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9화
“그렇다면 내가 그놈을 이용한다고 했을 때 언질이라도 줬어야지.”
“그건 미안하군. 그런데 의외로 침착한 것 아닌가? 그 녀석은 자네를 속이려고 한 놈이잖나.”
“내가 이미 그놈을 이용하고 있는데 그런 걸로 원한을 품을 필요는 없지.”
“반응이 담백하니 재미가 없는데.”
로브를 입은 자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야유를 보낸다. 그러나 틸은 콧방귀를 뀌었다.
“네놈 입으로 말을 하지 않았나. 놈이 쓰레기라고. 그런 감상을 네 놈만 안고 있을 줄 알았나?”
“우리 단장님께서도 일찌감치 그놈이 쓰레기인 걸 알고 계셨다?”
“그 녀석과 붙어 다닌 게 한세월이다. 능력은 뒤떨어지는 주제에 품은 욕망만 더럽게 큰 게 바로 보이는데 모를 리가. 그놈이 내 뒤통수를 치려 했다고 해도 ‘그랬군’ 정도의 생각밖에 들지 않아. 네 놈의 말대로 쓰레기 같은 놈이니까.”
“큭큭! 역시 우리가 협력자 하나는 잘 골랐다니까.”
로브를 입은 자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토했다. 여전히 목소리를 긁어 대 웃음소리마저 기괴했지만 로브를 입은 자가 얼마나 이 상황을 재미있어 하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것보다 나는 나보다 그놈에게 먼저 협력을 제안했다는 게 불쾌하다만.”
말은 불쾌하다고 하지만 틸의 손이 검 손잡이에서 어른거리는 게 분노를 넘어 증오를 느끼는 것 같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깨달은 로브를 입은 자가 양손을 내밀었다.
“진정하라고, 친구. 아니, 그놈을 얼마나 쓰레기로 보면 놈에게 먼저 제안을 했다는 것만으로 그렇게 분노하는 건가!”
그리고 다시 미친 듯이 웃는다. 하지만 틸의 손이 결국 검 손잡이를 잡자 얼른 입을 열었다.
“네 능력이 놈보다 떨어져서 그런 건 아니다. 우리가 놈에게 손을 내민 이유는 충분히 동료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자기 이득을 얻으려 할 벌레 같은 놈 같아서지. 너도 그 과 동류의 놈임을 미리 알았다면 당연히 너한테 먼저 제안을 했을 거다.”
“그 말은 나도 벌레 같은 놈이라는 소린가?”
“인정할 건 인정해라. 세상에서 너같이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의 뒤통수를 치고 팔아먹으려 하는 놈을 벌레 같은 놈이라고 부른다.”
누가 봐도 지독한 경멸의 말이다. 하지만 틸은 순순히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틀린 말은 아니군.”
“이렇게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굉장히 좋아. 우리가 정말 새로운 협력자를 잘 골랐어. 닉 그놈은 이런 말을 했다면 길길이 날뛰었을 텐데 말이야.”
“그놈이 주제파악을 좀 못 하긴 하지.”
틸이 순순히 긍정했다.
“그럼 놈에 관한 건 그게 끝인가? 더 중요한 건 없겠지?”
틸이 이 주제를 정리하려는 듯 확인차 물었다. 하지만 로브를 입은 자의 입에서 나온 말에 멈칫했다.
“대충 그렇다. 뭐, 녀석에게 사각뿔의 원혼을 주긴 했지만.”
“…미친 건가?”
틸이 물었다. 억양은 낮았지만 그가 큰 충격을 받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 귀한 걸 놈에게 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자자, 흥분하지 말라고.”
로브를 입은 자가 틸을 진정시켰다.
“일단 그에 관해서는 변명하지 않겠다. 우리가 너무 성급했어. 그놈이 그런 쓰레기인 줄 진작에 알았다면 그 물건을 넘기지 않았을 텐데.”
“지금 그걸 말이라고…!”
“침착해. 어차피 놈은 우리가 충분히 조종할 수 있어. 게다가 우리는 엘리라는 인질이 있잖은가.”
“음.”
“차라리 잘 됐어. 어차피 이 모든 일을 놈에게 뒤집어씌울 작정이었는데, 사각뿔의 원혼을 놈이 가지고 있다면 변명의 여지도 없겠지. 뭐, 애초에 놈이 배신자가 아닌 것도 아니고. 조사를 하면 할수록 놈이 배신을 한 정황만이 나오겠지.”
“…정말로 알뜰하게도 써먹는군.”
“쓰레기 중에서도 쓸 만한 쓰레기는 있는 법이지. 잘 살려면 그런 것들을 잘 이용하는 게 중요해.”
“그건 동감한다. 그러니 내가 닉 그놈을 여태껏 써먹었지.”
“자네는 정말로 우리와 마음이 맞는군.”
“헛소리. 어쨌든 아무리 녀석이 무능하다고 해도 계획에 대해서 알지는 못하게 해야 해. 어떤 방해가 들어올지 모르니까.”
“난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만. 그래도 알았다. 주의하지. 혹시 또 궁금한 점이 있나?”
“없다.”
“좋아. 그럼 다음에 또 보자고.”
그 말을 남기고 로브를 입은 자는 숲 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틸도 로브를 입은 자의 반대편 숲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숲 속에는 평소처럼 풀벌레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닉이 수풀 속에서 나온 건 풀벌레들이 합창을 시작하고도 한참 이후였다.
그의 얼굴은 마치 시체가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뚝! 뚝!
그의 주먹에서 핏줄기가 떨어진다. 어찌나 주먹을 세게 쥐었는지 손톱이 손바닥을 말 그대로 헤집고 있었다.
그러나 닉이 고통을 느끼는 기색은 없었다. 아찔하게 타오르는 분노가 모든 고통을 차단하고 있었다.
‘그래, 그랬단 말이지.’
두 놈의 대화로 진상은 대충 파악했다.
‘내 납치 시도는 실패했고 그 때문에 놈들이 바로 틸을 포섭했던 거야.’
정확히 계기를 통해 일이 그렇게 진행된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중간의 사건 따위 알 필요도 없었다.
중요한 건 자신이 거하게 뒤통수를 맞았다는 것.
그리고 틸과 로브를 입은 자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았다는 것이다.
“좋아. 네놈들이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닉이 뿌드득 이를 갈았다. 날카로운 소리가 당장이라도 치아가 부러질 것 같다.
날카로운 분노를 분출하며 닉도 다시 숲 안으로 사라졌다.
* * *
부스럭!
수풀이 흐트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렇게 잘린 나무 밑동에 앉아 있던 로브를 입은 자가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자는 틸이었다.
방금 전 헤어진 두 사람이 왜 다시 만난 것일까. 혹시 아직 나누지 못한 이야기가 있는 것일까.
하지만 둘의 상태는 이상했다. 아까는 협력을 하는 사이면서도 서로를 결코 믿지 않는, 칼끝에 서 있는 것 같은 날카로운 기류가 둘 사이에서 흘렀지만 지금은 그 기류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오셨군요.”
로브를 입은 자의 말투도 달라졌다.
아까처럼 목을 긁어내는 소리가 아닌, 평범한 목소리로 존대를 사용한다. 로브를 입은 자가 로브를 젖혔다.
놀랍게도 그 안에서 나온 건 지크의 얼굴이었다. 그는 밑동에서 일어나 틸에게 다가갔다.
아까까지만 해도 찬바람이 쌩쌩 날리는 얼굴로 무게를 잡던 틸이었지만, 지금 그의 얼굴은 짙은 피로에 찌들어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틸 씨.”
“저한테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까?”
“전혀요. 저도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정말 극 쪽으로 방향을 틀어도 괜찮으시겠던데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방금의 장면을 위해서 얼마나 연습을 했던가. 차라리 몬스터 대군에게 검 한 자루만 들고 돌격하는 일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틸은 고생을 했다.
“그나저나 일은 성공했습니까?”
“물론입니다. 우리가 한 모든 대화를 닉이 들었습니다.”
지크는 확신에 차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닉이 틸을 미행했던 것처럼, 지크도 닉을 미행했던 것이다.
닉이 틸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는 것을 확인한 후에 지크는 로브를 뒤집어쓰고 틸을 만났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그 고생을 해 익힌 연기가 쓸모없지 않았다는 사실에 틸은 안도했다.
“효과가 있겠죠?”
“물론이죠. 이걸로 닉은 협력자를 믿지 못하게 될 겁니다. 적들을 이간시키는 건 어떤 상황에서도 훌륭한 계책이니까요.”
지크가 이 웃긴 연극 계획을 짠 이유였다.
하지만 계획의 성공을 들어도 틸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지크는 그 이유를 짐작했다.
“한때의 동료를 너무 매도한 것 같아 찝찝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틸이 허탈하게 말했다. 그러나 지크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사람의 마음이란 건 개인마다 모두 다르니까요.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마음이 계획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상관없습니다.”
스스로도 한심하다고 느낀 상념을 지크가 긍정해주자 틸은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 같았다.
‘과연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야.’
지크의 동료들이 들었다면 오싹해질 감상을 안는 틸이었다.
“게다가 수확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솔직히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이렇게 쉽게 손에 넣으니 맥이 좀 빠지더군요.”
“그럼….”
“맞습니다. 사각뿔의 원혼을 얻었습니다.”
틸이 놀란 눈초리로 지크를 쳐다봤다.
그건 지크의 작전이었다.
일부러 라일라가 개량한 아티팩트를 닉에게 건넨다. 그리고 틸을 미행하기 쉬운 시간대에 틸을 보낸다.
그러면 당연히 닉은 틸을 미행할 것이다.
틸에게는 닉이 몰래 넣어 놓은 일각뿔의 한탄이 있으니, 미행하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미행을 하려면 닉도 사각뿔의 원혼을 몸에서 떨어뜨려야 한다. 때문에 닉은 사각뿔의 원혼을 땅속에 묻었다.
그리고 지크는 그 모든 걸 보고 있었다.
이후의 일은 간단했다. 지크는 사각뿔의 원혼을 챙겨 다른 곳에 숨기고는 닉을 미행했다.
“하지만 사각뿔의 원혼이 사라진 걸 안다면 녀석이 뭔가 이상 행동을 하지 않겠습니까?”
“괜찮습니다. 가짜를 넣어놨거든요.”
“가짜요?”
“그렇습니다. 사각뿔의 원혼의 형태를 흉내 낸 외형 안에 일각뿔의 한탄을 넣은 녀석입니다. 일각뿔의 한탄과 사각뿔의 원혼이 뿜어내는 기운이 같기 때문에 직접 힘을 사용하려 하지 않는 이상 눈치채긴 어려울 겁니다. 이야, 일각뿔의 한탄의 크기가 사각뿔의 원혼보다 작은 게 다행이었습니다.”
대체 이 사람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보고 있는 것일까. 틸은 진심으로 지크와 적이 아닌 것에 대해서 감사했다.
“그렇다면 몬스터 무리가 피알루를 침공할 가능성은 없어졌군요. 다행입니다.”
최대의 위기가 사라졌다는 것에 틸은 안도를 느꼈다. 하지만 지크는 고작 그 정도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죠. 그리고 둘 사이를 이간시킬 계책을 또 하나 실행시킬 수 있게 됐습니다. 겸사겸사 로브 놈들의 세력도 깎고 말이죠.”
지크가 웃었다. 틸이 주춤했다.
지크를 무척이나 좋게 보고 있는 데다가 경험도 많은 틸이 주춤거릴 정도로, 지크의 웃음은 소름 끼쳤다.
* * *
데네스트 산맥 중 거대한 산봉우리 하나에 엄청난 몬스터들이 몰려 있었다.
일각뿔의 한탄이 뿜어낸 기운이 모은 몬스터들이었다.
자잘하고 약한 몬스터들부터 엄청나게 강한 몬스터들까지 모여 있는 그 모습은, 보는 사람의 오금이 저리게 할 만큼 끔찍한 모습이었다.
한데, 그런 무리들 사이로 웬 인영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하나같이 로브를 깊게 눌러쓴 자들.
지크가 보통 로브 놈들이라고 부르는 자들이었다.
주변에 접근하는 모든 인간들을 쳐 죽일 것 같은 몬스터들도 이상하게 그들만큼은 건들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에게 그들을 죽이지 말 것을 명령받은 것처럼.
로브를 입은 자들도 그걸 아는지 몬스터들 사이로 움직이는 것에 대해 그 어떤 위기감도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그들은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는 것이 늦었다.
“응?”
한 로브를 입은 자가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타이탄이 보였다. 사각뿔의 원혼의 능력에 잠식되어 마치 인형처럼 서 있는 몬스터.
한데, 그 인형처럼 있어야 할 몬스터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오싹!
로브를 입은 자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