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8화
콰아앙!
틸의 거대한 대검이 로브들을 덮쳤다. 로브들이 대항했지만 거력이 살린 틸의 검을 제대로 막을 수 없었다.
틸은 눈앞의 로브들을 노려봤다. 이미 괴물처럼 변해 인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모습. 하지만 그들이 인간이든 괴물이든 틸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저놈들이 자신을 음모에 몰아넣은 적이라는 것뿐.
‘이놈들 때문에 내가!’
지금껏 했던 고생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윌터가 납치당했다는 쪽지를 받았을 때의 충격과 쪽지에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던 무력감. 그리고 닉에 대한 배신감.
그 모든 것의 시발점이 바로 눈앞의 로브들이었다.
콰아아아앙!
“크아아아악!”
“으으으윽!”
괴물화로 인해 근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로브들이었지만 틸의 거력을 감당해낼 순 없었다. 재난과도 같은 무자비한 폭력을 로브들은 근근이 버텨낼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왔다.
콰직!
“끄이이이익!”
로브 한 명의 목에 틸의 대검이 틀어박혔다. 아무리 괴물로 변해 생명력도 강해진 로브들이라지만 목에 검이 꽂히고도 살아남을 정도는 아니다. 목에 칼을 맞은 로브는 그대로 쓰러져 움직이지 못했다.
그 모습을 우두머리는 굳은 표정으로 바라봤다.
‘안 좋아.’
닉이 갖고 있는 사각뿔의 원혼마저 포기한 채 철수를 하려는 상황이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괜히 사각뿔의 원혼을 되찾겠다고 나대다가 전력만 잃게 될 거라는 걸 방금 전의 전투로 충분히 깨달았다. 게다가 지크가 자신들의 흉내를 내고 다닌다는 정보도 얻었다. 사각뿔의 원혼을 잃었다는 이유로 나중에 욕을 먹을지언정, 그는 지금은 철수를 해야 할 시기라고 판단했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예상 외의 사태라면, 부하들 몇을 희생하면 몸을 충분히 뺄 수 있다는 판단이 어긋난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강했나!’
마치 곰처럼 달려드는 틸을 부하들이 기를 쓰고 막아낸다. 하지만 틸의 거력을 제대로 막아내는 부하는 없었다.
‘흩어져서 도망쳐야 하나.’
하지만 그것도 썩 현실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아까 부하 한 명을 도망치게 해봤다. 일단 지크가 자신들의 흉내를 낸다는 정보를 빼내기 위해서였다.
그에 대한 대답은 옆의 나무를 뿌리째 뽑아 집어던지는 틸의 모습이었다.
도망치는 데 집중하던 그 부하는 거대한 나무에 깔려 숨이 멎었다. 고작 나무가 날아든다고 죽을 만한 실력을 가진 그들이 아니었지만 틸의 괴력에 힘입어 엄청난 속도로 돌진해오는 육중한 나무는 별개였다. 만약 자신들이 뿔뿔이 흩어진다면 등 뒤로 거대한 나무들이 쇄도할 것이 뻔했다.
‘인원이 좀 더 있었으면 괜찮았을 텐데.’
그렇다면 몇 명 정도는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용병들과의 전투에 이은 틸의 습격 탓에 그들의 인원도 상당히 줄어 있었다. 이 정도면 흩어진다고 해도 틸이 충분히 전부 도륙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틸만이 아냐.’
우두머리는 흘끗 지크를 쳐다봤다. 그는 용병들을 말 그대로 학살하고 있었다. 그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 온 용병은 몇 번 칼을 부딪치지도 못 하고 그대로 베어 넘겨졌다. 도망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건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몇몇이 도주를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날카로운 검기가 날아들어 등을 베어버렸다. 닉이 사각뿔의 원혼을 들고 으름장을 놓는 모습이 보였지만 지크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몬스터가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생각하면 썩 위협스러운 협박은 아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정말 무시무시한 실력이군.’
상황에 맞지 않게 우두머리는 감탄했다. 단 두 명에게 도망치지도 못하고 괴멸될 위기라니.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이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 우두머리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자신이 뭘 더 할 수 있을까.
‘역시 그것밖에 없나.’
우두머리는 결단을 내렸다.
“용병 놈들에게 합류해라!”
지금껏 계속 도망칠 틈을 보고 있던 것과는 다른 명령. 하지만 로브들은 충실하게 그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무슨 꿍꿍이야!”
자신이 같이 싸우자고 할 때는 콧방귀도 뀌지 않고 철수를 하려 했으면서 이제야 같이 싸우자니. 당연히 닉의 말이 곱게 나올 리 없었다.
그러나 우두머리는 태연스레 말했다.
“우리가 꿍꿍이가 있더라도 네가 거부할 상황인가?”
“젠장!”
눈앞의 위기 상황에서, 아무리 신뢰라곤 하나 없는 인간이라지만 협력을 거부할 순 없었다.
“그래서, 그 꿍꿍이가 뭐냐!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겠지?”
“생각대로 된다면 말이다.”
우두머리는 명령을 내려 부하들에게 닉을 둘러싸게 했다. 마치 닉을 보호하려는 것 같은 형세였다.
“너에게 가는 공격은 우리가 목숨을 걸고 막을 테니 너는 사각뿔의 원혼을 사용해라!”
“고작 그게 대안이랍시고 내놓는 의견이냐? 내가 계속 저 녀석을 협박하는 걸 보지 못했나!”
그리고 그의 협박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거야 네가 몬스터들을 이곳으로 불러오려 할 때의 얘기지!”
이곳으로 불러오려 할 때라니. 그럼 몬스터들을 어디로 움직이란 말인가.
“피알루로 움직여라.”
지크와 틸의 움직임이 멈췄다.
통한다. 우두머리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둘에게 말했다.
“분명 너희 동료들은 모두 그 도시에 있었지. 네 놈들도 알고 있는 대로 지금 데네스트 산맥에 모여 있는 몬스터의 수는 아무리 강한 자들이 있다고 해도 일개 도시 하나가 감당할 수 있는 전력이 아니다. 몬스터의 습격을 받는다면 그 안에 있는 자들은 몰살당할 게 뻔하지.”
지크와 틸의 공격이 멈춰 한숨을 돌리게 된 용병들이 여기저기서 희망찬 눈길로 우두머리를 바라봤다.
누가 봐도 그의 협박이 통하는 모양새인 것이다.
“물론 도망치려면 도망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알기로 너희 동료들은 상당히 정의로운 모양이던데. 몬스터의 위협 앞에 빤히 놓인 민간인들을 내버려 두고 도망갈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없지.”
대답은 지크에게서 나왔다. 틸은 말이 없었지만 그의 서늘한 시선이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그럼 빨리 피알루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나. 몬스터가 들이닥치기까지 시간이 어느 정도 있으니, 그 시간 안에 사람들을 피난시키는 게 가장 좋은 판단일 거야.”
물론 그렇다고 시간에 맞을지는 모르지만.
“정 우리를 놓치기 싫다면 소식을 전하러 한 명만 돌아가는 것도 괜찮겠지.”
그것도 상관없다. 한 명 정도라면 몇몇을 희생시켜 도주할 수 있다.
“다만, 전하려면 최대한 빨리 정하는 게 좋을 거야. 한 명이라도 더 살리고 싶다면 말이지.”
그리고 우두머리는 닉을 향해 말했다.
“어서 해라! 그게 우리가 유일하게 사는 길이다!”
몬스터들이 피알루로 전진한다면 그들의 계획도 완전히 박살 난다. 하지만 닉을 만나러 오기 전 그렌에게 어떤 언질을 전해 들은 우두머리는 망설이지 않았다.
‘혹시 계획이 어긋날 기미가 보이거든 피알루를 쓸어버릴 거랬지.’
특히 그는 지크가 영웅이 될 낌새에 질색을 했다. 이번에 섣불리 그들이 움직인 것도 지크가 몬스터들을 해결할 계책이 있다는 말 한 마디 때문이지 않던가.
그리고 상황을 보면, 확실히 지크가 도시의 칭송을 받을 만한 업적을 쌓기 일보 직전이었다. 자신들과 닉을 없앤다는 공을 세움으로써.
‘그럴 바엔 몬스터들을 이용해 피알루를 쓸어버린다.’
그렇다면 지크의 공적은 사라진다. 결국 몬스터의 습격을 막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피알루의 사람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저들이 다급히 피알루로 돌아간다면 자신들도 충분히 몸을 뺄 수 있을 것이다.
닉은 사각뿔의 원혼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여전히 불길한 기운을 흩뿌리고 있었다. 닉은 침을 꿀꺽 삼켰다. 피알루를 향해 진군 명령을 내리는 건 별로 어렵지 않다. 거리가 상당히 멀어 복잡한 명령을 내리지는 못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진군을 하라는 명령 정도는 내릴 수 있다.
하지만 닉이 그런 명령을 내리는 순간, 피알루는 지옥에 휩싸일 것이다. 과연 피알루의 시민 중 몇 명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무리 닉이라도 거대한 생명의 무게에 짓눌리는 느낌을 받았다.
“뭐냐. 할 수 없다면 내놔라. 내가 하마.”
우두머리가 말했지만 닉은 머뭇거렸다. 그러나 곧 그의 얼굴에 단호함이 서렸다. 사각뿔의 원혼을 힘껏 쥐었다.
“제안을 받아들일 겁니까?”
지크가 말했다. 마치 자기는 상관없다는 듯 태평한 것 같기도, 분노를 삼킨 채 무미건조함을 연기하는 것 같기도 한 반응이다.
“우리가 살 길이 이것 외에 더 있나?”
“생각하자면 그렇긴 하죠.”
지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도시 전체를 인질로 잡혔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도 태연한 모습이다. 닉과 우두머리는 조금 불안해졌다. 뭔가 또 수가 있는 것일까.
그러나 우두머리는 단호하게 그 생각을 떨쳐냈다.
“허세다. 저 놈들은 더 이상 뭘 할 방법이 없어.”
그는 닉을 재촉했다.
“우리가 네게 약속했던 보상은 그대로 네게 갈 거다. 그리고 엘리도 반드시 찾아 주마. 우리의 정보력은 알고 있겠지? 저 녀석들은 피알루의 사람들을 피난시키기 위해 한동안 정신이 없을 거다. 우리가 엘리를 찾을 동안 손을 쓰긴 불가능할 터. 그리고 운이 좋다면 그 와중에 뒈져버릴 수도 있지.”
과연 로브를 지휘하는 자는 다른지 그의 혓바닥은 마치 기름칠을 해놓은 양 아주 잘 돌아갔다. 닉의 등을 떠밀기 충분한 제안이었다.
닉의 결심이 굳었다.
“피알루를 몬스터 밥으로 던져 주겠다니. 그 정도까지 타락했습니까, 닉.”
그의 결심을 눈치 챈 지크가 빈정거렸다. 닉은 표독스럽게 대꾸했다.
“네놈들이 자초한 일이다!”
“우리들이 자초한 일이라니요. 우리는 열심히 도시를 위해 움직인 것뿐입니다. 칭찬을 받으면 받았지, 책임을 질 일이 아닙니다. 이 모든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욕심 많은 당신이 저지른 범죄 때문입니다. 괜히 남한테 책임 전가하지 마시죠?”
닉이 아무런 대꾸 없이 사각뿔의 원혼을 들어 올렸다.
“…정말로 할 셈이냐, 닉.”
지금껏 묵묵히 지크가 하는 양을 보고만 있던 틸이 입을 열었다.
“피알루의 많은 사람이 죽을 거다. 그 죄업을 감당할 수 있겠나. 그놈들이 네게 무엇을 약속했는지 모르지만 과연 피알루 시민들의 목숨보다 무거운지 생각을 해 봐라!”
잔잔하던 틸의 목소리가 결국은 피를 토하는 것처럼 커졌다.
아무리 지금은 엇나갔다고 하지만 그와 오래도록 인연을 쌓아 온 닉의 타락한 모습을 보는 건 가슴 아픈 일이었다. 지금이라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길 바랐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헛된 망상으로 끝났다.
“커다란 일을 위해서는 작은 건 희생해야 하는 법이야.”
틸을 눈을 질끈 감았다. 더 이상 닉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는 닉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모든 걸 지크에게 맡기기로 했다.
“확실히 맞는 말입니다. 커다란 일을 위해서는 작은 일을 희생해야 하는 법이죠.”
닉을 말리기도 시원찮을 판에 지크가 닉을 두둔한다. 모두가 의문에 휩싸였지만 지크는 닉의 편을 드는 걸 멈추지 않았다.
“피알루 시민들의 목숨보다 더 큰 대의가 당신에게 있다는 소리겠죠? 에이, 그렇다면 진작에 그렇게 말씀하시지. 그걸 알았다면 당신을 이렇게까지 괴롭히진 않았을 텐데요.”
닉도 우두머리도 용병도 로브도 지크의 말에 당황했다.
“그렇다면 어서 사각뿔의 원혼을 쓰세요. 그런 대의가 있다면 피알루 시민들도 자신들의 죽음을 충분히 납득할 겁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