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1화
전장이 된 숲은 군데군데 나무가 뭉텅이로 쓰러져 수해 사이로 지면이 보이는 구멍이 생겨 있었다. 스며드는 달빛이 황폐화된 구멍 안을 비춘다.
하지만 곧 흐릿한 달빛보다 강렬한 붉은색의 불빛이 숲 사이로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타탁! 타타탁!
커다란 나무들이 타오르며 불똥을 튀긴다. 두세 사람이 두 팔을 한가득 벌려 안아야 겨우 품 안에 들어 올 굵은 나무들이 산처럼 장작으로 들어가 있어 그 불길의 기세는 무척이나 거셌다. 흘러들어 오는 공기의 흐름에 따라 몸을 이리저리 뒤트는 그 모습은 마치 사람들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은 불꽃의 괴물과도 같아 보였다.
휙!
불길 안으로 무언가가 던져졌다. 그것은 시체였다.
휙! 휙! 휙!
시체들이 계속해서 던져졌다. 죽은 용병들과 로브들의 시체였다. 강렬한 불꽃은 시체들을 탐욕스럽게 집어삼켰다. 시체의 숫자가 상당했지만 불꽃을 일으키는 장작의 양은 그보다 훨씬 더 많았기에 불꽃은 무리 없이 시체들을 태워갔다.
“마지막!”
지크는 손에 들려 있는 용병의 시체를 집어던지고는 손을 탁탁 털었다. 이제는 불길이 시체들을 모두 잿더미로 만드는 걸 기다리면 된다.
지크는 불길에서 등을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 지금까지 시체를 던져 넣었던 불길과는 다른 작은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게 보였다. 작은 불길 안에는 시체 한 구가 누워 불타고 있었다. 쓰레기처럼 커다란 불꽃 안으로 집어던져진 용병이나 로브 놈들의 시체와는 달리, 작은 불길의 시체는 누가 봐도 간단하게나마 예를 갖춰 장사를 치르는 모습이었다.
지크는 작은 불길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엔 틸이 묵묵히 불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끝내셨습니까?”
지크가 자신의 옆에 서자 틸이 물었다.
“네. 이제 남은 시체는 없습니다.”
“전부 지크 씨에게 떠넘겨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친구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방해할 정도로 개자식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지크는 불길을 내려다봤다.
불길 안의 시체는 이미 옷과 살이 전부 새까맣게 탔고 그을린 뼈가 슬슬 부서져 내리고 있다.
그건 닉의 시체였다.
틸은 닉의 시체가 불꽃에 삼켜졌을 때부터 한 걸음도 떼지 않고 계속해서 불에 타들어가는 걸 보고 있었다.
뭘 느끼고 있을까. 배신자가 죽었다는 후련함을 느끼고 있을까. 아니면 그래도 정이 든 친구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모습에 슬픔을 느끼고 있을까. 아니면 그 감정이 전부 섞여 있을까. 그렇다면 어떤 감정이 더 우세할까.
그러나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물고 오로지 불꽃만 바라보는 모습만으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지크는 그 일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다.
둘의 인연이니만큼 어떤 감정을 품든 둘 사이에서 끝날 일. 지크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었다.
‘전부 탈 때까지 내버려둘까.’
아마도 닉의 몸이 한 줌 재가 될 때까지 틸은 자리에서 떠날 것 같지 않았다. 그 시간동안 다른 일을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틸처럼 닉의 마지막을 끝까지 배웅해 줄 만큼 지크는 닉에 대한 의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크가 발을 떼기 전, 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약속은 지켜주시리라 믿습니다.”
언뜻 절박함까지 느껴지는 목소리. 저 말을 한 사람이 적이라면 지크는 기쁘게도 약속을 깨고 비웃음을 날렸겠지만 틸은 그 대상이 아니었다.
“걱정 마세요. 정직하다고 입이 찢어져도 말 못 하고 거짓말도 곧잘 하는 저지만, 이번 약속을 깰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도 틸이 걱정을 할까 한마디를 덧붙였다.
“적어도 저는 당신의 친우가 충분히 죗값에 대한 고통을 안고 죽었다고 생각하니까요.”
틸은 닉이 죽기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지크의 계획에 휘말려 온갖 고생을 하고 가장 사랑하던 딸까지 인질로 잡혔다는 소식에 절망했다. 거기에 죽을 때도 딸이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에 질린 채 죽었다.
그림에 그린 듯한 비참한 죽음.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동정을 금치 못할 그런 죽음이다.
물론 닉이 한 일을 말해준다면 바로 생각이 바뀌겠지만.
“그러니까 닉 아니, 닉 씨는 안타깝게 흉수에게 당한 걸로 해도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지크가 닉을 조롱하고 기만하는 짓을 틸이 내버려 두고 있던 것은 닉이 적이란 이유도 있었지만, 지크와 맺은 약속의 비중이 더 컸다.
닉이 고통을 받고 죽게끔 지크를 도와주는 대신, 그의 배신을 세상에 발설하지 말아달라는 약속.
친구의 명예나 용병단의 신뢰 같은 것 때문이 아니었다.
“이걸로 엘리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겠군요.”
범죄자의 가족이 사람들에게 어떤 시선을 받는지는 잘 알고 있다. 그 범죄자의 범죄가 악랄하면 악랄할수록 손가락질의 강도도 강해진다. 만약 닉의 범죄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엘리가 받을 상처가 어떨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때문에 그는 지크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준 것에 깊은 감사함을 느꼈다. 닉을 죽일 때의 조롱과 기만도 그의 악행을 덮는 조건이라면 싼 것이었다.
게다가 지크가 내건 명분도 일리는 있었다. 그의 악행이 퍼지지 않고 명예가 지켜지게 된다면, 적어도 본인이 죽을 때 죗값을 확실히 받고 죽어야 한다고.
“엘리를 무척 아끼시는군요.”
“제 딸 같은 아이입니다. 평생을 그렇게 지냈죠. 그 아이가 상처받는 건 보고 싶지 않아요.”
틸의 표정이 씁쓸하게 변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된다면 한동안은 울면서 지내겠지만 말이죠.”
“틸 씨가 키우실 겁니까?”
“물론입니다. 아마 닉 녀석도 그랬을 겁니다. 절 범죄자로 몰아 이득을 취하려 했지만 윌터만큼은 엘리와 같이 키웠겠죠.”
‘글쎄. 과연 그럴까?’
틸의 굳은 믿음을 비웃으려는 건 아니다. 닉이 틸의 아들인 윌터를 아끼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틸이 재난의 마왕이 되었을 때의 행동을 생각하면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혼자서 고고히 파괴와 학살 행위를 행했던 재난의 마왕. 지크는 그것이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한 적이 있다.
‘만약 지금과 비슷한 계획으로 틸이 마왕으로 떨어졌다면 찾아다닐 건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아.’
바로 아들인 윌터.
물론 당시 재난의 마왕은 정신머리가 나간 것이 분명했으니 아들의 수색이라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움직였을 가능성은 적다. 아마 정신이 나가기 직전에 가장 갈망하던 것이 행동으로 나온 것일 터. 만약 정말로 윌터를 찾았더라도 알아보지 못했을 확률이 크다.
하지만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도 아들을 찾아다닌 그 부성애는 분명 고귀한 것이었다.
‘아들을 찾아다닌 거라면, 결국 윌터를 찾지 못했다는 소리지.’
틸의 예상처럼 닉이 윌터를 거둬들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틸이 아들을 그렇게 찾아다녔을까?’
닉의 보호 아래 윌터가 있었다면 그토록 세상을 헤매지는 않았을 터.
‘아마도 윌터가 행방불명됐을 가능성이 높아.’
그리고 그게 틸이 마왕이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됐을 것이다.
행방불명의 주체가 누군지는 모른다. 닉은 윌터를 보호하려 했지만 로브 놈들의 계략에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닉이 윌터를 버렸을지도 모르지.’
물론 지금은 어찌 되든 상관없는 일이다. 이제 그런 미래는 오지 않을 테니까.
“그렇군요.”
때문에 틸의 말에 꼬치꼬치 반박하는 건 관뒀다. 그저 담담하게 긍정할 뿐.
“이제 사건은 끝난 거겠죠?”
더 이상의 사건은 지긋지긋한 듯 틸이 희망을 담아 물었다. 그러나 지크는 틸의 말에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틸이 처음으로 불길에서 눈을 떼고 지크를 쳐다봤다. 그 눈에는 짙은 불신이 담겨 있었다. 정확하게는 믿기 싫다는 감정이었다.
“놈들이 사각뿔의 원혼으로 우리를 협박했던 게 기억납니까?”
“네. 피알루를 습격할 테니 어서 도시로 가 피난을 시키라고 했었죠. 설마 피알루 습격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무척 높은 확률로요.”
틸의 표정이 굳었다.
“도망친 놈들은 한 놈도 없을 텐데요. 게다가 사각뿔의 원혼은 지크 씨에게 있지 않습니까.”
“놈들은 커다란 조직입니다. 우리가 죽인 놈들이 전부가 아닐 겁니다.”
일단 그렌 제너드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다.
“게다가 사각뿔의 원혼도 더 가지고 있을 거고요. 애초에 로브 놈들이 몬스터들을 관리할 때 몬스터들은 녀석들을 습격하지 않았어요. 그런 명령을 받은 거겠죠. 그리고 그건 닉 씨가 내린 명령은 아닐 겁니다.”
지크의 말이 계속될수록 틸의 안색이 안 좋아졌다.
“무엇보다 아무리 그것밖에 방법이 없었다지만 피알루 습격을 너무 쉽게 결정했어요. 그놈들은 자기 목숨보다 임무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놈들입니다. 그런 놈들이 피알루 습격을 강행하려 했다? 이미 어느 정도 위의 놈들과 교감이 있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아요.”
“그럼 큰일 난 거 아닙니까!”
데네스트 산맥에 모여 있는 몬스터라면 피알루를 쓸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다. 정말로 로브 놈들이 말했던 것처럼 한시라도 빨리 도시로 돌아가 피난을 독려해야 했다.
“그렇게 당황하실 것 없습니다. 대충 대안은 세워 놨으니까요.”
그 짧은 시간 안에 대응을 세우다니. 자신의 누명을 벗기고 적들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걸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탄하고 있었건만. 틸은 지크란 존재가 보면 볼수록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일단 이겁니다.”
지크는 사각뿔의 원혼을 품에서 꺼냈다. 틸의 안색이 환해졌다.
“그렇군요! 우리도 몬스터를 조종할 수 있었지요!”
피알루의 습격이란 말에 당황해 생각이 미치지 못했지만, 생각해보니 저것만 있으면 더 이상 몬스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틸의 기대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렇다면 좋겠습니다만.”
“또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습니까?”
“만약 제 말대로 된다면 사각뿔의 원혼 두 개의 명령이 충돌하게 될 텐데, 그때 어떤 현상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몬스터가 각자의 명령을 따르는 두 무리로 나뉠 수도 있고 혼란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두 개의 명령 모두 무효화될지도 모르죠.”
그건 지크도 모르는 일이었다.
“첫 번째 현상이 일어난다면 모르겠지만 두세 번째 현상이 일어난다면 피알루가 위험하겠군요.”
몬스터가 두 개의 무리로 나뉘어 서로 다른 사각뿔의 원혼의 명령을 듣는다면 괜찮다. 명령을 듣는 몬스터 무리에게 다른 몬스터 무리를 공격하게 해 자멸시키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혼란에 빠지거나 명령이 무효화된다면 몬스터들이 어떤 짓을 할지는 모른다. 서로 간에 싸워 자멸할 수도 있지만 무턱대고 산맥 아래로 내려올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까?”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각뿔의 원혼을 다룰 수는 있지만 아무래도 로브 놈들이나 닉 씨에 비하면 숙련도가 부족하니까요. 몬스터 무리에 접근을 해야 원하는 명령을 내릴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당장 데네스트 산맥으로 갑시다! 녀석들이 몬스터들에게 뭔 짓을 해놓기 전에 선수를 쳐야죠! 몬스터들을 서로 싸우게 하든 흩어놓든 말입니다.”
시체를 처리한 시간마저 아까웠다. 아무것도 모른 채 닉의 장례를 치른 것조차 후회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다급한 틸과는 달리 지크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사각뿔의 원혼 말고도 대안은 있으니까요. 그 때문에 이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는 거니까요.”
“무슨 대안입니까?”
지크는 대답대신 웃으며 닉을 가리켰다.
“친구가 떠나는 길, 끝까지 배웅하시는 게 마음의 짐으로 남지 않을 겁니다.”
당장은 가르쳐줄 생각이 없다는 행동. 찝찝한 불안감이 남았지만 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크와 만난 건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의 말은 믿을 수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