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6화
두 세력 중 가장 먼저 지크의 정체를 알아 본 자는 닉이었다.
“지크 씨?”
갑자기 등장한 제3자가 지크인 것을 알았을 때 그가 제일 먼저 느낀 감정은 반가움이었다.
엘리가 구출이 됐든 죽었든, 더 이상 저 빌어먹을 집단에 없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최선의 결과가 됐을지 최악의 결과가 됐을지는 직접 확인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 간악하기 짝이 없는 로브 놈들이 순순히 알려줄 리는 만무. 역시 그 일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구출 계획을 짜고 있다는 지크일 수밖에 없었다.
딸의 생사 그리고 행방을 알 수 있는 기회다.
그와 동시에 기대감도 샘솟았다. 지크의 겉모습은 멀쩡해 보인다. 그렇다면 딸의 구출 계획은 잘 된 것이 아닐까.
그리고 한 가지 더.
‘혹시 저 로브 놈들을 죽이는 데 힘을 보태기 위해 찾아온 건가!’
딸을 구한 그가 로브 놈들을 추적해서 이곳으로 온 것이라고 생각됐다. 그렇다면 그만큼 든든한 응원군도 없다. 지크의 실력은 닉도 잘 알고 있었다.
지크를 보고 순식간에 뇌리에 지나간 생각이 거기까지.
하지만 아무리 지크에 대한 호감이 높다고 하더라도, 지크에 대한 믿음이 높아졌더라도, 눈앞에서 일어난 일에 눈을 돌린다는 건 용병단의 부단장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
지금껏 뇌리에 돌아다닌 희망찬 생각도 지크를 봤을 때 반짝 스쳤던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저, 저거 뭐야!”
“카르위먼의 성기사잖아?”
“카르위먼의 성기사? 그럼 우리 편이야?”
“방금 도망치는 새끼 죽이는 거 못 봤어?”
용병들의 소란대로, 지크는 도망가던 용병을 죽였다.
감히 전투 중에 적들에게 등을 돌린 행위는 용서가 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타인이 갑자기 튀어나와 동료를 죽였다는 걸 납득할 수도 없다.
게다가 지크가 말한 말도 걸린다.
‘쓰레기끼리 하나라도 더 죽여야지.’
명백한 조롱조의 말. 적어도 지금 지크는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을 적대하고 있었다.
혹시 오해가 있는 게 아닐까. 닉은 일단 그렇게 생각했다. 뭐니 뭐니 해도 그는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가 아니던가. 자신의 딸을 구하려 노력한.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지크 씨!”
동료의 죽음에 대한 분개를 하면서도 지크에 대한 반감의 표출은 조절한다.
“갑자기 튀어나와서 우리 동료를 죽이다니. 혹시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오해. 그 단어가 나오자 용병들의 눈에 기대가 어리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로브 놈들의 예상치 못한 전력에 당황을 하고 있던 상황이다. 여기서 지크가 그들의 아군으로 붙는다면 도망갈 필요도 없다.
동료 한 명이 죽었지만, 그딴 놈 하나 죽은 일보다는 지금의 승리가 먼저였다.
자신에게 향하는 희망적인 시선에 지크는 피식 웃었다.
동료 한 명의 머리를 자르고 조롱하며 등장했지만 저들은 아직 자신이 같은 편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이야, 정말로 내가 이미지 관리는 제대로 한 모양이야.’
스스로도 자신의 연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용병들이 그렇게 희망에 빠져 있는 순간, 로브들은 그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지크 모어.’
지크를 보는 우두머리의 눈이 깊었다.
그가 지크 모어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계획에 가장 중요한 부품이라고 해도 될 만한 사람이었으니까.
게다가 자신들의 계획이 지크에 의해 많이 무너졌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도망가는 용병의 목을 치며 등장했지만, 그가 자신들의 편이 될 리는 없다.
‘저 녀석이 끼어들면 우리에게 승산은 없다.’
어쩔 수 없다. 부하 몇 명의 목숨을 미끼로 써먹어 닉을 잡은 후, 바로 도망갈 수밖에 없다.
우두머리가 슬며시 신호를 보내려 할 때였다.
콰드드득!
소름 끼치는 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이번엔 소리가 들린 곳으로 돌아갔다.
쿠웅!
괴물로 변해 있던 로브 한 명이 고깃덩이가 되어 땅바닥을 굴렀다.
거의 반 토막 난 그것의 몸통은 상당히 거칠게 찢겨져 있었다. 기술로 베기보다는 힘으로 짓이겼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상처였다.
“…틸?”
로브 괴물을 죽인 자를 보고 닉이 중얼거렸다.
평소의 거대한 검을 든 채 어둠 속에 서 있는 틸의 모습은, 그를 잘 알고 있는 용병들조차 살짝 뒷걸음질 치게 만들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저 놈이 왜….”
틸이 나타난 것까지는 그나마 이해할 수 있다.
틸은 로브 놈들과 협력 관계니까. 이곳에 나타날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한 닉이었지만, 그가 나타났다고 해서 놀랄 정도까지는 아니다.
문제는 로브 놈들의 협력자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것과 달리, 그가 로브들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후웅!
다시 한번 틸의 검이 휘둘러진다. 주변 로브 괴물들이 반응했다. 향상된 신체 능력을 바탕으로 틸에게 무기를 휘둘렀다.
콰직! 쿠웅!
그러나 고작 그런 것으로 틸의 압도적인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대검과 충돌한 주먹이 짓이겨지고 검은 너무도 허무하게 튕겨나갔다. 그렇게 생긴 빈틈에 틸의 대검이 스며들었다.
콰드드득!
다시 한번 섬뜩한 소리가 난다. 두 로브 괴물들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닉을 잡아!”
우두머리가 고함쳤다. 그리고 본인도 닉에게 뛰어갔다.
틸 주변에 있던 로브 괴물들이 틸에게 몸을 던진다. 목숨을 걸고 막으려는 것이다. 그 외의 자들은 전부 닉에게 달려들었다.
닉은 당황하지 않았다. 아까까지는 무척이나 위협스러운 공격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놈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내분이라도 일어났는지 틸과 로브 놈들이 적대하는 상황. 게다가 지금 그들 쪽엔 지크까지 합류했다. 아직 지크의 공격이 오해라고 믿고 있는 닉이었다.
“방어 진형을 굳혀!”
용병들이 서둘러 움직였다. 다행히 그들도 상황이 변했다는 걸 아는지 더 이상 도망치려는 자는 없었다.
닉이 지크에게 외쳤다.
“어떤 오해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저 놈들부터 막읍시다! 저 녀석들이 이번 피알루 사태의 흉수입니다! 일단 저 녀석들을 모두 쓰러뜨린 후에 대화를…!”
닉의 외침은 계속 이어지지 않았다.
서걱!
지크의 눈치를 보면서도 로브 괴물들을 상대하려 움직이던, 지크와 가장 가까이 있던 용병을 지크가 썰어버린 것이다.
“저, 저 새끼! 또 죽였어!”
“뭐야, 부단장! 오해가 있던 거 아니었어?”
닉도 이 순간엔 당황했다.
“지, 지크 씨! 대체 무슨 짓입니까!”
그러나 지크는 닉의 질문에 대답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의 검이 무정하게 휘둘러진다.
서걱!
지크와 가까이 있던 용병의 머리 하나가 또 잘려나갔다.
그때가 되서야 닉을 포함한 용병들은 알 수 있었다. 혹 오해가 있건 뭐건, 지금의 지크는 철저하게 자신들을 적대할 것이라고.
“일단 모여!”
닉이 명령을 내렸지만 용병들은 우물쭈물했다.
그들의 원군이라고 생각했던 지크가 완벽하게 적이라는 것이 판명되자 다시 도주 의지가 솟아올랐던 것이다.
이런 것들을 부하라고 데리고 다녔다니.
이것들을 용병단에서 쫓아내야 한다던 틸의 말이 맞았을지도 모른다고 아주 잠깐 생각하며, 닉은 외쳤다.
“지금 이 상황에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일단 모여서 방어를 굳혀야 해! 그리고 놈들은 가장 먼저 도망친 놈부터 죽일 거다!”
용병들을 움직인 건 마지막 말이었다.
도망을 치고는 싶지만, 가장 먼저 움직였다가는 닉의 말대로 죽을 것 같다.
그렇다고 다른 도망치는 놈을 뒤따르자니 전부 눈치만 보고 있다.
같은 부류이기에 알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먼저 도망칠 놈들은 없다.
그렇다고 이렇게 있다가는 그냥 손도 못 쓰고 몰살당할 것 같으니 결국 용병들은 닉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동료애라고는 전혀 없는 그들의 특성을 완벽하게 찌른 닉의 잔머리의 쾌거였다.
하지만 잠깐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상황이 됐을 뿐 심각한 건 변함없다.
로브 놈들은 득달같이 용병들에게 달려들고 있었고 지크는 용병을, 틸은 로브 괴물을 무참히 학살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녀석들도 도움이 안 돼!’
용병들은 지금에야 안 그래도 멍청한 머리가 위기감 때문에 더더욱 돌지 않아, 익숙한 대로 닉의 명령에 따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들이 닉의 명령을 들을지 알 수는 없다.
‘무엇보다 로브 놈들은 나를 노리고 있어!’
닉을 로브 놈들에게 넘기고 공투를 제안할 수도 있다.
‘어쩔 수 없나.’
닉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어떤 일이라도 목숨에 우선할 순 없으니까.
“움직이지 마!”
닉이 큰 소리를 쳤다.
고작 그런 말에 적들의 움직임이 멈출 리 없다. 하지만 놀랍게도 로브들은 물론 지크와 틸도 움직임을 멈췄다.
번쩍 든 닉의 손에는 사각뿔의 원혼이 들려 있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이걸 발동시키겠어!”
닉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의 진심이 제대로 통한 건지 움직이는 자는 없었다.
‘일단 멈췄어!’
닉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에게 사각뿔의 원혼을 내어준 로브 놈들은 당연히 이것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지크도 예전에 이 물건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틸도 그에게 사각뿔의 원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지금 그걸 들이대서 뭘 하겠다는 거지?”
로브의 우두머리가 말을 한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사각뿔의 원혼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크와 틸을 견제하며 입을 열었다.
“조용히 그걸 넘겨라, 닉. 그렇다면 적어도 여기서 네놈들을 쫓진 않으마.”
“흥, 쫓을 여유가 없는 거겠지.”
우두머리의 시선이 스산하게 닉을 훑었다. 그러나 닉은 오히려 턱을 들어 올렸다. 지금 유일한 목숨 줄인 그것을 닉이 넘겨줄 리 없었다.
당장 닉을 죽이고 사각뿔의 원혼을 강탈하고 싶은 우두머리였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섣불리 움직이기 힘들었다.
“그걸 발동시킨다고 해봤자 네놈이 살 일은 없다. 몬스터들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 거라고 생각하나.”
데네스트 산맥 안의 몬스터 무리가 있는 곳과 지금 이곳은 물리적으로 상당한 거리가 있다. 당장 몬스터들을 부른다고 해봤자 시간 안에 도착하지 못한다.
“하지만 네놈들의 계획이 박살 나는 건 어쩔 수 없겠지.”
거기선 우두머리도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만약 계획이 일그러진다면 그렌의 온갖 짜증과 폭력을 받아내야 할 것이다.
특히 뭔가에 돌아 버렸는지 얼마 전부터 그렌의 짜증은 한층 더 심해졌다. 만약 그들의 탓에 계획이 일그러진 걸 안다면 어떤 보복이 따라올지는 그들도 예측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각뿔의 원혼을 쉽게 넘겨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두머리는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이 상황을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는 방법을.
“이봐, 틸.”
우두머리가 자신들을 공격하던 틸을 불렀다. 틸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우리와 협력해라. 그렇다면 네 아들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널 자유롭게 해주마!”
아직 틸이 닉의 협박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 우두머리가 그를 회유하려 했다. 그 모습을 눈앞에서 본 닉의 눈이 커졌다.
‘저게 뭔 개소리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