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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432화 (432/628)

제432화

틸은 긴장했다. 그의 앞에 거대한 피알루의 성벽이 보인다.

예전에는 언제나 드나들 수 있는, 무척이나 믿음직한 존재였지만 지금은 자신을 한아름에 삼켜버릴 괴물같이 보였다.

아직 틸의 수배는 풀리지 않았을 테니 들어가는 순간 바로 포박을 당할 것이다. 사정을 설명하려 해도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무죄요!’라며 무턱대고 들어가는 건 정답이 아닌 것 같다. 시간이 충분하다면 오해를 풀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 시간이 부족할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틸은 각오를 굳히고 피알루로 걸어갔다. 믿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었다.

【성문에 가면 제 동료가 있을 겁니다.】

혹시나 이런 일이 있을 것 같아 준비해뒀다는 지크. 그녀를 통해서라면 충분히 틸의 발언도 설득력을 얻을 것이라 했다.

‘지크 씨가 같이 와주는 게 최고다만.’

지크는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준비를 위해 이탈을 한 상태였다.

피알루의 성문에는 점점이 사람이 다니고 있었다. 피난을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간간이 위기는 곧 기회라는 이념하에 상행을 하는 배짱 좋은 사람들도 보였다. 그리고 당연히 무장을 한 사람들도 보였다.

대부분 몬스터가 오는지 순찰을 하러 나가거나 돌아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틸을 유심히 쳐다봤다. 그의 얼굴은 이미 도시에 널리 퍼져 있었다. 거대한 덩치가 특징적이라 사람들 사이로 숨어들지도 못한다.

당연히 틸을 잡으러 와야 했지만 의외로 그들은 머뭇거리기만 할 뿐, 틸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도시 근처에서 당당하게 걷고 있는 틸의 행동 때문에 그가 정말 틸인가 확신하지 못한 것이 하나의 이유였고, 그의 막강한 무력이 두 번째 이유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틸을 그냥 놔둔 건 아니었다. 혹시나 틸이 도망가지 못하게 조용히 틸을 포위한다. 몇 명은 도시에 틸의 존재를 알리러 달려갔다.

“단장?”

익숙한 목소리에 틸의 고개가 돌아갔다.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맥스!”

닉의 협박 때문에 피알루를 떠난 후 보지 못했던 맥스가 거기 있었다.

“네 얼굴이 이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는데.”

흉터가 있는 험상궂은 얼굴이 잘생겨 보이기까지 한다. 틸은 자신이 무척이나 고생을 했다는 걸 그때 확연히 인식했다.

맥스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아니, 어떻게 된 겁니까! 단장이 배신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수배서까지 나돌고 있는 형국이요!”

“안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나중에 전부 말해 주마. 지금은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어.”

“급한 일?”

심하게 틸을 경계하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맥스는 틸의 옆에 바짝 따라붙었다. 그의 신뢰가 느껴져 틸은 긴장이 조금은 덜어졌다.

하지만 맥스가 온전히 틸을 믿는 건 아니었다. 그의 손은 언제든 도끼를 꺼내들 수 있는 위치에서 맴돌고 있었다.

“아니, 단장이 몬스터를 끌어들였다는 의심보다 더 급한 일이 뭐가 있다는 거요!”

“그런 게 있다.”

“젠장! 닉 부단장이 용병들 일부를 데리고 사라진 것도 골치 아픈데 이 인간이 대답도 안 해주네!”

하지만 투덜거림과 달리 맥스의 음성은 꽤 밝았다. 틸이 스스로 도시로 돌아온 것을 보며 그에게 씌워진 의혹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닉의 화제가 나오자 틸은 마음이 불편했다.

두 사람은 성문에 도착했다. 성문에는 상당한 수의 병사들이 모여 틸을 경계 어린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근처에 당장 동원할 수 있는 병사들이 모두 동원된 것 같았다.

“늑대의 송곳니 용병단 단장, 틸이 맞나?”

가장 높은 지위를 갖고 있는 기사가 나와 물었다.

“그렇소.”

“널 체포하겠다. 경고한다만, 반항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기사의 목소리에 긴장과 미약한 공포가 느껴진다. 틸의 힘을 안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앞에서 이렇게 당당히 말을 하는 것 자체가 기사의 심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름 호감이 가는 상대였지만 틸은 그 말에 따라줄 수 없었다.

“그럴 시간 없습니다. 날 시장에게 안내해 주십시오. 사령관이라도 상관없습니다.”

“헛소리! 너는 지금 이 사태의 중요한 용의자다! 그런 자를 시장님이나 사령관님께 데려갈 수 있을 리가 있나!”

‘역시 이렇게 되나.’

이미 예상한 일이다. 틸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마력을 담아 쩌렁쩌렁 외쳤다.

“지크 씨가 보내서 왔습니다! 이미 얘기는 되어 있다고 하던데!”

갑자기 틸이 소리치자 주변 사람들이 화들짝 놀랐다. 기사들이 검을 빼들었고 병사들이 창을 겨눴다. 맥스도 놀라 도끼를 반쯤 뺀 채 몇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틸이 공격하려는 낌새는 없었다.

“지금 뭘 하는…!”

기사가 호통을 치려 할 때였다.

“잠시만요.”

유려한 미성이 들린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했다.

“…라일라 씨?”

거기엔 지금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들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라일라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기사와 병사들을 지나쳐 틸에게 향했다.

“어, 어! 위험합니다!”

기사가 그녀를 만류했지만 그녀의 발걸음을 막을 순 없었다. 라일라가 틸의 앞에 섰다.

“지크가 보내서 왔다고요?”

“그렇습니다.”

“틸 씨의 사건은 잘 해결된 모양이군요.”

“네.”

라일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기사를 바라봤다.

“틸 씨를 사령관님께 안내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다른 사람이라면 그게 무슨 헛소리냐며 크게 성을 내며 쫓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도시의 영웅 중 한 사람이다.

“그, 그자는 피알루를 위험으로 몰고 간 혐의를 받고 있는 용의자 아닙니까! 취조도 하지 않고 사령관님께 데려간다는 건 좀….”

“틸 씨는 누명을 쓴 것에 불과해요.”

“누명이요?”

기사가 놀랐다. 주변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도 웅성거렸다.

“그래요. 정확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드릴게요. 시간이 없거든요. 틸 씨가 지크와 동행도 하지 않고 혼자서 왔다는 말은 사태가 상당히 급박하다는 증거예요.”

“그렇습니다.”

몬스터의 습격이 당장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말을 할 순 없었다. 듣는 이가 너무 많았다. 괜히 그런 말을 흘렸다간 도시에 혼란만 가중될 수 있다.

하지만 기사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라일라가 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마 지크가 드린 게 있을 텐데, 주시겠어요?”

틸은 고개를 끄덕이고 지크가 헤어지기 전 주었던 것을 꺼냈다. 그건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를 상징하는 브로치였다. 라일라는 그걸 성기사에게 내밀었다.

“카르위먼 명예 성기사의 증표예요. 지크가 이걸 틸 씨에게 줬다는 건 카르위먼 명예 성기사로서 책임을 지겠다는 뜻이죠. 이래도 부족하신가요?”

“…알겠습니다. 안내하죠.”

결국 기사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 * *

“으음!”

사령관은 신음을 흘리며 틸을 바라봤다. 갑자기 자신의 앞에 수배자가 떡 하니 나타난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가 한 말은 더더욱 경악스러웠다.

그는 아들을 인질로 잡혀 협박을 당했을 뿐이고 진짜 범인은 따로 있었으며 지크의 협력을 받아 인질들을 구하고 범인들 중 일부를 해치웠다.

그게 틸이 한 말의 요약이었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니, 조사를 해 봐야겠지만 사실이라면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틸이 그 뒤에 꺼낸 얘기였다.

“그러니까 몬스터들이 피알루로 진군할지 모른다고 하셨소?”

“그렇습니다.”

지금껏 온갖 난리를 피우며 틸을 찾아 헤맨 이유가 무엇이던가. 그가 몬스터들을 이용해 피알루를 습격할 것이라는 의혹 때문이었다. 한데, 그 노력도 무의미하게 몬스터가 피알루를 향해 진군할 것이라니.

“그래도 지크 씨는 별로 걱정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해결책이 있다고 했죠. 게다가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높을 뿐, 몬스터들의 습격이 일어날 거라고 정해진 것도 아닙니다.”

“그건 다행이오만….”

“하지만 해결책은 시간이 좀 걸린다고 했습니다. 때문에 만약 몬스터가 정말로 침공을 한다면 어느 정도 시간을 벌어야 한다더군요.”

틸이 몬스터들이 있는 곳이 아닌 피알루로 먼저 온 건 경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몬스터들을 먼저 확인하러 갔다가 그가 피알루로 귀환하는 속도와 몬스터의 진군 속도가 비슷하거나 몬스터들의 속도가 더 빠르다면 피알루가 대책을 세울 시간이 없어진다.

게다가 두 개의 사각뿔의 원혼으로 상반된 명령을 받은 몬스터 무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니, 각 반응에 대한 대책도 세워야 했다.

사령관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리며 잠시 숙고했다. 하지만 그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틸의 얘기가 사실이라면 길게 숙고할 여유도 없었다.

“지크 씨가 해결책이 있다고 한 말은 분명하오?”

“그건 확실합니다. 어떤 방법인지는 말해주지 않았지만요.”

“방법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믿으라니….”

사령관의 마음은 틸도 익히 이해했다.

“그래도 지금까지 지크 씨를 믿어서 나쁜 적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전 믿습니다.”

“믿어서 나쁠 건 없을 거예요.”

사령관과 틸이 방 안에 같이 있던 다른 사람, 라일라를 쳐다봤다.

“지크가 믿는 바가 뭔지는 대충 알고 있어요. 아마 그거라면 충분히 몬스터들을 막아낼 수 있겠죠. 우리는 지크가 말한 것처럼 몬스터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먼저 파악하고 시간이 될 때까지 피알루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는 데 중점을 두면 돼요.”

“그게 어떤 방법이오!”

라일라가 대책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사령관은 반색했다. 그러나 라일라도 고개를 저었다.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그저 지크가 말한 대로 하시라고 충고를 드릴 수밖에요.”

사령관의 얼굴이 실망으로 물들었다. 얼핏 노기조차 엿보였다. 하지만 라일라에게 화를 내진 못했다.

사령관이 다시 고민에 빠졌다.

“…어쩔 수 없군.”

탁!

책상을 내려치며 사령관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정말로 몬스터가 내려오는 상황이라면 별다른 방법도 없겠지. 그대와 지크 씨를 믿겠소.”

“현명하신 선택이에요.”

라일라가 미소 지었다.

* * *

턱!

지크는 데네스트 산맥의 어느 한 곳에 내려섰다. 산맥에서도 꽤나 평평한 지형이 넓게 펼쳐진 곳으로, 이름 모를 풀들이 군데군데 자생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곳은 예전의 모습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흙은 파헤쳐져 있고 바위도 부서져 있다. 작정하고 이 대지를 황폐하게 만든 어떤 음모가 있기라도 하듯 대지가 말 그대로 뒤집혀 있었다. 고산 지대에서도 푸른 생명력을 자랑하던 풀들의 모습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것들을 대신하는 건 말라붙은 피와 이름 모를 생명체의 살점과 뼈들.

일각뿔의 한탄에 의해 모인 몬스터들이 대기하고 있던 지점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렇게 많은 수의 몬스터들이 몇 날 며칠을 머물고 있던 곳이니 이런 참상이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정작 이런 참상을 만든 몬스터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동했군.’

역시 그렌은 몬스터들을 이용해 피알루를 쓸어버릴 모양이었다.

‘그렇겐 안 되지.’

누구 마음대로 자신의 공을 없던 일로 만든단 말인가.

지크는 바로 피알루가 있는 곳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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