. 그때의 한스는 분명 즐거워 보였다.
“제 얘기를 하고 계신가요?”
그때 다른 방의 문이 열리며 첼시가 나왔다.
“뭔가 궁금한 점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녀가 라라를 보며 물었다.
“아뇨. 전투가 끝나고 얼굴을 본 지 오래 돼서요.”
“그건 그렇네요. 하지만 우리 리더가 방에서 나오질 않으니 어쩔 수 없죠.”
첼시가 그렌의 방문을 쳐다본다. 안타까운 표정이 그렌을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왜일까. 라라는 그녀가 얼핏 짜증을 내는 것처럼 보였다.
“브라우닝 씨는 요새 어딜 다니시는 건가요?”
하지만 자신에게 질문을 할 때의 첼시는 평소와 같았다.
“도시 밖을 순찰하고 있어요. 혹시라도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몬스터가 도시 주변을 배회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과연 브라우닝 씨. 혼자서라도 순찰을 하시다니. 카르나 님도 브라우닝 씨를 축복해주실 거예요.”
“확실히 부지런하네.”
첼시와 피나가 라라에게 감탄한다. 그에 라라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복도에서 여자 셋의 대화가 오고 갔다. 깊은 대화를 나누는 건 아니다. 같은 일행으로서는 경악스럽게도 얼굴만 아는 사람보다 살짝 친한 정도에 불과한 그녀들이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그런 대화에도 라라는 새로움을 느꼈다. 그렌을 빼고 세 명이서만 나누는 첫 대화인 것이다.
‘조금 즐거워.’
그렌의 파티에서 빠질 생각을 하고 있는 라라로서는, 이제 와 동료들과의 대화에 즐거움을 느낀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아이러니했다.
하지만 그 즐거움 때문에 라라의 마음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이제 곧 ‘전’ 동료들이 될 자들과 마지막 추억을 남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라라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첼시와 피나와의 대화를 즐겼다.
그러나 그건 오래 가지 않았다.
철컥!
문의 잠금쇠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대화를 나누던 세 여인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시선이 소리가 들린 곳을 향했다.
그렌의 방문이었다.
스으윽!
고급 숙소인 터라 평소 경첩에 기름칠을 많이 해 놓아서 그런지 방문은 소리도 거의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문틈으로 보인 방은 어두웠다. 한낮이라 숙소 밖은 햇볕이 쨍쨍하게 내리쬐고 있는 걸 생각하면 창문을 닫고 커튼까지 모조리 쳐 둔 모양이었다.
그렌이 문 밖으로 나왔다.
“그렌!”
라라가 그렌에게 다가갔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수염도 덥수룩하다. 평소 깔끔한 미남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평소와 같았다.
“어디 아픈 곳은 없어?”
그녀가 걱정 어린 투로 말한다. 그렌이 라라를 쳐다봤다.
순간, 라라는 한 걸음 물러섰다.
한쪽 구석에 있던 식사가 그녀의 발에 채여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엎어졌다. 빵은 짓눌리고 수프는 복도를 타고 흐르며 고기는 흩어졌다.
그러나 그 누구도, 심지어 걷어 찬 라라조차 식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최근 그녀는 그렌에게 좋은 시선을 받은 적이 없었다. 퉁명스럽고 싸늘한 시선과 그에 걸맞은 목소리가 항상 그녀를 향했다. 그러나 맹세코 지금과 같은 눈길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걸 뭐라고 비유해야 할까. 무심? 무정? 도저히 저 눈길을 설명할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건 있었다.
그렌은 더 이상 라라를 동료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그렌이 걸음을 뗐다. 마치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처럼 그렌은 라라의 옆을 지나쳐 첼시와 피나의 앞에 섰다.
“그, 그렌 씨?”
“그렌?”
현재 그렌의 행동에는 둘도 당황한 모양이다. 그녀들이 조심스럽게 그렌을 불렀다.
“잘 지냈어?”
그렌이 입을 열었다. 다행히 그의 목소리와 어투는 예전의 그것이었다.
“일단 사과를 먼저 할게. 말도 없이 방에 틀어박혀 걱정했지?”
“어, 어. 그렇긴 해. 이제 괜찮은 거야?”
마법사답게 가장 먼저 냉정을 찾은 피나가 물었다. 하지만 그녀라도 동요를 완전히 막을 순 없는지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괜찮아. 애초에 어디가 아픈 건 아니었으니까. 그저 생각할 거리가 있어서 말이야.”
“생각할 거리요?”
첼시가 물었다.
“그래.”
“그게 뭔가요?”
“첼시, 피나, 너희 둘 말이야. 명성을 얻고 싶지 않아?”
둘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당연히 얻고 싶지. 내가 마탑을 나온 이유가 우리 학파의 재건을 위해서니까. 그를 위해서는 마법 실력과 함께 명성이 필요해. 우리 학파의 나쁜 인식을 씻어버릴 정도의 커다란 명성이.”
“성직자로서 명성을 추구하는 걸 안 좋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저는 반대랍니다. 제 명성이 올라가는 만큼 카르위먼의 명성도 올라갈 거고, 그만큼 카르나 님의 빛을 따르려는 사람도 많아지겠죠. 따라서 저도 어느 정도의 명성은 갖고 싶어요.”
‘무엇보다 압도적인 명성이 있다면 루벨라를 끌어내릴 수 있어.’
한 명은 당당히, 한 명은 속마음을 숨기고 말했지만 둘 다 명성을 원하는 건 똑같았다. 그렌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명성을 올리기 위해 움직이자.”
그리고 살짝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렌?”
라라가 경악했다. 첼시와 피나도 적잖이 놀랐다. 지금껏 그렌은 엄연히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로서, 표면적으로나마 정의를 위해 움직였다.
그게 설혹 명분뿐이라고 해도.
하지만 지금 그렌이 하는 말은 그 명분조차 내던진다는 말과 같았다.
물론 그들은 그렌이 정말로 범죄 같은 것에 손을 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껏 그렌이 써 온 가면이 그런 인식을 방해했다. 그러나 그렌이 무언가 바뀌었다는 건 확실해 보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렌! 그건 옳은 일이 아니잖아!”
지금의 그가 자신이 생각하던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대놓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자고 나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렌과 눈이 마주쳤을 때, 라라는 숨을 삼켰다.
마치 거대한 암흑으로 가득 찬 동굴 같은 눈이다. 빛이라고는 일절 찾아볼 수 없는.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가 있는 것인가.
‘더 이상 그렌에겐 희망이 없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라라가 다른 이들을 쳐다봤다. 첼시와 피나. 아무리 그들이 명성을 바란다 하더라도 그렌의 저 말에 쉬이 찬성을 하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얼굴을 본 순간 라라는 자신의 마지막 희망마저도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을 받았다.
당혹감은 있지만 둘 다 그리 큰 거부감을 보이는 것 같진 않다.
거기서 라라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과 자신 사이엔 커다란 간극이 있다는 것을.
라라는 그렌의 정의감에 끌려, 사람들을 돕고 옳은 일을 행하기 위해 그렌과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그렌도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렌은 달랐다. 그리고 첼시와 피나는 지금의 그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건 그녀들과 라라가 여행을 하는 목적 자체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과 그렌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고 그렌과 첼시, 피나 사이의 연결고리가 강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렌….”
라라가 그렌의 이름을 부른다. 그녀의 목소리에 힘이 없다. 그렌의 눈이 라라에게 향한다.
그에 라라는 마지막 희망을 가졌다.
“아직 있었나.”
그 희망이 부서지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