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9화
“이 자식이! 이게 장난으로 보여!”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크는 닉에게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장난이라뇨. 전 정말로 당신을 응원하고 싶을 뿐입니다.”
“저 녀석의 의도에 넘어가지 마라, 닉! 당장 사각뿔의 원혼을 발동해!”
우두머리의 말에 닉이 사각뿔의 원혼을 발동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뒤이은 지크의 말에 그는 사각뿔의 원혼의 발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뭐, 피알루에 있는 엘리도 목숨을 잃겠지만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이겠죠.”
“…뭐라고?”
닉으로선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말이 나왔다.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와 대비되게 지크는 빙긋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슬슬 사태도 끝날 때가 돼서 엘리를 피알루로 불러들였습니다. 윌터는 종종 아빠를 만나지만 엘리는 아빠를 본 지 오래됐다고 꽤나 칭얼댔거든요. 그래서 아이를 달랠 겸 일단 피알루에 숨겨뒀죠. 혹시 당신이 이상한 짓을 하면 바로 인질로 잡을 겸 해서 말이죠.”
“듣지 마라, 닉! 거짓말일 게 뻔하다!”
우두머리가 급히 소리쳤다.
“아하, 그러고 보니 거짓말로 들릴지도 모르겠네요. 상황이 상황이니 말이죠. 하지만 어쩌나. 한 점의 거짓도 없는 진실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지크는 조금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면 엘리가 참 불쌍합니다. 결과적으로 자기 아빠에게 죽는 거잖아요? 그렇게 아빠를 좋아하는 아이인데 말입니다. 몬스터의 아가리로 들어가기 전에 아빠를 부르짖으며 울부짖는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닉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어쩌겠습니다. 대!의!를 위해서는 엘리라도 희생할 수밖에요. 그러니 닉 씨도 다른 생각하지 마시고 얼른 사각뿔의 원혼을 발동하세요. 커다란 일을 위해서는 작은 건 희생해야 되잖습니까.”
그리고 지크는 박수를 치며 외치기 시작했다.
“희! 생! 해!”
짝!
“희! 생! 해!”
짝!
“희! 생! 해!”
짝!
닉은 물론이고 우두머리나 용병들, 로브들조차 질린 눈으로 지크를 쳐다봤다. 그건 이해의 범주를 벗어난 괴물을 보는 시선이었다.
“너, 넌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잖아! 그런 말을 쉽게 해도 되는 거냐!”
닉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그러나 지크는 의뭉을 떨 뿐이었다.
“전 그저 닉 씨를 응원하는 것뿐입니다. 왜 여기서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 운운이 나오는지 모르겠군요.”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순진한 표정이 혈압을 올렸다.
“뭐, 제가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 직위를 받은 이유는 밸리드 놈들을 가차 없이 때려잡아서였지, 인성과는 별 관계가 없는 게 사실이지만요.”
“너 같은 놈한테 명예 성기사 직위를 주다니! 카르위먼 놈들도 갈 데까지 갔군!”
“왜 이러세요? 전 명색이 카르위먼의 성녀와 절친한 친구라고요.”
유들유들하게 말하며 지크가 닉을 채근했다.
“이제 슬슬 결정을 하시죠. 사각뿔의 원혼을 발동시킬지 말지. 기다리느라 다리가 아파요.”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통통 두드린다. 가증스럽기 그지없는 행동에 그의 적들은 이제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결정을 내리긴 해야 한다. 닉은 이를 갈면서도 머리를 팽팽 굴렸다.
정말로 지크가 엘리를 피알루에 데려다 놨을까. 정말로 그렇다면 몬스터의 습격에 아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닉의 머리로 아까 지크가 한 말이 지나갔다. 몬스터의 아가리로 들어가기 전, 아이가 아빠를 부르며 울부짖을 거라는 말.
‘…못 해.’
할 수 없었다. 그가 약속받은 거액의 돈도, 상류층과의 인맥도 전부 엘리를 더 좋은 환경에서 키우기 위한, 더 좋은 생활을 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사각뿔의 원혼을 쥐고 있는 닉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항복한다. 닉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려 할 때였다.
콰득!
옆구리에서 화끈거리는 고통이 느껴졌다.
“커헉!”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 느껴졌다. 용병 생활을 하며 이런 저런 부상을 많이 경험해 본 닉이었지만 이런 고통은 처음이었다.
그 뜻은 곧, 고통의 원인인 상처가 지금껏 당해왔던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닉이 부릅뜬 눈으로 옆구리를 내려다봤다. 커다란 구멍이 옆구리에 뚫려 있었다. 마치 누군가 우악스러운 손으로 옆구리를 잡아 뜯은 것 같았다.
닉이 자신의 옆에 있는 인물을 쳐다봤다.
괴물 같은 얼굴에 붙어 있는 눈이 싸늘하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그딴 식으로 망설일 거라면 관둬라. 내가 한다.”
닉의 다리의 힘이 풀린다. 힘없이 쓰러져 가는 그의 목을 우두머리가 잡아 고정시킨다. 그리고 힘없이 흔들거리는 와중에도 놓치지 않고 있던 사각뿔의 원혼을 뺏었다.
털썩!
우두머리가 목을 쥐고 있던 손을 놓자 닉의 몸이 마치 쓰레기 포대를 던져놓은 양 쓰러졌다. 뻥 뚫린 옆구리에서 내장과 함께 붉은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누가 봐도 치명상이다. 그의 숨은 머지않아 끊길 것이 자명했다.
하지만 닉의 눈은 오로지 사각뿔의 원혼에 못 박혀 있었다.
“아, 안…돼….”
닉이 사각뿔의 원혼을 되찾으려 손을 뻗는다. 하지만 그의 손은 허공을 움켜쥘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조차 오래 하지 못했다. 손을 들 힘조차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닉은 필사적이었다.
우두머리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사각뿔의 원혼을 발동할 것이다. 그렇다면 피알루는 지옥으로 변한다. 만약 엘리가 정말로 거기 있다면 잔인하게 살해당할 것이다.
닉이 고개를 돌려 부하들을 쳐다봤다. 그들은 당황한 눈으로 닉과 우두머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 저 놈을… 막…아….”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용병들은 우물쭈물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닉이 폐를 억지로 쥐어짜며 다시 말을 하려 할 때였다.
“이 녀석은 곧 죽는다. 그리고 우리 앞엔 아직 우리를 죽이려 눈을 희번덕거리는 적이 남아 있다. 지금 누구의 편에 붙어야 유리할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거다.”
우두머리의 말에 용병들은 동요했다. 서로 눈치를 본다. 하지만 그들에게 선택지란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용병들은 닉을 외면했다.
“아…안 돼….”
부하들의 배신에 닉은 절망에 빠졌다. 자신의 딸이 몬스터에게 잡아먹히는 불길한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엘리만…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안타깝게 외치던 닉의 목소리가 끊겼다.
그의 숨이 끊어졌다.
“…닉.”
틸이 닉의 시신을 쳐다봤다. 어제의 동지이자 오늘의 적이 된 친우의 시신. 틸의 눈에는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렇게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절친했던 친구를 배신했던 닉은, 욕망을 이루기는커녕 이름 모를 숲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하지만 닉의 죽음은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틸만이 착잡한 눈으로 닉을 바라볼 뿐. 그게 더 닉의 죽음을 초라하게 만들고 있었다.
후웅!
우두머리는 바로 사각뿔의 원혼에 마력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지크와 틸을 향해 말했다.
“그렇게 여유가 있어도 되나? 한시라도 빨리 피알루에 달려가는 걸 추천한다만. 그래야 한 명이라도 더 구하지.”
그러나 몬스터의 대규모 습격을 앞두고도 지크와 틸은 지나치게 태연했다.
“아, 그거? 걱정하지 마. 간다고 해도 우리가 알아서 갈 테니까. 너는 우리 걱정 말고 어서 몬스터나 부르라고.”
오히려 지크는 우두머리에게 빨리 몬스터를 부르라 재촉했다. 우두머리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허세가 지나치군. 나는 닉 같은 머저리와는 다르다.”
닉의 욕을 한 것이 불쾌했던 것일까. 틸이 살짝 인상을 썼다. 하지만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고 우두머리가 하는 양을 지켜봤다.
시간이 흘러간다. 우두머리의 마력이 계속해서 사각뿔의 원혼에 주입됐다. 하지만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이 없는 것뿐일까.
하지만 당황스러운 우두머리의 표정을 보면 그건 아니었다. 험악한 괴물의 얼굴이 당혹감에 일그러지는 꼴이 지크는 퍽 웃겼다.
“이, 이게! 왜 이러지?”
우두머리는 사각뿔의 원혼에 들어가는 마력의 양을 늘렸다. 하지만 사각뿔의 원혼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초조해진 우두머리가 일시에 공급하는 마력의 양을 두 배로 늘렸다.
쩌어억!
불길한 소리가 났다.
“뭣!”
우두머리는 허둥지둥 사각뿔의 원혼을 살폈다. 커다란 금이 가 자그마한 파편이 후두둑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어이구? 뭐야, 고장이라도 난 거야?”
지크의 조롱이 들리지도 않는다. 우두머리는 허겁지겁 사각뿔의 원혼에 난 금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혹시 그렇게 하면 고쳐지지 않을까 헛된 기대를 하는 것처럼.
당연히 사각뿔의 원혼이 고쳐질 리 없었다.
우드득!
오히려 금이 더욱 확장되며 손톱만한 파편이 떨어졌다.
깨진 구멍 안으로 사각뿔의 원혼의 내부가 보였다.
“…이건 뭐야.”
우두머리가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콰직!
구멍이 더욱 확장되며 더 많은 파편이 떨어졌다. 우두머리는 마치 계란의 껍데기를 까듯 사각뿔의 원혼의 표면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드러난 것은 안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되어 있던 일각뿔의 한탄이었다.
우두머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니, 말을 할 수 없었다. 지금의 상황이 대체 어떻게 된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그의 손에 있는 사각뿔의 원혼은 가짜였다. 일각뿔의 한탄을 이용해 겉모습만 그럴 듯하게 재현한.
“쿡! 쿠쿡! 크흐흐흐흐흐!”
웃음소리가 들렸다. 무척이나 즐거운, 그리고 비틀린 웃음소리다. 남을 얕잡아보는 심정이 이토록 잘 묻어나는 웃음소리가 또 있을까 싶은 그런 웃음소리.
‘지크 모어.’
웃음소리의 주인공은 지크였다.
한 손으로 얼굴을 덮고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이는 모습은 우두머리에게 불길함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이미 그에게는 몇 번이고 당한 기억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불길함은 적중했다.
“혹시 이걸 찾아?”
지크가 꺼낸 물건을 보고 우두머리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 그가 가지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물건.
그건 분명 사각뿔의 원혼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닉에게 가짜 사각뿔의 원혼이 있고 저 녀석이 진짜 사각뿔의 원혼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아니, 혹시 저것도 가짜가 아닌가?’
우두머리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혹시 이게 가짜라고 의심하는 중이야? 믿음을 가지라고, 친구. 이건 분명한 진짜야.”
지크는 사각뿔의 원혼을 과장스럽게 흔들어보였다.
“데네스트 산맥에 있는 몬스터 무리를 이용해 네 동료들을 전부 쓸어버리게 만든 진품이라고.”
우두머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 사실을 아는 자는 자신들과 몬스터의 명령을 풀어버린 장본인뿐.
‘설마 진짜란 말이냐!’
“이야, 네가 사각뿔의 원혼의 가짜를 그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어. 설마 그걸 얻겠다고 닉까지 죽일 줄이야. 아니, 아니지. 물건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가는 철저하게 개인적인 생각에 입각해야 하니까. 좋아, 난 네 취향을 응원할게. 그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몇 개 더 만들어 오는 건데.”
지크의 신이 난 목소리가 울려퍼질수록 우두머리의 분노도 급격하게 치솟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