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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434화 (434/628)
  • 제434화

    피알루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어쩌면 피알루의 마지막이 바로 앞에 있을지도 모르니 당연한 일이었다.

    곧 들이닥칠 엄청난 몬스터의 대군. 거기에 대항하는 희망이라는 건 라일라가 말한 지크의 대책뿐이다. 그것도 그 대책이란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조차 알려주지 않은 상황.

    만약 지금이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지크가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가 아니었다면 정신 이상자 취급을 받고 욕 처먹으며 쫓겨났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피알루는 지크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납득을 한 건 아닌 터라 종종 불만이 터져 나오긴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계획을 바꿀 수도 없었다.

    사람들은 각오를 다졌다.

    얼마 후, 저 멀리서 거뭇거뭇한 그림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척이나 작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그림자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꾸물거리며 늘어나는 그림자의 크기가 마치 혀를 내밀며 비웃음을 흘리는 요사스러운 괴물 같았다.

    “왔군.”

    성벽에서 스산한 눈으로 저 너머를 보고 있던 사령관이 말했다. 옆에 있던 병사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오지 말았으면 한 상황이 기어코 당도했다.

    “병사들을 준비시켜라. 용병들에게도 알리고.”

    “네!”

    부관이 옆에 있던 병사에게 이것저것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사령관은 저 멀리 보이는 몬스터의 군단들을 똑바로 노려봤다.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고.”

    물러 설 곳은 없다. 사령관은 허리춤에 찬 칼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 * *

    성벽 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창병들이 성가퀴 뒤편에 나란히 정렬했고 궁수들은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용병들도 본인의 무기를 잡고 준비를 했고 마법사들과 신관들도 지팡이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어쩌면 이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자들이라 할 수 있는, 고위 몬스터들이 성벽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시선을 끌 임무를 부여받은 자들도 각자의 준비를 끝냈다.

    라라는 검집을 꽉 잡았다. 검은 그림자로만 보이던 몬스터들의 형체가 점점 더 구체화되고 있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몬스터 군단의 박력도 거대해졌다.

    “꿀꺽!”

    옆에 있던 병사 한 명이 침을 삼켰다. 자신의 침 삼키는 소리가 너무 커 병사가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떻게 보면 무척 웃긴 장면이었지만 웃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만큼 사람들은 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라라도 마찬가지.

    그렌에게 자신도 고위 몬스터를 상대한다고 했을 때, 그렌의 반응은 예상한 대로 좋지 않았다. 그는 뚜렷하게 반대 의사를 밝혔다. 예전에는 이럴 때 마치 아이를 어르듯 부드러운 말투를 사용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딱딱한 말투로 한심하다는 듯 말을 할 뿐이었다.

    【넌 그럴 실력이 안 돼.】

    그리고 못마땅한 듯 그녀가 차고 있는 검을 쳐다봤다.

    아직도 그렌은 라라가 주무기를 방패로 바꾸지 않은 것에 대해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라라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도 하고 싶어. 그리고 내 실력이 그리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라라가 그렇게까지 반항을 하는 건 처음인 터라 그렌은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윽고 쌀쌀맞게 말했다.

    【그럼 마음대로 해.】

    그 후, 그렌은 철저하게 라라를 무시하고 첼시와 피나를 상대로만 작전 회의를 했다. 라라도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이유를 찾지 못해 그렌의 방을 나왔다.

    하지만 바로 고위 몬스터를 상대하는 역할을 맡을 순 없었다. 지금 라라의 위치는 어디까지나 그렌의 파티원. 사령관에게 직접 고위 몬스터를 상대하는 역할을 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도 믿는 구석은 있었다.

    “준비는 됐습니까?”

    성벽을 돌아다니던 한스가 라라에게 말을 걸어왔다.

    한스는 지크의 파티원이기도 하지만, 뛰어난 실력 덕에 그 본인도 도시에서 상당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런 한스의 추천이라면 사령관도 귀담아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한스의 추천으로 라라는 고위 몬스터를 상대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누가 봐도 지크와 사이가 좋지 않은 그렌이 어떤 생각을 할지는 잘 모른다. 아마도 좋은 기분은 아닐 터.

    그러나 지금 라라는 최근 그 어느 때보다 열의에 불타고 있었다.

    “준비 됐어요.”

    “제가 예전에 말한 대로 당신은 강합니다. 그러니 자신감을 가지세요.”

    “네!”

    사람에게 신뢰를 받는다는 게 이렇게 좋았던가. 라라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크오오오오오오!

    앞장서서 달려오던 오거가 크게 울부짖었다. 그게 신호라도 되는 듯 다른 몬스터들도 일제히 괴성을 내기 시작했다.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피부가 저릿저릿 떨린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약과였다. 몬스터 무리의 중앙에 있는 고위 몬스터들이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하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악!

    끼에에에엑!

    마치 인간의 심령을 쥐어짜는 듯한 소리다. 고위 몬스터들의 괴성에 심약한 병사들이 무기를 놓치거나 심지어 주저앉기까지 했다. 지휘관들이 그들에게 욕설을 내뱉으며 무기를 쥐어주고 일으켜 세운다. 하지만 겁에 질린 눈동자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숫자가 줄긴 했군.”

    예전에 그렌이 말해줬던 몬스터의 숫자를 되새기며 사령관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라일라의 사각뿔의 원혼이 아예 효과가 없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도시에 위협스럽기 짝이 없는 숫자인 건 여전했다.

    “신호를 줘라.”

    옆의 부관이 큰 소리로 다른 병사에게 명령했다.

    둥! 둥! 둥! 둥!

    전장에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죠.”

    “네!”

    한스와 라라가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한 명 한 명이 피알루의 실력자들로, 고위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일을 맡은 자들이었다.

    한스와 라라는 바로 몬스터 무리로 파고들었다

    번쩍!

    빛이 번뜩이며 앞장서 달려오던 오크와 트롤이 토막 났다. 다시 한번 번뜩인 빛에 뒤에 있는 오거가 두 동강 났다.

    ‘역시 대단해.’

    한스의 뒤에서 몬스터를 베던 라라가 그 모습을 경이롭게 쳐다봤다. 슬슬 라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확실히 그렌보다도 한스가 더 강하다고.

    ‘그럼 저 사람에게 검술을 가르쳤다는 지크란 사람은 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거야?’

    간간이 본 무력만으로도 지크가 엄청난 실력자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자신의 인식을 몇 단계는 더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둘은 순식간에 몬스터의 무리를 뚫고 고위 몬스터가 모여 있는 곳으로 도착했다.

    쿠웅!

    타이탄이 내디딘 한 걸음에 마치 주변에 지진이라도 난 것 같다. 그림자만 보면 언뜻 산으로도 착각할 것 같은 거대한 덩치에 겁도 난다.

    그러나 라라는 물러서지 않았다. 검을 꼭 쥐고 그녀가 몬스터들을 향해 덤벼들었다.

    * * *

    콰앙!

    “윽!”

    바실리스크가 휘두른 꼬리를 막아선 토르니움에서 강렬한 충격이 올라온다. 그렌은 인상을 찡그렸다.

    투확!

    기다란 송곳니에서 마치 분수처럼 쏘아진 독액이 그렌을 노린다. 그렌은 급히 몸을 옆으로 피했다.

    치이이익!

    끄아아아악!

    꾸에에에엑!

    독액에 맞은 몬스터들이 비명을 지르며 녹아갔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 피알루의 사람들은 꽤 성공적으로 도시를 방어하고 있었다. 일반 병사들은 성벽에 의지해 올라오는 몬스터들을 떨궈냈고 피알루에서도 강자로 뽑힌 사람들은 몬스터 무리 안에서도 고위 몬스터들을 능숙하게 유인해 도시에 접근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곧 한계다.’

    전력의 차이가 너무도 컸다. 슬슬 피해가 누적되어 가는 상황. 언제 어느 쪽이 무너질지 모른다.

    하지만 그렌에게 그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 대책이라는 건 언제 쓸 생각이지?’

    대책은커녕 지크조차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뭐, 이렇게 도시가 무너져도 나는 나쁘지 않지만.’

    그러나 거슬리는 게 하나 있었다.

    콰아앙!

    근처에 있던 타이탄이 커다란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건 애꿎은 다른 몬스터들을 짓이겼을 뿐, 목표를 죽이진 못했다.

    번쩍!

    에스텔레이드의 빛이 타이탄의 시선을 끈다.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직도 웬 빌어먹을 놈이 에스텔레이드를 휘두르는 꼴을 보는 것이 유쾌하진 않지만, 그것보다 더 불쾌한 모습이 보였다.

    콰앙!

    한스와 연계를 맞춰 타이탄의 발목을 때리는 라라의 모습이 보인다. 토르니움을 잡은 그렌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도 고위 몬스터를 상대하는 역할을 맡겠다는, 평소에 하지 않는 그녀의 반항적인 행위에 약간의 당혹감과 심한 불쾌감을 느꼈었다. 때문에 마음대로 하라고 했었다. 어차피 그녀가 그런 주장을 한다고 해봤자 지휘부의 허락이 없다면 그녀 성격상 함부로 움직이진 못할 테니까.

    한데, 설마 지크의 부하에게 부탁을 해서 추천을 받을 줄이야.

    불쾌하다 못해 이가 갈릴 일.

    아무리 이번 시간선에서는 눈 밖에 났다지만 라라 브라우닝은 ‘그의 것’이었다. 한데 저렇게 자기 멋대로 움직일 줄이야.

    ‘그러고 보니 지금이 기회 아닌가?’

    한스라는, 그의 계획에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은 놈 하나 퇴장시키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게 ‘자신의 에스텔레이드’를 앗아간 도둑놈이라면 더더욱. 전장에 죽음이란 언제나 돌아다니는 것이고 여기는 은근슬쩍 죽일 수단도 많다.

    카아아악!

    그렌은 자기에게 덤벼드는 바실리스크를 마주보며 살짝 옆으로 움직였다.

    콰앙! 콰앙! 콰앙!

    난동을 부리듯 몸을 들이받는 바실리스크를 피해가며 반격을 하는 것처럼 검기를 쏘아낸다. 하지만 검기의 목표는 바실리스크가 아니라 다른 몬스터들이었다.

    어느새 그렌을 쫓는 몬스터들이 많아졌다. 그는 은근슬쩍 그 몬스터들을 한스 쪽으로 몰았다. 쓰잘데기없이 무수한 경험 덕에 그렌의 움직임은 무척이나 교묘했다.

    한스뿐만 아니라 라라까지 죽을 수 있지만, 그렌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이번 시간선에서 라라는 올바르게 완성되지 못할 거야.’

    자신의 뜻대로 키우는 라라만이 올바르다는 무척이나 삐뚤어진 생각.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다른 남자에게 물든 여자 따위는 필요 없어!’

    콰아앙!

    마지막으로 몬스터의 신경을 건드리고 그렌은 몸을 뺐다.

    크아아아아!

    쿠어어어어!

    화가 난 몬스터들이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주변에 분노를 쏟아낼 대상을 찾았다. 그들의 눈에 보인 건 한스와 라라였다.

    콰아앙!

    베히모스가 그 커다란 몸집으로 육탄 돌격을 가한다. 한스와 라라가 급히 몸을 뺐다. 그 뒤를 바실리스크의 석화의 광선이 지나갔다. 타이탄과 히드라도 굉음을 울리며 둘에게 다가갔다.

    라라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아무리 그녀라고 이런 무지막지한 공격에는 기가 질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괜찮습니까?”

    한스가 그녀의 곁에 다가와 물었다.

    “힘들 것 같으면 물러서도 됩니다.”

    “…나라면 충분히 활약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능력이라면 충분할 겁니다. 하지만 마음가짐은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요.”

    “후후, 그건 그렇네요.”

    라라의 표정은 아직 창백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엔 다시 의지가 돌아와 있었다.

    “사람들을 구하는 일이에요.”

    그녀가 검을 고쳐 잡았다.

    “여기서 주저앉을 순 없죠.”

    “동감입니다.”

    그리고 둘은 사방에서 짓쳐들어오는 몬스터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 * *

    한스와 라라에게 몬스터를 떠넘긴 그렌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른 몬스터를 상대하고 있을 때였다.

    콰아아앙!

    커다란 빛의 격류가 흘렀다. 심상치 않은 마력이 폭발하며 굉음을 울렸다.

    한스와 라라가 있던 곳이다. 그렌이 살짝 인상을 찡그린 채 그곳을 쳐다봤다.

    ‘설마 빠져나오는 건 아니겠지?’

    자신의 노고가 헛수고가 되는 꼴이 반가울 리 없다

    그때, 그렌의 눈에 뭔가가 날아오는 것이 잡혔다.

    콰직!

    그것은 휘황찬란한 빛을 내비치며 그의 바로 앞 지면에 꽂혔다. 그렌은 바로 알아봤다.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 그건 그의 상징인 검이었으니까.

    ‘에스텔레이드!’

    이번 시간선에서 잃어버린 검. 웬 도둑놈에게 빼앗긴 검.

    ‘그놈이 죽은 건가?’

    그렇다면 너무도 반가운 일이다. 짜증만 나는 근래의 일들의 보상이 아닐까.

    생각할 것도 없이 그렌은 토르니움을 내팽개쳤다. 그리고 에스텔레이드의 손잡이를 잡았다.

    ‘결국 나에게 돌아왔어!’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용사라는 뜻임이 분명하다. 그렌은 오랜만에 에스텔레이드의 감촉을 느끼며 팔에 힘을 주었다.

    덜컥!

    “응?”

    그렌의 눈에 당혹감과 경악이 치솟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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