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6화
“솔직히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틸의 목소리가 쩍쩍 갈라진다. 배신감과 슬픔, 분노 등이 어우러져 그의 목소리에 힘을 빼고 있었다.
“녀석과는 오랜 사이입니다. 요 근래 용병단의 운용 문제로 계속 충돌을 해서 악감정이 생긴 건 맞습니다만, 설마 이런 일을 벌이다니.”
“사람 마음이라는 게 알기가 쉽지 않지요.”
그렇기 때문에 세상엔 배신도 많고 피해자도 많은 법이다.
“아직 지크 씨보다 닉을 믿는 마음이 더 큽니다. 아니, 믿고 싶은 마음이라고 해야겠죠.”
틸은 마치 신관에게 자신의 죄를 고하는 죄인 같았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틸 씨는 결국 저를 믿었습니다. 사람 마음이라는 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법. 따라서 감성에 흔들리지 않는 강철 같은 이성이 일을 행할 때 중요한 법이죠. 틸 씨는 그것을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정황 증거가 있으니 말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세상에는 눈앞에 진실을 들이 밀어줘도 자기 마음 속에 있는 거짓된 진실로 눈을 돌리려 하는 자들도 많으니까요.”
틸은 조곤조곤 자신의, 조금은 무례한 발언도 이해를 표하며 받아들이는 지크를 쳐다봤다.
처음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 처음엔 정말로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인가 의구심이 들 정도로 과격하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지금은 마치 모든 죄를 듣고 용서해주는 격 높은 신관 같다.
‘이게 카르위먼의 성기사의 진면목인지도 모르지.’
폭력이 필요할 때는 피도 눈물도 없이 검을 휘두르지만, 상처 입은 자가 있다면 전혀 다른 얼굴로 그 상처를 보듬어 주는 자.
물론 지크야 앞으로 틸을 움직여 그렌을 엿 먹여야 하니 그가 망설임 없이 움직이도록 밑판을 까는 것에 불과했지만.
틸은 문득 자신이 이렇게 지크와 마주 앉을 때까지 온 상황을 반추해봤다.
정체불명의 쪽지와 함께 배달된, 지금은 죽은 부인의 유품. 그리고 아들인 윌터가 한시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은 물품이기도 하다. 아들이 납치되었다는 증거로서 그것보다 확실한 것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틸은 쪽지에 적힌 대로 도시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무책임하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틸에게 그만큼 윌터란 존재는 소중했다. 게다가 믿는 바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닉이라면 내가 없어진 용병단을 잘 이끌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의견이 달라 서로 감정이 상한 지금도 둘은 서로를 인정하고 있었다.
아니, 적어도 틸은 그랬다. 닉의 능력이라면 자신이 갑작스럽게 도시를 떠나도 용병단을 확실히 추스를 수 있을 거라고.
물론 처음 윌터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자연스럽게 닉의 딸인 엘리의 납치 가능성도 같이 떠올랐다.
윌터는 엘리와 함께 옆 도시로 가던 중 습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컸고 그렇다면 당연히 엘리도 같이 납치를 당하거나, 최악의 경우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닉도 같은 협박 편지를 받지 않았을까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편지에 아무도 모르게, 특히 닉이 모르게 도시를 떠나라는 말이 적혀 있는 걸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협박 편지를 보낸 범인이 볼 일이 있는 건 틸 자신뿐이라고. 아마 닉은 이 납치사태에 대해 모르지 않을까.
그것이 닉에게 충분히 용병단을 맡길 수 있다고 판단한 이유였다.
그리고 틸은 굳게 다짐했다. 혹시 엘리도 윌터와 함께 납치된 것이 맞다면,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엘리마저 구해내겠노라고.
‘한데, 설마 놈이 협박 편지를 보낸 놈일 줄이야.’
그때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어쨌든 틸은 협박 편지에 따라 순순히 도시를 떠나려고 했다.
소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소란이 일어날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성문을 나갈 때 조심할 자라고 해 봐야 성문의 경비병뿐이다. 틸의 얼굴을 아는 그들이 도시 밖으로 나가는 걸 막을 리 없었다. 언제나 있을 순찰이라고 생각할 테니.
다른 때와 달리 혼자 나가는 걸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 둘러대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그렌 제너드를 만났다는 것이다.
당연히 틸은 그렌과 관련되지 않고 조용히 도시를 나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렌이 들고 있던 아티팩트가 자신을 가리켰다.
사각뿔의 원혼은커녕 일각뿔의 한탄도 당시 그의 수중엔 없었다. 적어도 그가 가진 기억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뚜렷하게 가리키는 아티팩트를 보고 틸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걸.
그러나 거기서 틸이 무언가를 할 수는 없었다. 그렌이 동행을 요구했지만, 그 요구를 따른다면 편지의 지시를 어기게 된다. 그러면 자신의 아들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틸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강행돌파.
그렌의 실력은 보던 대로 엄청났다.
하지만 그렌 혼자뿐이라면 어떻게 떨쳐낼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지크가 달려오자 틸은 격렬한 위기감에 휩싸였다.
둘이 협공을 한다면 아무리 그라도 벗어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던 것이다.
그때, 전투에 끼어든 몬스터 무리. 정확히 지크와 그렌만 공격하는 그 몬스터 무리를 보고 틸을 알 수 있었다. 저것까지 범인의 계획이란 것을.
그러나 여전히 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는 그 틈을 타 몸을 뺐다.
도시를 탈출한 틸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윌터와 엘리가 향한 도시였다. 일단 아이들이 정말로 납치되었는지 확인을 해야 했다.
도시에 들어가 예정된 숙소에 확인을 했지만 그곳에 아이들은 없었다. 그때 틸은 정말로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 누군가 틸에게 접근했다.
“설마 제가 그 곳에 갈 줄 알고 사람을 준비해 놓았을 줄은 몰랐습니다.”
“아이가 납치된 걸 알았을 때 바로 아이가 있을 곳을 확인하는 거야 부모들이라면 모두 할 일 아닙니까. 그래도 정말로 당신이 그 곳에 갈지 확신하진 못했습니다. 다만, 준비해놓을 가치는 충분하다고 판단했죠.”
윌터와 엘리를 납치에서 구한 후, 지크는 원래 아이들이 머물러야 할 숙소의 주인과 종업원에게 꽤 거금을 주고 나중에 찾아올 사람에게 편지 한 통을 줄 것을 요구했다.
윌터와 엘리라는 아이들을 찾는 거구의 남자가 혼자 찾아 올 때만 건네주라는 조건과 함께.
그 편지엔 윌터가 가지고 있던 또 다른 물건이 편지와 함께 담겨 있었다. 여타의 대책이 없던 틸은 편지의 조건대로 따랐다.
그리고 그는 지크를 만날 수 있었고, 모든 진상을 들을 수 있었다. 아이들과 재회한 건 물론이었다.
납치된 줄 알았던 아이들을 만나 세상 모든 걱정을 떠안은 것 같은 시름이 사라진 건 좋았지만, 틸은 지크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지 못 했다.
틸과 닉의 인연은 그만큼 깊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크가 말한 정황 증거들이 그를 몰아붙였다.
먼저 틸이 그렌과 싸우게 만들었던 아티팩트의 움직임.
그건 어느샌가 틸의 마법 상자 안에 있던, 용병단의 자금이 들어있는 여러 꾸러미 중 하나에 들어 있던 일각뿔의 한탄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뭔가를 넣을 수 있는 건 용병단의 내정을 맡아 종종 그 꾸러미를 가져가는 닉이 가장 유력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닉을 범인이라고 낙인 찍을 수는 없었다.
닉도 누군가에게 속거나 바꿔치기 당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크를 따라 순찰을 나온 닉의 행동을 봤을 때, 틸의 의심은 더 깊어졌다.
멀리서 숨어 닉의 행동을 관찰한 틸은 닉의 행동이 지나치게 여유롭다는 걸 알아챘다.
용병단의 단장이 의심스럽게 도망친 상황이다. 거기에 틸과 닉은 비록 지금은 많이 엇나가 있지만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깊었다.
걱정을 하는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저렇게 여유 있게 돌아다닐 수 있을까?
틸이 닉과 같은 상황에 빠져 있다면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지크가 말하길, 지금 도시에서는 틸 자신이 사각뿔의 원혼을 가진 도시 습격의 원흉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의 순찰은 자신이 몬스터를 부리기 위해 데네스트 산맥으로 향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하는 것이라 했다.
지크의 말을 믿지 않더라도 닉이 바깥에 나와 있는 건 적어도 순찰을 하기 위해서일 터.
그러나 닉의 움직임은 절대로 순찰을 하는 자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마치 몬스터의 습격 같은 건 있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런 의심스러운 광경이 보이자 틸도 자연스레 닉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지크의 말에 설득력이 생겼다.
그때, 지크가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자신에게 한 가지 계획이 있으니 그걸 실행해보자는 것이었다.
닉이 정말로 배신자라면 그때 분명 꼬리를 드러낼 거라고.
깊이 고민을 한 틸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계획의 한 부분이 저번에 있었던 닉을 속이는 작전이었다.
“솔직히 이런 짓을 더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엘리가 우는 모습을 보는 것도 가슴이 아프고요.”
아무리 계획에 필요한 일이었다지만 엘리가 가장 아끼는 옷을 강탈한 것이다.
최대한 어르고 달래며 다른 예쁘고 좋은 옷들을 사준 후에 빼앗았지만 빼앗은 건 빼앗은 것이다.
한동안 우는 엘리를 달래기 위해 틸과 용병들은 진땀을 흘려야 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과격한 방법은 앞으로 최대한 지양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효과는 톡톡히 봤죠. 닉이 확실한 충격을 받았으니까요.”
그에 관해서는 틸도 긍정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닉을 협박해서 상황을 휘저어야죠. 뒤에 있는 닉의 협력자들이 튀어나올 때까지요.”
“정말로 그런 놈들이 있을까요?”
“분명히 있습니다. 닉을 이용해 당신을 몰락시키려는 존재들이요.”
“만약 그런 놈들이 있다면, 절대로 가만히 두지 않을 겁니다.”
지금껏 음울한 기운만을 뿌리고 있던 틸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광폭하고 파괴적인, 폭력과 피의 길을 걸어온 자만이 흘릴 수 있는 그런 살기였다.
“분명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지크는 단언했다.
* * *
틸이 있는 건물에서 나온 지크는 피알루로 향하기 시작했다.
‘일단 첫 계획은 잘 끝마쳐졌군.’
이걸로 닉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갈피를 잡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지크는 이것으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조금 더 휘둘려줘야겠어.’
아마도 그렌과 로브 놈들은 지크 자신을 극히 경계하고 있을 것이다.
그가 박살낸 로브 놈들의 계획들이 어마어마하니 자신이 있는 곳에서는 쉽게 닉과 접촉하지 못할 것이다.
지크가 로브 놈들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일 터.
‘하지만 계획이 어그러지기 시작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
사실 지크는 이번 계획이 그렌 혼자서 꾸민 것이 아닐까 의심도 했었다.
하지만 일각뿔의 한탄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몬스터들이 그렇게 계속해서 모인 걸 보면 데네스트 산맥 여기저기에 그 일각뿔의 한탄이 널리 퍼져 있는 건 맞아. 하지만 그렌이 그걸 혼자 뿌리진 못했을 거야.’
그렌은 도시에서 꾸준히 목격됐으니 그 많은 걸 뿌릴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미리부터 준비해놨을 가능성도 적다. 첫 번째 몬스터 침공은 바람의 나무의 폭주라는, 로브 놈들도 예측하지 못한 상황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그 첫 번째 몬스터 침공을 바탕으로 계획을 새로 만들었겠지.’
그렇다면 일각뿔의 한탄은 첫 번째 몬스터 침공 이후에 뿌려졌다는 게 되고, 그렇다면 상당한 인력이 필요로 하다.
‘분명 그렌 녀석을 돕는 세력이 있어.’
그리고 그건 로브 놈들일 게 분명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