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3화
다행히 틸이 있는 곳은 숲 안이었다.
예전 처음 미행을 성공해 틸과 로브 놈들의 밀월을 알아냈던 곳도 숲이었기에 닉의 가슴이 뛰었다. 오늘도 저번처럼 무언가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저기 있다.’
나무들 사이로 틸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녀석이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자신의 뒤통수를 때려버린 그 개자식.
로브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 터라 예전에 자신을 비웃던 그놈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이미 닉에게는 로브 놈들의 세력 자체가 적이었다.
닉은 그들에게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커다란 덤불 뒤로 가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그리고 귀를 쫑긋 세웠다.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획에 대해서는 이쯤 하지.”
정체를 숨기기 위한 목을 긁어대는 소리.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소리다. 하지만 닉은 듣기 싫은 로브의 목소리보다 계획에 대한 대화가 끝났다는 소리에 더 열이 받았다.
‘빌어먹을! 역시 위험을 감수하고 조금 더 붙어서 미행을 했어야 했나!’
그러나 만약 그렇게 했다면 대번에 미행이 들통났을 것이다.
하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혹시나 그 계획이란 것의 일부라도 다시 언급되지 않을까 닉이 다시 둘의 목소리에 집중을 하던 때였다.
“그럼 용건은 끝인가.”
틸이 물었다.
“아니, 한 가지가 더 있다.”
“뭐지?”
로브가 불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크란 놈이 윌터, 엘리가 있는 곳의 냄새를 맡은 것 같다.”
그 소리를 들었을 때, 닉의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심장 소리가 너무 큰 것 같아 저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몸의 모든 신경은 귀에 집중됐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그리 크지 않은 틸의 목소리. 하지만 닉은 거기서 충분히 다급함을 느낄 수 있었다.
“네놈들이 잘 보호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걱정 마라. 아무리 놈이 대단한 녀석이라고 해도 금방 아이들을 찾아내진 못할 테니까. 설혹 장소가 특정당한다고 해도 아이들을 빼돌리는 건 쉬운 일이다. 대비도 되어 있고.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상대는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다. 그 무력은 절대 나보다 떨어지지 않아. 그런 녀석들을 상대로 네 놈들이 버틸 수 있다고?”
“버틸 필요 없다. 아이들을 데리고 철퇴하면 그만이니까. 상대가 아무리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라도 그 정도 임무조차 수행하지 못 할 우리가 아니다.”
“모르는 일이지.”
틸이 이죽인다. 하지만 로브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믿을 테면 믿고 말 테면 말라는 태도다. 기싸움이라도 하는지 둘의 대화가 일순간 멈췄다.
혹시라도 아이들이 갇혀 있는 장소가 나올까 닉은 숨을 죽인 채 둘의 대화를 들었다.
하지만 끝끝내 아이들이 있는 장소를 특정할 만한 말은 나오지 않았다.
로브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너는 걱정 말고 계획에나 충실해라. 정 안 된다면 닉의 딸을 거래 상대로 삼아서라도 네 아들만이라도 빼돌릴 테니.”
“그 말이 반드시 지켜져야 할 거야.”
경고를 하듯 틸이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그도 그 이상 로브 놈들을 몰아붙일 생각이 없는 듯,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다.
“한데, 정말로 닉의 딸이 지크에게 탈취당한다면 그때는 어쩔 거지? 더 이상 닉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을 텐데.”
“별 상관은 없다. 계획도 거의 최종 단계까지 무르익었으니 네가 더 이상 데네스트 산맥에 갈 필요도 없고, 그렇다면 닉의 효용가치도 거의 없지.”
“녀석이 사각뿔의 원혼을 갖고 있다는 걸 잊지 마라.”
“그래, 그건 회수를 해야지.”
닉은 조심스레 가슴 어림을 만졌다. 마법 상자의 감촉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만약 엘리를 탈취당한다면 바로 녀석을 유인하도록 하지. 그리고 함정에 몰아넣어 놈을 죽이고 사각뿔의 원혼을 탈취한다. 그럼 되겠지?”
“좋아.”
그 말을 끝으로 둘은 헤어졌다.
틸과 로브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사라진 후, 닉은 덤불 뒤에서 나왔다. 그는 아티팩트를 들고 계속해서 틸을 쫓았다.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틸이 속도를 올렸는지 아티팩트가 금방 목표를 잃고 뱅글뱅글 돌았다.
결국 오늘도 미행은 실패였다. 하지만 여느 때와 다르게 닉의 마음엔 희망이란 감정이 스며들었다.
‘지크가 엘리에 대한 단서를 찾았다고?’
둘의 다급한 대화를 생각해보면 그가 엘리를 구할 확률도 제법 높은 모양이었다.
‘과연 카르위먼의 성기사!’
이미 처음 만났을 때의 악감정은 이미 모두 사라져 있다. 남은 건 그에 대한 호의적인 감정뿐.
하지만 아직 엘리가 구출이 된 것은 아니다. 구출 과정에 엘리가 잘못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 정도는 각오를 해야 했다.
‘이대로 놈들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닌다 해도 나나 엘리가 살 가능성은 높지 않아.’
아마도 증거인멸 용으로 목숨을 빼앗을 가능성이 컸다. 혹 틸이 엘리만은 살려주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그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럴 바엔 차라리 엘리 구출을 시도하는 게 나아.’
닉은 제발 지크가 엘리를 구출할 수 있기를 기원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지크에게 맡긴 채 가만히 있을 생각도 없었다.
‘엘리가 구출되면 나를 죽이겠다고 했지.’
닉의 눈이 스산해졌다. 놈들이 자신을 어딘가로 유인하려 한다면, 엘리가 구출이 되었든 아니면 목숨을 잃었든 그들의 손아귀에 더 이상 없다는 소리가 된다.
‘그땐 가만히 있을 이유가 없지.’
놈들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
* * *
‘생각대로 됐으려나.’
숲을 벗어나는 닉을 보면서 지크는 쓰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이제 닉은 로브 놈들이 뭔가 대화를 시도하려 하면 엘리가 구출된 줄 알고 바로 녀석들을 공격할 거야.’
자신을 구속하던 것이 사라졌으니 복수심만으로 길길이 날뛸 터.
하지만 아직 완벽한 것은 아니다. 조미료를 쳐야할 것이 아직 남아 있었다.
‘분명 저쪽이었지?’
지크는 다음 목표가 있는 쪽을 쳐다봤다. 그의 입가에 히죽 소름끼치는 미소가 걸렸다.
* * *
그렌은 자신의 순찰 지역에 있었다. 하지만 닉과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의 순찰 구역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사는 이번 계획의 성사뿐. 하지만 어딘가 꼬여버린 상황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닉 그 자식은 왜 아직도 조용한 거지?’
계획대로라면 이미 닉은 틸을 발견, 사람들에게 알렸어야 한다. 정확히는 틸을 협박해 그런 식으로 상황을 진행시키는 것이지만, 어쨌든 사람들에게 알려질 상황은 그렌이 그리는 상황일 것이니 진실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한데, 이미 예상기간을 훌쩍 넘긴 상황임에도 닉은 잠잠했다.
‘정말로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건가.’
안 그래도 몬스터들에게 걸려 있던 명령을 풀어 부하들을 몰살시킨 일의 1순위 용의자가 닉이다.
‘그 녀석까지 내 계획에서 벗어나는 건가.’
그렌이 주먹을 꽉 쥐었다. 언제나 충실하게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이던 말이 자신의 손아귀를 벗어날 때의 기분은 언제 느껴도 더럽기 그지없었다.
‘일단 저번에 떠봤을 때 수상한 기색은 없었지만.’
하지만 평소보다 훨씬 어둡고 조금 초조해하는 기색이 있었다. 마치 세간에 퍼진 것 마냥 정말로 아이를 납치당한 것처럼 말이다.
‘일단 접촉을 해봐야겠어.’
혹시 지크에게 들킬까봐 최대한 접촉을 지양하고 있었지만,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온 이상 접촉을 해야 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접촉을 해야할까 그렌이 고민을 할 때였다.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렌은 흠칫 놀랐다. 상대의 기척이 너무도 가까운 곳에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건 즉, 그가 상대의 기척을 제대로 느끼지 못 했다는 뜻이다. 기색을 보면 상대가 딱히 기척을 숨기는 것 같지도 아니기에 더욱 놀랐다.
이 근처에서 이런 일이 가능한 자는 한 명 정도다. 그렌의 기분이 하염없이 곤두박질쳤다.
“아, 여기 있었군요.”
기척의 대상, 지크가 그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렌은 다짜고짜 구겨질 뻔한 인상을 폈다. 그리고 익숙한 가면을 뒤집어썼다.
“지크 씨가 아닙니까.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지크 씨가 맡은 구역은 어쩌고요.”
기분 나쁜 투는 그다지 보이지 않은 채, 하지만 약간의 핀잔은 섞어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임무를 방폐한 지크를 나무라는, 하지만 개인적인 감정은 섞지 않은 인간으로 보일 것이다.
지크가 어깨를 으쓱였다.
“구역을 벗어난 것에 대해 할 말은 없습니다만, 물어볼 것이 있어서요.”
“임무보다 중요한 일입니까?”
“그렇습니다.”
당장 피알루를 멸망시킬 수 있는 틸을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하다니. 기분 탓일까. 그렌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뭘 말이죠?”
티를 내지 않은 채 대답한다.
지크는 그렌에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대부분 저번, 몬스터의 대군을 확인했을 때의 일이었다. 그에 대한 조금은 더 자세한 정보를 지크는 원했다.
그다지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기에 그렌은 사실대로 대답했다. 고위 몬스터의 숫자와 몬스터의 군대에 대한 정보를 세심하게 캐묻던 지크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협력에 감사드립니다, 제너드 씨.”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요. 그런데 이 정보를 원하는 이유가 뭡니까?”
괜히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그렌이 은근히 물었다.
지크는 빙긋 웃었다. 그 웃음이 그렌은 불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쩌면 몬스터 군단에 대한 해결책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렌은 저도 모르게 욕설이 나오려는 걸 필사적으로 참았다.
* * *
대체 그 이유가 뭐냐며, 겉으로는 호기심을 표현하는 것처럼, 속으로는 어떻게든 그 해결책을 캐내려 노력하던 그렌에게 지크는 비밀이라는 한 단어로 입을 다물게했다.
그렌은 주먹을 휘두르고 싶은 마음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이게 성공하면 더 이상 피알루는 몬스터의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 말을 남겨놓고 지크는 떠났다. 딴에는 더 이상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하는 것 같았지만 그렌에게는 안도감이 드는 말이기는커녕 복장이 뒤집어지는 말일 뿐이었다.
한동안 지크가 사라진 곳을 노려보던 그렌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대체 무슨 해결책이지?’
데네스트 산맥에 모여 있는 몬스터 무리는 그렌 본인조차도 사각뿔의 원혼이 없다면 공략할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막강한 전력이다. 그런 몬스터 무리를 해결할 방법이라니.
‘허세인가?’
다른 이라면 정신이 나가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가 지크인 것이 문제였다.
그는 정말로 이 상황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을 들고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대였다.
‘만약 정말로 해결책이 실존하고 그 해결책이 통한다면.’
다시 한번 지크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것이다.
그렇게 둘 수는 없다.
‘당장 닉을 만나봐야겠어.’
지크가 그 해결책이란 걸 실행하기 이전에 자신이 이 사태를 해결해야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