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4화
닉은 자신의 앞에 있는 편지를 내려다 봤다. 촛농으로 단단히 밀봉된 편지의 겉면은 깨끗해서,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닉은 바로 알아챘다.
‘그 녀석들이 보낸 거야.’
협력자라고 믿었던 로브를 입은 자들. 앞으로 웬만하면 연락을 하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 하지만 실제로는 뒤에서 작당질을 하던 그 놈들이 분명했다.
닉은 편지를 주웠다. 그의 손이 기대로 떨렸다. 촛농을 거칠게 뜯어버리고 편지 봉투를 찢듯 연다. 그리고 거칠게 편지지를 폈다.
‘역시!’
그곳엔 할 말이 있다는 글귀와 함께 장소와 시간이 적혀 있었다. 편지 끝에는 그와 로브를 입은 자들 간에 약속된 표식도 작게 그려져 있었다.
‘이제 와 이딴 표식이라니.’
협력을 상징한다고 해도 무방한 그 표식이 너무도 위선적이고 싸구려처럼 느껴져 닉은 두 번 생각 않고 그 표식을 찢어버렸다.
‘어쨌든 이런 편지가 왔다는 이유는 엘리가 탈출했다는 소리겠지.’
혹은 죽었거나. 하지만 그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도록 닉은 애써 노력했다.
‘이제 해야 할 건 하나뿐인가.’
로브 놈들을 죽이는 것. 감히 자신의 뒤통수를 치고 자신을 조롱한 놈들이다. 살려둘 이유가 하나도 없다.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러나 그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가 본 로브 놈들의 실력도 나쁘지 않기도 했고, 무엇보다 틸의 존재가 걸렸다. 틸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인가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해 왔던 닉이 더 잘 알았다.
하지만 닉은 틸에 대한 걱정은 그다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녀석들의 대화를 생각해보면 내 처우는 로브 놈들이 전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무엇보다도 나 하나를 잡기 위해 틸까지 부를 필요는 없어.’
닉은 자신의 실력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아마 로브 놈들 몇 놈이 매복하고 있다면 그걸로 자신을 제압하는 건 충분하리라.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건 저쪽도 파악하고 있겠지.’
아마도 틸은 그 계획이란 것에 집중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충분히 해볼 만해.’
물론 혼자 가진 않을 것이다. 닉은 개죽음을 당할 생각은 없었다. 머릿수를 불려야 한다. 그 함정이란 것을 박살내고 놈들을 죽일 머릿수가.
‘아무나 데리고 갈 순 없어.’
이 편지에 대해서부터 설명을 해야 하는데, 그걸 꾸미는 것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무엇보다 로브 놈들은 자신이 몬스터들을 이용해 피알루를 공격한 걸 알고 있다. 만약 그게 만천하에 공개된다면 자신은 모든 걸 잃는다.
‘사용할 순 없겠지?’
닉은 사각뿔의 원혼이 들어 있는 마법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생각 같아서는 몬스터들을 이용해 놈들을 싹 쓸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괜히 몬스터의 이상 행동을 놈들이 눈치 채 자신을 의심하게 할 수는 없었다.
놈들은 자신이 배신에 대한 것을 눈치챘다는 걸 모를 테니까.
‘그럼 남은 건 하나뿐이야.’
마침 자신의 수하들 중엔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덮어놓고 범죄를 저지를 놈들이 있지 않은가.
놈들을 끌어들인 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자찬하며, 닉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움직였군.’
지크는 저 멀리 피알루의 성문에서 나오는 사람 한 명을 주시했다. 누가 봐도 용병이라 알아볼 용모를 하고 있는 그는 말을 타고 가도를 달려 나갔다.
이상할 건 없다. 지금도 피알루는 비상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아티팩트를 가지지 않은 다른 이들도 계속 순찰을 돌며 혹시 있을지 모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그걸 생각하면 저렇게 용병이 도시 바깥으로 나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말을 타고 움직이는 용병들이 많다는 건 눈여겨 볼 일이다. 말이라는 비싼 동물을 이용하는 용병은 늑대의 송곳니 정도니까.
게다가 성을 나오는 용병들도 평소보다 은근히 많았다.
‘닉이 움직였군.’
그 말은 드디어 로브 놈들이 움직였다는 소리다.
지크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주 대판 붙으려는 모양인데?’
아마 아티팩트를 받고 틸 수색대로 뽑힌 늑대의 송곳니 소속 용병들에게도 연락을 돌리고 있을 것이다.
‘찔리는 게 있으니 새로 받았다는, 인성이 썩어빠진 놈들을 주로 동원할 테고.’
막대한 돈 같은 걸로 꼬신 뒤, 나중에 죽여 증거를 없애려는 계획이 눈에 보일 듯 그려졌다.
‘슬슬 따라가 볼까.’
저 녀석들이 향하는 곳이 로브 놈들과 닉의 접선 장소일 것이다. 로브 놈들을 족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꼭두각시들이 놀아나는 꼴을 보는 건 언제 봐도 재미있으니까.’
지크의 움직임은 누가 봐도 신이 잔뜩 난 아이의 그것이었다.
* * *
해가 떨어진 이후 어둠이 세력을 확장하고도 한참이 지난 시각. 닉은 어떤 숲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허리춤의 검을 차고 갑옷을 입어 완전무장을 한 채 기다리는 모습이 마치 결투를 앞둔 사람 같다. 용병이라는 직업과 작금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런 모습이 이상한 건 아니지만, 그가 뭔가 묘한 분위기를 두르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가 그렇게 얼마쯤 기다렸을까.
부스럭!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닉이 고개만 돌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봤다. 언제 나타났는지 로브를 입은 자가 그곳에 서 있었다. 검은색의 로브가 주변 어둠과 동화해 마치 유령같이 보인다.
예전 틸과 함께 자신을 조롱하던 자가 생각나 닉의 가슴에 분노가 들어찼다. 하지만 바로 달려들진 않았다.
“왔나.”
“그래.”
목소리가 예전 틸과 이야기를 나눈 놈과 다르다. 하지만 닉은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똑같은 놈들. 자신의 앞에 어떤 놈이 나타났는지 신경 쓸 바가 아니다.
전부 죽이면 그만이니까.
그런 닉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브를 입은 자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접촉하지 않겠다는 우리가 왜 널 불렀는지 알고 있나?”
“글쎄?”
닉이 고개를 모로 꼬았다. 로브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로브를 입은 자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누가 봐도 닉의 태도는 정말로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빈정거리는 것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 정보가 사실인가.’
닉이 배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정보. 닉의 태도를 보니 그 정보에 대한 신뢰성이 무척이나 커져갔다.
하지만 로브를 입은 자는 섣부르게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왜 계획대로 하지 않았지?”
“무슨 계획 말인가?”
“말장난 하지 마라! 어째서 틸을 아직까지 팔아먹지 않았냐는 뜻이다!”
계획적으로는 이미 틸은 그렌에게 화려하게 격퇴당해 어딘가로 쫓겨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렌은 도시의 영웅이 됐고 말이다.
하지만 그 계획이 전혀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눈앞의 닉 때문에.
로브를 입은 자의 목소리가 절로 험악해졌다.
하지만 닉은 전혀 겁먹지 않았다. 닉도 용병으로서 온갖 상황을 다 겪어본 사람이다. 고작 이 정도 험악한 분위기에 눌릴 정도라면 늑대의 송곳니 부단장의 자리에 버티고 있지도 못 했다.
“이봐. 그렇게 말하지 마. 틸을 팔아먹으라니. 내가 왜 절친한 내 동료를 팔아먹는다는 거지?”
유들유들한 닉의 대답에 로브를 입은 자는 정색했다.
“배신하는 건가?”
“배신?”
능글맞게 빈정거리던 닉의 태도가 확 변했다.
“네 놈들이 감히 그 단어를 입에 올려? 내가 아무것도 모를 줄 알았나!”
로브를 입은 자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그들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 닉에게 이런저런 지원을 해준 후에 때를 기다리며 최소한의 준비를 한 것밖에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닉이 자신들에게 협력할 마음이 없다는 것.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당장 틸이 있는 곳을 도시에 알려라. 그것만 한다면 약속된 것을 주마.”
“틸이 있는 곳을 말하라고?”
닉으로서는 기가 찰 노릇. 틸의 협력자인 놈들이 마치 틸을 팔아먹으라는 것처럼 말을 하다니. 그건 이미 그들이 자신을 배신하고 틸과 손을 잡음으로써 끝난 일이 아닌가.
정말로 가증스러움이 끝 간 데 모를 정도다.
이제 됐다. 더 이상 저 헛소리를 받아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스릉!
닉이 검을 뽑아 들었다. 저녁이라 빛이 없어 검날에 반사되는 섬뜩한 빛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소리만으로도 뚜렷한 예기가 느껴졌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덤벼. 배신에 대한 죗값을 치르게 해줄 테니.”
“…이성을 상실했군.”
눈앞에 검이 드리워지자 로브를 입은 자도 더 이상 살기를 숨기지 않았다. 그도 로브 안에서 검을 빼 들었다.
“한 가지 충고하건대, 내가 엘리 때문에 망설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 놈들에게 더 이상 엘리가 없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대체 뭘 잘못 처먹고 개소리를 나불대는지는 모르겠다만.”
딱!
로브를 입은 자가 손가락을 쳤다. 수풀 속에서 숨어 있던 로브를 입은 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닉을 포위한 채 스산하게 노려봤다.
“마지막 경고다. 계획대로 일을 진행시켜라.”
“큭큭큭!”
주변에 포위가 된 살벌한 상태에서도 닉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가소롭다는 듯 낮은 웃음을 흘렸다.
“내가 이딴 것도 생각 못 할 줄 알았나?”
닉은 약속 시간보다 일찌감치 도착하여 주변 숲을 뒤졌다. 뚜렷한 함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수단은 하나다. 자신을 포위해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것.
그리고 닉은 이 사태를 타파할 아주 좋은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삐이익!
닉이 휘파람을 불었다. 마력이 섞인 그 소리는 나무와 수풀 사이를 헤집으며 상당히 멀리까지 도달했다.
누가 봐도 명백히 신호를 보내는 행위다. 로브를 입은 자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들을 보며 닉이 비웃었다.
“머릿수를 동원하는 건 네놈들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멍청한 것들아.”
“죽여!”
닉의 앞에 있는 로브를 입은 자가 닉에게 달려들었다.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로브를 입은 자들도 검을 빼들고 닉에게 달려들었다.
콰앙!
닉과 로브를 입은 자의 검이 부딪쳤다. 아무리 틸보다 실력이 떨어진다고 해도 과연 늑대의 송곳니의 부단장. 닉은 로브를 입은 자들의 공격을 쉽게 막아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지크나 그렌, 틸처럼 압도적인 무력을 보유하고 있지는 않은 터라 포위망에 갇히면 곧 힘이 다해 죽게 될 것이다.
원군이 없다면.
우와아아아!
숲 저편에서 함성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로브를 입은 자들이 고개를 돌렸다. 상당한 수의 용병이 숲 너머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이 자식!”
닉과 검을 맞대고 있던 로브를 입은 자가 이를 갈았다. 하지만 닉은 태연했다.
“왜 그렇게 봐? 먼저 머릿수를 들이민 건 네놈들이잖아.”
그러며 로브를 입은 자의 검을 강하게 쳐냈다.
로브를 입은 자가 크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달려오는 용병들을 쳐다봤다.
“너! 너! 너! 너!”
그가 다른 로브를 입은 자 넷을 가리켰다.
“너희 넷은 나와 같이 닉을 죽인다. 그리고 나머지는 저기 달려오는 용병들을 막아!”
명령을 내리는 것을 보니 역시 그가 우두머리였던 모양이다. 명령을 받은 자들은 망설임 없이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고작해야 어둠 속에 숨어 다니는 네 놈들이 실전으로 다져진 내 부하들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냐?”
닉이 조롱한다. 우두머리가 이를 갈았다.
“여유를 부리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개자식.”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