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6화
“대책이라고요?”
라라가 눈을 깜박였다. 크레이터를 자세히 살폈다.
지크가 보였다.
익숙할 정도로 얼굴을 마주친 상대다.
게다가 그게 설령 부정적인 것일지라도 상당한 감정을 가지고 있던 상대였다.
이제 와 잘못 볼 리는 없다.
무엇보다 그가 들고 있는 나뭇가지 같은 검의 모습이 그가 지크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크레이터에는 지크뿐이었다. 지금껏 그들이 기대하던 몬스터의 대책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크의 등장과 함께 생겨난 거대한 크레이터는 한스의 말에 충분한 설득력을 부여했다.
“어떤 대책이죠?”
지크 일행은 대책이란 것을 철저하게 함구했다.
그건 한스도 마찬가지.
그도 대책이란 것이 어느 정도 예상은 간다는 언동을 보여줬지만 그 정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라라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대책이란 것에 대해 그리 많이 의심하진 않았다. 한스에 대한 신뢰가 높아진 이유였다.
하지만 궁금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이젠 그 대책이란 것이 실행될 테니 더 이상 비밀도 아닐 터.
과연 어떤 대책일까.
몬스터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수? 커다란 크레이터를 만들어 낼 정도의 강력한 아티팩트?
어쩌면 생각도 못 한 전혀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대책이 어떤 것이든 놀랄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한스가 답을 가르쳐줬을 때, 라라는 절로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요?”
“지크 님 그 자체가 대책이라고요.”
라라가 다시 눈을 깜박였다. 지크를 한 번 쳐다보다가 다시 한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크 씨요?”
“네, 지크 님이요.”
“지크 씨가 어떻게 대책이 되죠?”
“간단한 일입니다.”
그리고 한스는 터무니없는 말을 내뱉었다.
“지크 님이 다 때려잡으면 되는 일이거든요.”
“…네?”
순간 라라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지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한스는 그녀의 귀가 멀쩡하다는 것을 친절히 상기시켜 줬다.
“지크 님이 다 때려잡으면 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다 때려잡으면 되는 일이라니. 설마 지크 혼자 저 몬스터의 대군을 상대할 거라는 말인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드는 감정은 무책임함에 대한 실망감이다.
지크의 실력이 대단한 것은 알고 있다. 지금껏 몇 번이고 그가 전투하는 것을 봐왔으니까.
하지만 결코 이 엄청난 몬스터의 군세를 혼자서 감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실력이 있었다면 먼젓번에 있었던 몬스터 군단의 습격에서 보여줬을 것이 아닌가.
“압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자신의 피부에 박히는 라라의 시선이 아팠던 것일까. 한스는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굳이 믿으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한스는 손가락으로 지크를 가리켰다.
“어차피 곧 증명될 테니까요.”
한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갑자기 들린 폭음 때문에 잠시 움직임을 멈췄던 몬스터들이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쿠웅!
히드라 한 마리가 육중한 다리를 내뻗었다.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빠른 속도로 지크에게 달려드는 게 보였다.
아홉 개의 머리가 각각의 괴성을 내지르는 모습이 섬뜩하다.
그에 비해 지크의 움직임은 무척이나 미약했다. 몸을 돌려 정면으로 히드라를 마주 볼 뿐.
바람 앞의 등불 같다.
곧 히드라의 육중한 몸통에 깔리든 날카로운 송곳니에 꿰뚫리든 치명적인 독액에 몸이 녹아내리든, 그의 죽음은 기정 사실 같았다.
그러나 지크는 느긋하게 윈두르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서걱!
날카로운 절삭음이 주변을 울렸다. 달려오던 히드라의 몸통이 가로로 쪼개졌다.
다리는 아직도 열심히 대지를 달리고 아홉 개의 목들도 계속해서 이빨을 드러낸 채 괴성을 지르고 있었지만, 그것의 미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확실했다.
콰아아앙!
하체가 먼저 쓰러지고 상체가 땅에 떨어져 나뒹군다. 하지만 강렬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히드라의 목들은 아직까지 살아남아 주변에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서걱! 서걱! 서걱!
이번엔 세 번의 절삭음이다. 괴성을 지르며 여러 목을 활용하여 상체를 질질 끌어 오던 히드라의 움직임이 멈췄다.
후두두둑!
토막난 히드라의 목들이 조각나며 뜨거운 피와 함께 땅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지크는 그 모습을 힐끔 보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생명이 끊긴 히드라는 더 이상 지크에게 살기를 드러내지 못했다.
크아아아악!
캬아아아악!
히드라의 허무한 죽음에 몬스터들도 위협을 느낀 것일까. 아니면 자신들의 중앙에 떡하니 자리 잡은 작은 인간에 분노한 것일까.
몬스터들이 다른 이들을 두고 지크에게 덤벼들기 시작했다.
수십 마리의 고위 몬스터들이 포함된 수많은 몬스터들이 인간 한 명에게 달려드는 모습은 무척 장관이었다.
물론 몬스터들의 공격 대상인 인간에게는 끔찍한 광경일 것이다.
그러나 다음에 펼쳐진 장면은 사람들의 인식을 완전히 뒤트는 것이었다.
번쩍!
바실리스크의 눈이 빛나며 석화광선이 쏘아진다. 그에 대한 지크의 대응은 윈두르를 세로로 휘두르는 것이었다.
쩌억!
문자 그대로 빛이 갈라졌다.
석화 광선이 두 쪽으로 쪼개져 바실리스크의 반대편에서 돌진해오던 몬스터들을 돌로 만들었다.
당연히 지크는 일절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지크의 참격이 쪼개놓은 건 석화 광선만이 아니었다.
쿠웅!
바실리스크의 몸이 지면에 형편없이 나뒹굴었다. 그것의 몸체는 세로로 길게 쪼개진 상태였다.
그것의 앞쪽 지면에 새겨진 얇고 깊은 틈이 바실리스크의 몸이 어째서 쪼개진 것인지 알려주고 있었다.
지크가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윈두르에 마력을 한가득 불어넣어 휘두른다.
콰아아앙!
마력의 폭격에 몬스터들이 우수수 날아갔다. 몸이 성한 몬스터는 없었다.
적어도 다섯 조각 이상으로 분해되어 비산한 몬스터들이 마치 우박처럼 지면에 우수수 쏟아졌다.
콰아앙! 콰아앙! 콰아아앙!
그건 새까만 얼룩을 깨끗한 수건으로 닦아내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지면을 가득 메웠던 몬스터의 무리가 굉음이 한번 울려 퍼질 때마다 뭉텅이로 사라졌다.
몬스터란 얼룩이 지워지고 나온 건 새빨간 선혈의 지면이었다.
쿠워어어어어!
마구잡이로 몬스터들을 학살하던 지크의 앞을 타이탄이 막아섰다. 거대한 근육질의 팔이 지크를 덮쳤다.
지크는 윈두르를 마주 휘둘렀다.
콰아앙!
타이탄의 팔이 폭발했다.
단단한 가죽과 질긴 근육, 그리고 덩치에 어울리는 압도적인 괴력으로 적을 짓이기고 다녔던 타이탄의 팔이 마치 땅에 떨어진 계란처럼 연약해 보였다.
타이탄도 작은 인간의 반항에 자신의 팔이 박살 났다는 것에 놀랐는지 피가 펑펑 쏟아져 나오는 어깻죽지를 멍하니 바라봤다.
서걱!
타이탄의 몸통에 붉은색 선이 생겨났다.
쩌억!
대각선으로 그어진 선이 갈라지며 타이탄의 몸이 허물어졌다.
쿠웅!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타이탄답게 상체만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큰 소리가 났다.
하지만 더 이상 그것은 지크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지크의 매서운 눈이 다른 몬스터들을 훑었다.
쿠아아아!
크어어어!
사각뿔의 원혼으로 조종을 당하고 있는 탓일까. 아니면 몬스터 특유의 포악함 때문일까.
지크가 그토록 다른 몬스터들을 도륙하는 걸 보고 기세가 조금 줄어들 만도 하건만, 몬스터들은 여전히 살기를 가득 품은 채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건 불꽃에 뛰어드는 부나방과 다를 바 없는 행위였다.
* * *
“말했잖습니까. 곧 증명될 거라고.”
옆에서 한껏 자랑스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라라는 그 말에 대꾸할 여유가 없었다.
두 눈을 크게 뜬 채 지금 눈앞에서 보이는 광경이 현실인지 아니면 헛것인지 머리가 깨지도록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막을 떨어 울리는 폭음과 그때마다 선명하게 흩날리는 선명한 몬스터의 피. 그리고 피부를 자극하는 충격파에 그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광경은 분명한 현실이라고.
“어, 어떻게 된 거죠?”
라라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뒤집혀 있었다.
한스의 옷자락을 꽉 잡고 흔들며 대답을 재촉했다.
“지크 씨가 강한 건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잖아요!”
저건 강한 정도가 아니다. 옛날이야기 속에서나 나오는, 단신으로 군대를 초토화시켰다든지 성을 함락했다든지 드래곤을 사냥했다든지 하는 유의 무력이 분명했다.
그녀가 질문을 할 때도 지크에게 덤벼든 베히모스가 마치 아이들이 갖고 노는 공이 튕겨 나가듯이 허공으로 튕겨나가 찢기는 모습이 생생히 보였다.
“음,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한스는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저 상태의 지크에 대해서는 별로 숨길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지크 님도 저 힘을 별로 숨길 생각은 없으셨으니.’
“지크 님이 보유한 마력은 사람들의 인식을 초월할 정도로 많습니다. 지크 님도 현재 그 마력을 전부 일깨우지 못하셨는데, 특정한 조건을 만족시키면 그 마력을 모두 사용할 수 있죠.”
“저 모습이 모든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상태란 건가요?”
“그렇습니다.”
라라는 다시 지크가 싸우는 모습을 봤다.
이제 지크는 아예 타이탄, 베히모스, 바실리스크를 한 번에 상대하며 썰어버리고 있었다.
“아무리 모든 마력을 사용할 수 있더라도 대번에 저렇게 잘 사용할 수 있는 건가요?”
“그건 뭐, 지크 님이 천재라서 그렇다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군요.”
한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말이 되냐고 되묻고 싶은 라라였지만, 눈앞에 뚜렷한 증거가 보이고 있으니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그 조건이란 건 뭔가요?”
라라로서는 당연히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선 한스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클로원의 유적과 나무들에 관한 건 파티만이 공유하는 비밀이었다.
한스도 라라라는 인물을 적잖이 신뢰하게 됐지만 그것에 대해서 알려주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라라도 순순히 수긍했다.
잠든 마력을 모두 깨우는 방법이라니.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기술이다.
그 기술의 유용성을 생각해 본다면 당연히 남에게 알려주지 않는 비전일 게 뻔했다.
때문에 라라는 마력을 완전 해방하는 조건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어째서 저 대책이란 걸 말해주지 않은 건가요?”
저런 엄청난 대책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 피알루의 병사들도 의심에 휩싸인 채 전투에 임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피해가 조금쯤은 더 줄어들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 질문도 돌아온 한스의 대답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믿으셨겠습니까?”
“…그것도 그렇네요.”
라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 두 사람의 대화는 끊겼다. 그리고 조용히 지크에 의해 그 거대한 몬스터 무리가 해체되는 걸 지켜봤다.
간간이 두 사람에게 달려드는 몬스터가 있었지만 그들은 쉽게 그것들을 퇴치했다.
고위 몬스터는 이미 대부분 지크에게 죽어 있었다.
피알루의 병력들도 몬스터들을 밀어붙이고 있다.
전투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