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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421화 (421/628)

제421화

“푸흡!”

경박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 때문에 멈추려 해도 멈출 수 없는 그런 웃음이다.

배를 잡고 연신 꺽꺽거리고 있는 지크를 라일라가 한심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만 좀 웃을 수 없어?”

“아니, 큭큭큭! 나도 그만 웃고 싶은데… 이게 쉽지가 않네.”

침착하게 심호흡을 하며 웃음을 멈추려는 지크. 하지만 곧 다시 터진 웃음에 허리를 꺾었다.

“그렇게 좋아?”

“당연한 거 아냐? 그렌 제너드를 엿 먹이는 일은 내 최고의 보람 중 하나라고!”

지크는 아까 전 만났던 그렌을 떠올렸다.

“속을 살살 긁어대는데 얼굴에 티조차 내지 못하니 아주 죽을 맛이었을 거다! 제 부하 놈들을 이용해서 제 얼굴에 똥칠을 해대고 있는데 내 말이 맞다며 맞장구를 쳐줘야 하는 꼬라지라니!”

지크는 아예 바닥에 등을 대고 깔깔대며 웃었다. 그 모습에 라일라는 생각했다.

‘이 모습을 본다면 그렌 제너드의 분통이 더 터지지 않을까?’

터진다 뿐인가. 그 충격으로 쓰러져 그대로 숨이 끊어지더라도 라일라는 충분히 납득할 것 같았다.

지크가 그렌의 앞에서 모른 척 그렌 본인을 사정없이 깎아내린 후, 지크는 계속해서 이렇게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여간 통쾌한 게 아닌 모양이다.

“그럼 일단 데네스트 산맥에서 로브 놈들은 일소된 거지?”

생각 같아서는 지크가 웃음이 끝난 후에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상황을 보니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아 라일라가 입을 열었다.

“정확히는 몬스터 놈들의 근처에 있던 녀석들이지만, 그렇게 봐도 상관은 없을 거다. 몬스터들이 아니라면 놈들이 데네스트 산맥에 갈 이유가 없으니까.”

“그래도 용케도 알았네. 로브 놈들이 데네스트 산맥에 있을 걸 말이야.”

“몬스터 대군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병력이야.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더라도 쓰임새는 많지. 가령 그렌 제너드의 계획이 잘못돼 녀석에게 불리한 일이 생긴다고 해도 이 근처를 모조리 쓸어버려 없던 일로 만든다든가. 그렇게 생각하면 몬스터의 대군을 어떻게든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편이 유리해.”

지크는 고개를 돌려 데네스트 산맥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관리하는 놈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지. 물론 다른 자들이 몬스터 군단이 있는 곳을 쉽게 보지 못 하도록 순찰을 돌고 있는 놈들이 있었지만, 나한테는 이게 있잖냐.”

지크는 사각뿔의 원혼을 꺼내 보란 듯 흔들었다. 그 특유의 끈적하고 음습한 기운에 라일라가 본능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잘도 그걸 사용할 수 있었네.”

“이런 아티팩트 사용법이야 다 거기서 거기지 뭐.”

지크는 사각뿔의 원혼을 다시 마법 상자 안에 집어넣었다.

“자, 원래라면 로브 놈들을 공격하지 않게 조종당하고 있을 몬스터들이 로브 놈들을 공격했어.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원인은 사각뿔의 원혼밖에 없겠지. 그렇다면 자연히 로브 놈들의 의심의 시선은 닉을 향할 거야.”

지크는 즐거운 듯 눈을 휘며 말했다.

“그렌 제너드 놈이 필사적으로 관계없는 척하는 모습도 충분히 재미있었지만, 녀석이 분노에 울부짖는 모습도 보기 좋을 텐데 그걸 보지 못한 게 아쉬워. 뭐, 지금쯤 분에 차 씩씩대고 있을 테니, 상상이나마 녀석의 치태를 감상해볼까.”

정말로 성질이 더럽다. 라일라는 새삼 지크를 보며 그리 생각했다.

* * *

지크의 예상은 보기 좋게 들어맞았다.

콰앙!

커다란 소리에 그렌은 화들짝 놀랐다.

눈에 보이는 건 완전히 박살 나 구르고 있는 탁자의 파편들. 탁자를 부순 건 그의 주먹이었다.

‘이런, 나도 모르게!’

주먹이 아프진 않다. 고작해야 나무 탁자 하나 부숴버린 정도로 통증을 느낄 정도로 약한 단련은 하지 않았다.

문제가 있는 건 육체가 아니라 정신. 치밀어 오른 분노에 저도 모르게 탁자를 부숴버린 것이다.

그렌에게 이건 꽤 치명적인 실수였다.

‘진정해라. 이런 걸 남 앞에서 보여줄 순 없어.’

물건에 화풀이를 하는 용사라니. 그딴 건 그가 꿈꾸는 용사가 아니다. 완벽한 용사는 절대로 자신의 감정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젠장, 지크 모어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야!’

어떻게든 마음을 추스르려 했지만 지크의 얼굴만 생각하면 또다시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심호흡을 하며 어떻게든 분노를 내리누르려 했다.

똑! 똑!

하지만 그때 들려온 노크 소리가, 분노 위에 간신히 생성되려던 얇은 인내의 막을 깨버렸다.

“누구야.”

절로 싸늘한 목소리가 나온다. 문 밖의 인물도 당황했는지 바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렌은 성큼성큼 문으로 다가갔다.

벌컥!

문을 열자 노크 소리의 주인이 보였다.

그렌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노크를 한 사람은 라라였다. 잔뜩 열이 받은 지금, 봐서 과히 기분이 좋은 자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짜증이 더 치밀어 올랐다.

“아, 저, 안녕, 그렌….”

“무슨 용건이야?”

저도 모르게 싸늘한 말이 나갔다. 지금껏 라라를 조금씩 냉대해 온 그렌이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위압스럽게 말한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안 그래도 지크의 조롱 때문에 열이 받은 판국에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은 라라가 눈앞에 나타나니, 천하의 그렌도 감정 조절을 좀처럼 할 수가 없었다.

라라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어, 네 방에서 큰 소리가 나길래. 혹시 무슨 일이 있나 해서….”

“아무 일도 없어.”

그리고 문을 닫았다. 문 밖으로 라라가 떠나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렌은 무시했다.

‘일단 닉을 만나 보자.’

그래서 녀석을 떠봐야 한다. 정말로 그가 몬스터를 이용해 자신의 부하들을 죽였는지.

‘한데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 한다면?’

그렇다면 상황은 더욱 골치 아파진다.

그렌은 씨근덕거리며 탁자의 파편을 거칠게 짓이겼다.

* * *

터덜터덜 걷는 발걸음이 무겁다. 시선은 앞을 향하고 있지만 동공의 빛은 흐릿하다. 세상에 있는 온갖 부정적인 기운을 모두 지고 있는 마냥, 라라는 추욱 처진 어깨를 흔들며 길을 걸었다.

아까 봤었던 그렌의 눈빛이 생생했다. 서늘한 그 눈빛은 뚜렷한 방해꾼을 보는 시선이었다.

지금껏 자신에 대한 그렌의 태도가 조금씩 악화되어 왔다는 것은 충분히 느끼고 있었지만, 그런 노골적인 시선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역시 내가 싫어진 걸까.’

지금까지는 필사적으로 부정해 온 진실이 고개를 든다. 자신을 파티에서 쫓아낼 수도 있다는 걱정이 진한 현실미를 띄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자신만이 외면하고 있었을 뿐,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사태가 악화된 건지도 모른다.

‘그럼 난 어떻게 해야….’

라라가 고민에 빠져 있을 때였다.

툭!

무언가 어깨에 닿았다. 라라는 흠칫 놀랐다. 본능적으로 허리춤에 있는 검에 손을 뻗었다. 그러다 자신이 넋 놓고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손을 멈췄다.

‘사람과 부딪친 건가?’

높은 수련을 쌓은 라라로서는 수치스럽기까지 한 일이다. 라라는 바로 자신과 부딪친 사람에게 사과를 하려 했다.

그러나 상대의 얼굴을 본 순간 목구멍 바로 앞까지 올라왔던 사과의 말이 놀라 다시 들어갔다.

“괜찮습니까, 브라우닝 씨?”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는 자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한스였다.

* * *

지크는 묘한 눈으로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두 명을 쳐다봤다.

원형 테이블을 중심으로 지크의 오른쪽에는 한스가 앉아 있었다. 그것까지는 상관없다. 애초에 이곳에 온 이유가 한스를 만나러 온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왼쪽에 앉아 있는 라라 브라우닝은 지크의 예정에 없던 사람이었다.

본인도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혼란스러운 것인지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좌우를 연신 두리번거렸다.

“어떻게 된 거냐?”

지크가 한스에게 물었다.

“거리를 걷고 있는데 꽤 불안정하게 걷고 있길래 말입니다. 지금 도시 치안도 좋지도 않고, 불안해서 일단 데려왔습니다.”

‘무슨 버려진 강아지 주워오는 것도 아니고.’

저 녀석도 은근히 막무가내 성질이 생긴 것 같았다.

‘그래도 정말 뭔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야.’

지크는 라라를 쳐다봤다.

말만 들어본다면 한스가 일방적으로 라라를 데려온 것 같지만, 적어도 라라의 무언의 동조가 없었다면 이 자리에 그녀가 등장하진 않았을 것이다.

한스가 싫다는 여자 끌고 오는 놈도 아니고 라라도 무턱대고 끌려갈 여자가 아니었으니까.

‘대충 예상이 가긴 하지만.’

안 그래도 아까 그렌의 속을 박박 긁어놓은 참이지 않던가. 그때의 분노가 괜히 라라에게 튄 모양이었다.

‘그래도 용사 낯가죽을 뒤집어쓰고 다니는 녀석이 상관없는 사람에게 화풀이라니.’

그만큼 녀석에게 있어 라라의 중요성이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그렌의 분노가 컸던 것일까.

‘둘 다일지도 몰라.’

하지만 적어도 그렌의 분노가 상당히 크다는 건 확실하기에, 지크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때문에 갑자기 대면하게 된 라라에게도 상당히 온건하게 나갔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브라우닝 씨? 그래도 안면이 있는 사이니, 고민이 있으면 상담 정도는 해줄 수 있습니다.”

“…….”

라라는 고개를 푹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녀의 내면은 복잡했다. 일단 한스의 제안대로 그를 따라오긴 했지만, 자신이 여기서 뭘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눈앞의 상대는 지크. 그녀가 그리 좋아하지 않는 상대였다.

결국 그녀는 일어섰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괜히 불편을 끼쳐드렸네요. 죄송해요, 역시 저는 가볼게요.”

그리고 옆에 놓아두었던 검을 들고 몸을 돌리려 했다.

“제너드 씨와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나요?”

그녀가 고개를 팍 돌려 지크를 쳐다봤다. 자신의 내심이 들킨 것에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그녀의 마음속으로 온갖 상념들이 소용돌이쳤다.

어떻게 알았냐며 물어야 할까. 하지만 그러면 그녀가 그렌과 트러블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사실이 그렇다고 해도 타인에게 동료 그것도 좋아하는 이성과의 트러블을 자기 입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이 꺼려졌다.

“앉으세요. 마침 대화할 거리도 있는 듯하니.”

잠시 주저하던 라라는 결국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정작 그때까지 라라를 데리고 온 한스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태연한 모습이 얄미워 라라가 그를 살짝 흘겨봤다.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할 텐데, 그거야 쉽습니다. 척 봐도 보이니까요. 오히려 제너드 씨와 그런 분위기를 풍기고 눈치채지 말아달란 게 더 무리한 요구 아닌가요?”

라라는 고개를 떨궜다. 결국 제3 자가 보기에도 티가 날 정도로 그렌과 그녀의 사이에 좋지 않은 기류가 흘렀다는 뜻이 아닌가.

“그런데 오늘은 뭔가 더 심각해 보이는 걸 보니, 트러블이 조금 더 심해진 모양입니다.”

라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지크의 말을 부정하고 싶지만, 사실을 부정할 순 없었다.

그때 지크가 슬그머니 그녀에게 권했다.

“그래도 인연이 있으니 충고를 드립니다만, 한번 거리를 두는 게 어떻습니까?”

“…거리를 둬요?”

“네. 서로 간에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한 상황에서 억지로 붙어 있으면 오히려 안 좋은 작용이 일어날 수 있죠. 그럼 반대로 조금 거리를 두는 겁니다. 아아, 물론 완전히 헤어지라는 게 아니에요.”

라리의 표정이 안 좋아지자 지크가 손을 휘저었다.

“그저 감정이 가라앉을 정도까지 서로의 시간을 갖자는 거죠. 나중에 냉정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말이에요. 지금처럼 서로 간에 감정이 치솟아 올라 있을 때보다는 훨씬 더 생산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겁니다.”

지크의 말이 슬금슬금 라라의 심부로 기어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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