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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415화 (415/628)
  • 제415화

    시청에서 나온 닉은 터덜터덜 걸음을 옮겨 자신의 담당 지역으로 이동했다.

    걸음을 계속 옮기고 일단 아티팩트도 다시 작동시켰지만, 그의 움직임은 마치 영혼이 빠진 것 같았다.

    ‘어떻게 하지?’

    오로지 그 생각뿐. 어느새 그는 허수아비의 앞까지 돌아와 있었다.

    여전히 피 묻고 찢긴 딸의 옷을 입고 묵묵히 서 있는 허수아비. 닉은 그 모습이 마치 자기를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스릉!

    검을 빼들었다. 하지만 바로 검을 휘두르진 않았다.

    조심스럽게 딸의 옷을 벗겨냈다. 남은 건 어설프게 만들어진 볼품없는 허수아비의 몸뚱아리뿐.

    이제 망설일 건 없다.

    콰앙!

    닉의 검이 허수아비를 때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막강한 힘이 허수아비를 수없이 가격했다.

    그것은 산산이 부서진 나뭇조각으로 변해 주변에 흩어졌다.

    하지만 닉은 그것만으론 만족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그는 작은 나뭇조각 하나하나를 잘근잘근 짓밟아댔다.

    “후우! 후우!”

    닉이 숨을 몰아쉰다. 고작 이 정도로 힘이 든 건 아니었다.

    틸에 비해 약하고 평소 용병단의 내정을 맡는 이라고 해도 늑대의 송곳니의 어엿한 부단장이다. 지금의 과호흡은 폭발한 감정의 산물이었다.

    콰드득!

    신경질적으로 나무조각 하나를 더 짓밟은 후, 닉이 고함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

    그건 지금 닉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하는 포효였다.

    그의 손에 들린, 피 묻고 찢긴 딸의 옷이 청승맞게 흔들렸다.

    * * *

    날이 어두워졌다. 모포를 깔고 모닥불 하나를 피워놓은 채 닉은 생각에 잠겼다.

    임무 따위는 상관없었다. 애초에 원흉이 그 자신인데 찾긴 뭘 찾는다는 말인가. 그의 생각은 계속 딸의 행방만을 쫓고 있었다.

    저녁으로 먹기 위해 모닥불 옆에 세워놓은 고기꼬치들이 기름을 떨어뜨리며 노릇노릇 구워지고 있었지만 그 향긋한 냄새도 그의 사고를 방해하지 못했다.

    ‘혹시 정말 틸이 범인인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닉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정말로 녀석이 범인이라면 내 편지대로 움직일 리가 없어.’

    틸의 탈주는 닉의 짓이었다. 그에게 쪽지로 윌터의 납치를 알린 후, 아무 말 없이 도시 밖으로 탈주를 하라고 시켰다.

    윌터의 납치 성공을 알리는 편지를 받았을 때 함께 동봉되어 있던, 윌터가 항상 갖고 다니던 어머니의 유품을 쪽지와 함께 보내 납치의 설득력을 높였다.

    마치 닉이 지금 딸의 옷을 보고 납치의 가능성을 높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뜻대로 틸은 몬스터 습격 사건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몰렸다. 그런 판국이니, 아무리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 보이는 닉이라도 틸을 의심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면 혹시 협력자가?’

    그의 뜻을 알아채고 접근해서 여러 가지 힘들을 제공해 준 협력자.

    그는 닉의 계획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그가 배신을 했다면 도중에 자식들이 납치된 것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왜?’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사각뿔의 원혼이라는 엄청난 아티팩트를 주면서 자신을 움직였는데, 바로 뒤통수를 친다?

    ‘그럴 이유가 있나?’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들이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이유도 뚜렷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의 뒤통수를 치는 것도 그들에게 뭔가 이득이 되는 걸 수도 있다.

    ‘이 개자식들이!’

    그들이 납치범들이 분명하다고 생각을 한 닉의 화가 치솟았다.

    그때였다.

    뚜둑!

    무언가가 꺾이는 소리가 들렸다. 닉의 고개가 돌아갔다.

    누군가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방금의 소리는 그 자가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밟아 난 소리 같았다.

    닉이 바로 옆에 놓인 검을 잡았다. 민첩한 움직임이 절대 그도 약한 자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

    “누구냐!”

    늦은 시간에, 그것도 몬스터가 출몰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구간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당연히 잔뜩 경계심이 일었다. 게다가 상대는 로브를 입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혹시 저놈, 협력자인가?’

    엘리를 납치한 후 본격적으로 마각을 드러내기 위해 찾아온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 자는 천천히 모닥불 근처까지 걸어 왔다. 그리고 얼굴을 덮고 있는 로브를 벗었다.

    닉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너, 너….”

    “잘 지냈냐?”

    로브를 벗은 자, 틸은 서늘한 말투로 닉에게 말했다.

    닉은 혼란에 빠졌다.

    대체 왜 틸이 여기 나타난단 말인가. 그는 자신의 명령에 따라 지정된 곳에서 조용히 대기를 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틸은 닉이 놀라든 말든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앉는다.”

    그리고 근처에 나무를 하나 잘라내 모닥불 옆, 닉의 맞은편으로 내던졌다.

    의자 대용이었다. 그는 가지를 대충 친 후 나무에 앉았다. 그때까지 닉은 멍청하게 틸이 하는 양을 쳐다봤다.

    틸은 모닥불에 꽂혀 있는 꼬치를 하나 빼들었다.

    “먹어라. 탄다.”

    그리고 고기를 한 점 쭈욱 빼먹는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태연한 그 행동에 닉은 머리가 복잡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혹시 쪽지를 보낸 범인이 자신인 것을 눈치 챈 것일까. 그렇다면 어디까지 아는 것일까. 혹시 몬스터의 습격도 자신 때문인 것까지 아는 걸까.

    온갖 생각이 튀어나오고 사라지길 반복하며 계속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진 틸의 말이 닉의 복잡한 머리를 일순간에 날려 버렸다.

    “내가 보낸 선물은 잘 받았나.”

    “…선물?”

    “엘리의 옷.”

    그건 마치 아다만티움으로 만든 거대한 쇠망치로 머리를 까버리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그걸 네가…!”

    “못 쓰게 된 옷이라도 너한테 돌려주는 게 맞겠다 싶어서 말이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틸은 고기를 먹는 걸 멈추지 않았다.

    차츰 혼란에서 벗어난 닉의 눈이 벌게지기 시작했다.

    “…네가 엘리를 납치한 거냐?”

    “글쎄?”

    틸은 다 먹은 꼬치를 모닥불에 내던졌다. 그리고 말했다.

    “걱정 마라. 엘리는 건강해.”

    “이 자식이!”

    닉이 칼을 뽑아 틸의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반격을 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닉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이 엘리에게 그닥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은데.”

    “입 닥쳐! 당장 엘리가 있는 곳을 불어!”

    “힘 빼지 마라, 닉. 어차피 넌 나를 이기지 못해. 여기서 나랑 싸워봤자 너만 개죽음을 당할 뿐이야. 그리고 엘리도 곧 너를 쫓아가겠지.”

    “이 개새끼가!”

    닉이 틸의 목에 검을 더 가까이 댄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에 틸의 목에서 가는 핏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틸의 어조는 평탄했다.

    “너는 오랜 친구고 엘리는 내 딸처럼 생각하는 녀석이다. 굳이 너희 둘을 해치고 싶진 않아. 그러니까 칼 내려.”

    “너 이…!”

    “그러지 않으면 다음에 네가 받을 건 엘리의 손가락이다.”

    “……!”

    “못 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

    닉은 결국 검을 물릴 수밖에 없었다.

    “앉아라.”

    틸의 요구에 닉은 모포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틸을 노려보는 눈만은 살벌했다.

    “그래, 왜 내 딸을 납치했냐.”

    “해야 할 일이 있거든.”

    “해야 할 일?”

    “그래.”

    “그게 뭐지?”

    “그건 네가 알 바 아니고.”

    틸은 닉의 앞에 있는 꼬치 하나를 더 집어 천연덕스럽게 뜯기 시작했다.

    “내가 데네스트 산맥에 볼 일이 있는데 감시가 너무 삼엄하거든. 그래서 앞으로 네 구역을 이용할 거야. 그러니 입 다물고 있어. 당연히 이 구역을 남에게 뺏겨서도 안 되겠지.”

    “네가 데네스트 산맥을 이용할 일이 뭐가 있다고.”

    “뻔한 거 아냐?”

    틸이 비릿하게 웃었다.

    “사각뿔의 원혼을 사용하기 위해서지.”

    “…뭐?”

    다시 얼빠진 얼굴을 하는 닉. 하지만 틸은 닉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내가 하는 말만 잘 들으면 너와 엘리는 살려줄 거야. 그러니 조용히 내게 협력해라.”

    “…사각뿔의 원혼을 네가 갖고 있다고?”

    “무슨 멍청한 소리를 하는 거냐. 이미 도시에서도 눈치 채고 있을 텐데. 설마 너한테는 그 정보가 가지 않은 거냐?”

    “아, 아니. 그건 아니다만….”

    당연히 도시에서는 탈주한 틸을 사각뿔의 원혼을 가진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있다. 닉도 그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사각뿔의 원혼은 내가 가지고 있잖아!’

    한데 지금 눈앞의 틸이 자신도 사각뿔의 원혼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설마 사각뿔의 원혼이 두 개 있는 건가?’

    하지만 사각뿔의 원혼은 그리 흔하게 굴러다니는 게 아니다. 게다가 지금 틸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마치 이번 몬스터의 침공이 자신의 계획인 것처럼 굴고 있다.

    ‘계획은 나와 협력자가 같이 실행한 건데….’

    그러다 닉은 한 가지 생각에 미쳤다.

    “설마 네가 협력자였냐!”

    그렇다면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진다.

    닉은 자신의 생각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기대했던 것이 아니었다.

    “협력자? 뭔 소릴 하는 거야.”

    틸이 이상한 눈으로 되묻는다. 닉의 머리가 다시 헝클어졌다.

    ‘협력자가 아냐?’

    거짓말일까? 하지만 틸이 정말로 협력자라면 여기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

    이 정도로 정보를 줬으면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럼 대체!’

    닉이 혼란에 빠진 와중, 틸은 두 번째 꼬치도 모두 먹어치웠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켰다.

    “어쨌든 내 요구조건은 다 말했어. 이만 가마.”

    “기, 기다려! 더 물어볼 게…!”

    하지만 틸은 고개를 저어 닉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부탁하마, 닉. 앞으로도 계속 친한 친구로 지내자고.”

    그리고 틸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닉은 틸이 사라진 어둠 속을 멍청한 표정으로 한참동안 바라봤다.

    * * *

    닉을 협박한 틸은 어둠 속을 거침없이 누볐다. 그가 도착한 곳은 어느 숲 속에 있는 작은 오두막이었다.

    “후우!”

    오두막에 들어선 틸이 낮은 한숨을 쉴 때였다.

    “수고하셨습니다, 틸 씨.”

    틸은 목소리가 들린 곳을 쳐다봤다. 오두막 한 구석 어둠 속에서 한 명의 사람이 나왔다.

    “연기가 참 멋지시더군요.”

    그는 지크였다. 그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허세도 남을 속이는 것도 필요한 게 이 바닥입니다. 이 정도 연기는 당연한 일이죠.”

    “그래도 훌륭하셨다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좋아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틸이 오두막 안 탁자에 털썩 앉았다. 지크도 그 맞은편에 앉았다.

    틸이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까 전, 닉을 협박할 때의 살벌함은 어디론가 가고 그의 얼굴엔 짙은 피로가 엿보였다.

    “피곤하신가 봅니다.”

    “친구를 협박하는 건 그다지 좋은 기분이 아닙니다. 그 협박 도구가 친구의 딸아이라면 더더욱 그렇죠.”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렇겠죠. 당신처럼 선량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테고요. 하지만 명심하세요, 틸 씨.”

    지크가 틸 쪽으로 상체를 숙이며 낮게 말했다.

    “그 좋지 않은 기분을 느낄 정도로 더러운 짓을 당신에게 하려 했던 게 바로 닉입니다.”

    틸의 메마른 눈동자가 지크를 향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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