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3화
지크가 대비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피알루에 있어서 가장 좋은 건 애초에 몬스터들이 피알루를 습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그런 희망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몬스터들을 제거하기 위해 사각뿔의 원혼을 들고 데네스트 산맥으로 라일라가 향했다. 아무래도 고위 마법사답게 마력의 운용이 능숙한 라일라가 사각뿔의 원혼을 조금 더 잘 사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라일라는 텔레포트가 있으니 몬스터 무리들의 이동을 발견하면 바로 귀환할 수 있다는 이점도 컸다.
그런 라일라가 본 것은, 산맥에서 내려와 피알루를 향해 똑바로 진군하고 있던 몬스터 무리였다.
“결국 그렇게 됐나.”
사령관은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한탄했다. 가장 피했으면 했던 상황이 현실감을 두르고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사각뿔의 원혼은 통하지 않았소?”
사령관은 거의 애원하는 어투로 라일라를 향해 물었다.
“통하긴 했어요. 몬스터들의 행렬이 흐트러졌거든요. 강한 몬스터가 약한 몬스터를 죽이거나 잡아먹는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고요.”
“그럼 몬스터들을 자멸시킬 수도 있지 않겠소.”
사령관이 반색했다. 하지만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라일라도 진작에 했을 것이다.
“영향은 그게 끝이었어요. 분명 완벽히 통솔되는 몬스터 군단보다 전력이 떨어지긴 할 테지만 녀석들이 피알루에 도착할 거라는 건 분명해요.”
“적이 갖고 있다는 사각뿔의 원혼 때문이오?”
“아마도요.”
“하지만 둘 다 같은 사각뿔의 원혼이라면 적어도 절반 정도는 통솔할 수 있는 것 아니오?”
“쉽게 생각하면 일리 있는 말이지만 우리는 사각뿔의 원혼에 대해 잘 알지 못해요. 사각뿔의 원혼을 다루는 숙련도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고 적이 가지고 있는 사각뿔의 원혼이 더 많을 수도 있죠.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전혀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요.”
“결국 몬스터의 침공에 대비를 해야 한다는 소리군.”
“맞아요. 하지만 너무 걱정 마세요. 곧 지크가 올 테니까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정말로 그러길 바라오.”
사령관은 결심을 굳히고 앞으로의 대비책을 세우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났다.
* * *
회의가 열렸다. 회의에는 틸을 수색하기 위해 주변을 순찰하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불려 나와 있었다. 더 이상 틸의 수색엔 의미가 없기에 약속된 봉화를 이용하여 그들을 모두 불러 모았던 것이다.
회의실은 짙은 적막감에 젖어 있었다. 자리에 떡 하니 앉아 있는 틸을 놀람 반, 경계 반으로 보고 있던 사람들이 지금은 전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그만큼 사령관이 한 말의 반향은 컸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크 씨가 올 때까지 최대한 피해를 막아야 하오.”
침묵에 젖은 공간으로 사령관의 단호한 말이 울려 퍼졌다.
“언제까지 버티면 됩니까?”
용병 한 명이 질문을 했다. 그에 사령관은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모르오.”
“모르면서도 그냥 버티라는 겁니까?”
“그럼 다른 방법이 있소?”
용병은 대꾸하지 못했다.
“어차피 피난을 시키려고 해도 늦었소. 이젠 지크 씨의 말을 믿는 수밖에.”
“그럼 방법이라도 알려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새롭게 말을 한 사람은 그렌이었다. 그도 지금의 상황에 상당한 위협을 느끼는지 평소답지 않게 얼굴이 살짝 굳어 있었다.
그의 시선이 라일라에게 향했다.
“라일라 씨는 지크 씨의 해결책이 어떤 건지 알고 있다고 하셨죠?”
“그래요.”
“그렇다면 그 해결책이 뭔지 알려주시죠.”
“가르쳐드릴 수 없어요.”
“…지금 말할 수도 없는 방법을 믿고 목숨을 걸라는 겁니까?”
“말하자면 그렇네요.”
콰앙!
그렌이 탁자를 크게 내려쳤다. 폭력적인 행동에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렌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얼핏 보면 라일라의 행동은 책임감이라곤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모르는 겁니까!”
“그렇다면 제너드 씨는 대안이 있나요? 있다면 가르쳐 주시죠. 타당하다면 그쪽 걸 쓸 테니까요.”
“아니, 그저 그 대책이란 걸 말해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렌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아마 저게 그 몬스터 군단에 대한 해결책일 거야.’
그렌이 부하들을 이용해 닉과 접촉할 수밖에 없게 만든 이유.
약속된 시간까지 부하들이 돌아오지 않은 터라 그렌은 틸과 닉에 대한 공작을 실패로 단정 지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피알루를 박살내서 지크가 피알루에서의 공적을 주장할 수 없게 만드는 것.
틸이 사각뿔의 원혼을 가지고 왔을 때는 경악을 했었다. 부하들을 향해 무능한 놈들이라고 속으로 얼마나 욕을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상대가 사각뿔의 원혼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몬스터들을 부리는 건 가능했다. 몬스터들에게 아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각뿔의 원혼 하나만을 각인시킨 것이다. 준비도 많이 들고 부릴 수 있는 몬스터의 숫자도 적어지는 데다가 다른 사각뿔의 원혼에 아주 영향을 받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남은 건 저 대책이란 것뿐이야.’
그러나 그 대책이란 걸 알고 있는 것 같은 라일라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자신의 선량한 이미지를 소모하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강하게 밀어붙여 봤지만 라일라는 입을 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당신의 말에 따르지 않겠다면?”
“그럼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 말엔 그렌도 할 말이 궁했다.
“사람들을 피난시키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회의에 참석했던 한 지휘관이 의견을 냈다. 하지만 라일라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늦었어요. 경솔하게 사람들을 도시 밖으로 움직였다가 몬스터가 들이닥치면 오히려 더 큰 피해가 날 거예요.”
“…그럼 지크 씨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겠군요.”
지휘관의 말에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피알루의 의향은 정해졌다.
* * *
라라는 오랜만에 숙소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우니 며칠 동안 야숙을 한 피로가 쭉 풀리는 것 같다.
지금껏 그녀는 한스와 함께 틸의 수색을 하고 있었다. 도시에서 순찰이랍시고 어슬렁거리는 것보다는 분명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피로 속에서도 즐거움을 느꼈다.
그렌의 무시 속에서 파티 활동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보람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한스와 같이 일한 것도 굉장히 좋은 경험이었다.
몇 번의 만남으로 그가 상당히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란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 생각이 이번에 상당히 구체화되었다.
수색이란 것은 상당히 지루한 일이다. 발견될지 안 될지도 모를, 무의미한 짓이 될 확률이 높은 일을 꾸준히 해야 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한스는 그 일을 무척이나 성실하게 행했다. 그리고 혹 몬스터들을 발견하게 되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라라에 대한 배려심도 좋았다.
그 모든 것에 힘입어 라라는 정말로 오랜만에 마음 편한 며칠을 보냈다.
하지만 그 기간은 무척이나 짧았다. 도시의 옆 산에서 귀환을 명령하는 봉화가 피어오른 걸 본 순간, 라라는 무척이나 실망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잃어버린 자신을 찾을 계기가 됐길 바랍니다.】
도시에서 헤어질 때 한스가 한 말이었다. 그의 말대로 요 며칠간은 막 여행을 떠날 때의 자신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하지만 원래의 파티 소속으로 돌아 온 지금은 마치 그 기분이 오래전 빛바랜 추억을 들먹이는 것처럼 멀리 느껴졌다.
똑! 똑! 똑!
“브라우닝 씨! 그렌 씨가 부르세요!”
첼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렌이 파티를 소집한 모양이었다.
예전엔 그렌이 직접 그녀를 부르러 왔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가 라라의 방문을 두드리는 일이 뚝 끊겼다.
라라는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문밖엔 아무도 없었다. 첼시는 이미 그렌의 방으로 향한 것 같았다.
같은 동료라면 이때 라라가 나오길 기다려 같이 가는 게 보통 아닐까. 하지만 라라는 익숙했다.
그렌의 방문 앞으로 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렌과 첼시, 피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마지막인 모양이었다. 라라는 익숙하게 의자 하나를 빼서 앉았다.
파티의 모든 인원이 모이자 그렌이 방금 전 있었던 회의의 설명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지크란 사람의 말만 믿고, 언젠지도 모를 시간까지 몬스터를 막아야 한다는 건가요?”
첼시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무 무책임한 발언이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미 결정된 사안이니 우리도 따라야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그렌도 상당히 고민을 했지만 결국 그는 최전방에서 몬스터를 막기로 결정했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지크가 말한 대책의 존재였다.
‘어떤 건지 봐야 해.’
이래저래 변수가 엄청난 시간선이니 상상도 못한 대책일 수도 있다. 훗날을 위해서도 반드시 알아둬야 할 정보였다.
‘어쩌면 방해가 가능할 수도 있고.’
그렇다면 피알루는 그렌의 희망대로 괴멸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오히려 좋은 일이지. 피알루 괴멸의 책임을 녀석한테 돌릴 수 있으니까.’
게다가 지금 그렌이 쌓은 이미지라면 당연히 몬스터와의 전면에 나서야 하는 것도 있다.
어느 모로 보나 그렌이 이번 전투의 선봉에 서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혹시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아닐까요? 갑자기 늑대의 송곳니 단장을 데려온 것도 이상하잖아요. 그 사람이 제일 강력한 용의자였는데.”
안 그래도 지크에게 악감정이 있던 첼시는 기회를 잡았다는 듯 지크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다. 물론 겉으로는 조심스럽게 의문을 제기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럴 리가 있나.’
마음속으로 그렇게 빈정거린 후, 라라는 깜짝 놀랐다. 설마 자기가 지크의 편을 들 줄이야. 원래 그녀는 지크를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지 않았는가.
아무래도 한스에게 받은 호감이 그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지크에게도 옮겨간 모양이었다.
라라가 스스로에게 충격을 받고 있을 때 그렌이 말을 했다.
“증거는 없어. 섣부른 의심은 피해야지.”
그렌이 원칙적인 말로 대꾸했다. 하지만 그가 탐탁지 않아 한다는 건 모두 알 수 있었다.
“어쨌든 도시의 방침은 정해졌으니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해야 해.”
그렌은 첼시와 피나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처럼 성벽 위에서 지시를 따라 줘. 피나는 마법을 사용하고 첼시는 부상자들을 회복해 줘.”
“응.”
“알았어요.”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라라는 성벽 위에서 올라오는 몬스터들을 죽여 줘.”
“그렌, 너는?”
“실력이 좋은 사람들은 성벽 아래로 내려가 고위 몬스터들을 맡기로 했어. 녀석들이 성벽에 붙는다면 성벽이 무너질 가능성이 크니까.”
지금까지는 묵묵히 그렌의 명령에 따랐을 것이다. 그가 리더라는 명분에 숨어 자신의 의견을 외면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라라는 좀 달랐다.
“나도 성벽 아래로 내려가면 안 돼?”
“…라라 네가?”
뜻밖이라는 듯 그렌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그다지 유쾌한 표정은 아니었다. 라라가 멈칫했다. 하려는 말이 입에서 맴돈다. 예전처럼 그저 수긍하고 넘어가고 싶다.
하지만 오늘, 라라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응. 내 실력 정도면 고위 몬스터들을 막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당신은 강합니다, 브라우닝 씨.】
헤어지기 전 한스가 한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