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2화
괴멸. 그 섬뜩한 단어가 사람들의 심부를 묵직하게 짓눌렀다.
몬스터에게 함락당한 도시의 말로는 뻔하다. 오로지 파괴와 학살만이 넘실거릴 뿐. 자비란 개념은 몬스터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놈인지는 모르지만 그 자를 반드시 찾아야겠군.”
아까의 해맑은 표정은 흔적조차 없다. 사령관의 음울한 눈이 아직 정체조차 모르는 원흉을 향하며 살기를 피웠다.
“그럼 빨리 수색을 시작합시다! 이렇게 우물쭈물거리다가 그 놈이 몬스터들을 이끌고 내려오기라도 하면 어쩔 거요!”
“당장은 불가능합니다.”
그렌이 금속판을 들어올렸다.
“수색을 하려면 이 아티팩트와 일각뿔의 한탄 이렇게 한 쌍이 필요한데, 지금 제가 갖고 있는 금속판은 이것뿐입니다.”
“그럼 어떻게….”
“만들어야죠.”
그렌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표정은 애매했다.
“만들다니. 아티팩트를 그리 쉽게 만들 수가 있습니까?”
아티팩트라는 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상당한 양의 금품을 줘야 구할 수 있을 정도로 귀하다.
그런 물건을 마치 진흙으로 어쭙잖은 그릇이라도 만들자는 양 하는 그렌의 말에 사람들로서는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쉽게 만들기는 힘들죠. 하지만 지금 이 도시에는 마법사가 셋이나 있습니다.”
“그건 압니다만, 그분들이 아티팩트를 만들 수 있습니까? 마법 실력과 아티팩트 제작 실력은 별개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충분합니다. 적어도 제 동료는 말이죠.”
그리고 그렌은 지크를 향해 말했다.
“지크 씨의 동료는 어떻습니까?”
“물어볼 것도 없습니다. 충분하죠. 무엇보다 제 동료 중 한 명은 최고의 마법사입니다.”
“그럼 이야기는 끝났군요.”
그렌은 선언하듯 말했다.
“아티팩트를 최대한 빠르게 양산한 후, 원흉을 찾아나섭시다.”
* * *
“만들 수 있겠어?”
라일라와 엘레나를 불러온 후, 아티팩트를 보여 주며 묻는 지크에게 라일라는 이렇게 대답했다.
“쉬운 일이야.”
“얼마만큼?”
“네가 사람을 엿먹일 계획을 짜는 것만큼.”
지크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그거 너무 쉬운 거 아냐?”
“그렇지?”
옆에 있던 엘레나는 애매한 웃음을 걸치며 어색해 할 수밖에 없었다. 지크는 아티팩트를 엘레나에게 들이밀었다.
“너는 어때?”
엘레나는 아티팩트를 들어 새겨진 마법진을 꼼꼼이 살폈다. 라일라야 한 번 대충 보는 것만으로도 아티팩트의 원리를 꿰뚫어봤지만 그녀는 아직 그 정도의 경지는 되지 못한 것이다.
아니, 평생을 공부한다 해도 과연 라일라와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지 의심이 들기도 했다.
“…예, 저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복잡한 진도 없고 형태도 꽤 쉬운 편에 속하니까요.”
“좋아. 그럼 만들어 줘.”
“그런데 이걸 만들 재료는 있어? 이거 미스릴이잖아?”
라일라가 금속판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미스릴 특유의 마력을 머금은 촉감이 손끝을 간질였다.
“혹시 우리가 가진 거 주기로 했어?”
제국의 유적에서 미스릴 따위야 쓸어담듯이 했으니, 일행이 갖고 있는 미스릴 만으로도 필요한 수량의 아티팩트를 전부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렌 제너드가 댄다더군.”
“어이구, 역시 대단하신 분이시네. 이 정도 미스릴이면 돈 깨나 나갈 텐데.”
“일단 상황이 급하니 미스릴을 갖고 있는 녀석이 재료를 대고 나중에 도시에서 돈으로든 물건으로든 갚아준다고 했더니, 한사코 사양하더군. 사람들을 위해서는 이 정도는 해야 한다며 말이야.”
“정의로운 용사님이네?”
“정의로운 용사님이지.”
그리고 둘이 키득댄다. 영문을 모르는 엘레나는 이번에도 어색한 얼굴을 했다.
“뭐, 좋아. 둘은 일단 열심히 아티팩트를 만들어라. 일단은 상당히 급한 일이니 최선을 다해 줘.”
“‘일단은’이구나?”
“‘일단은’이지.”
그리고 다시 웃는다.
엘레나는 둘의 모습을 봤다. 의미심장하게 웃는 모습이 상당히 비슷해 보인다.
‘스녹이나 한스 씨 얘기를 들어보면 처음에는 저런 관계가 아니라고 했었는데.’
엘레나가 처음 일행에 합류했을 때도 그런 모습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둘의 모습을 보고 있을 때 엘레나에게 드는 생각은 이것이었다.
‘부부는 서로 닮는다고 했지?’
* * *
라일라와 엘레나가 아티팩트를 제작하기 위해 시청으로 들어간 후, 지크는 도시 안을 어슬렁거렸다.
여전히 몬스터의 공포에 깊이 잠식된 도시의 분위기가 끈적하게 지크의 몸을 내리눌렀다.
화사한 기분을 가진 사람이라도 순식간에 음울한 기분을 품게 만들 공기 속에서도 지크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천하의 지크가 이런 공기에 기분이 변한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애초에 회귀 전 지크는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 쪽이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걸어다니는 것 같은 지크였지만, 그의 이동 경로엔 규칙이 있었다.
바로 늑대의 송곳니 캠프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정도 시나리오가 드러났으면 슬슬 본격적으로 움직일 때도 됐지.’
어떤 깜찍한 계획을 세워뒀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일단 그 목표가 틸이 될 거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캠프 주변만을 돌지는 않았다.
순찰이라는 명목을 얻기 위해 골목골목을 헤집고 다니고 성문 근처에도 돌아다녔다. 이런 혼란한 시기에 범죄율이 상승하는 건 뻔한 일이니 훌륭한 명분이 되어줬다.
‘용사로서의 명성도 올려줄 거고.’
익숙해지지 않는 명칭에 몸을 부르르 떨고 지크는 저 멀리 시청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대략 내일쯤이면 다 완성된다고 했지?’
수십 여 개의 아티팩트를 만드는 일을 고작해야 하루만에 끝내다니.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당연히 경악을 했다.
거기에는 그렌의 동료인 피나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믿지 못하는 그녀에게 라일라가 눈앞에서 순식간에 아티팩트 하나를 만들어 내던지자 믿을 수밖에 없었지만.
‘녀석은 언제 움직일까? 아티팩트가 완성되기 전? 아니면 완성된 후?’
어쨌든 녀석이 틸에게 본격적인 이빨을 드러내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지크가 도시를 헤집고 다닌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하늘 맨 꼭대기에서 빛나고 있던 해가 허둥지둥 성벽 너머 산으로 몸을 숨기고 그 뒤를 어둠이 급박하게 쫓아가는 시간대가 됐다.
‘허기나 때울까.’
숙소로 돌아가진 않을 것이다. 적어도 오늘 하루는 계속 도시 내에서 순찰 아닌 순찰을 할 계획이었다.
지크는 가장 가까운 가게로 가 빵 한 덩어리를 샀다. 거리를 걸으며 우왁스럽게 빵을 뜯어먹던 와중이었다.
두웅!
몸을 때리는 미약한 마력의 여파를 느꼈다.
지크의 고개가 돌아갔다. 성문 쪽이었다.
두우웅!
다시 한번 마력의 여파가 몸을 때렸다.
‘전투!’
기다리던 시기가 온 것일까. 지크는 남은 빵을 입 안에 억지로 구겨 넣었다.
그리고 다리에 마력을 둘러 지면을 박찼다. 그의 몸이 날아올라 바로 옆 건물의 옥상에 내려앉았다.
두웅! 두웅! 두웅!
계속해서 마력의 여파가 느껴진다. 지크의 몸이 건물 지붕들을 밟으며 쏘아졌다.
지크가 성문에 도착했을 때, 그 곳은 한차례 강력한 태풍이라도 몰아친 듯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땅 곳곳이 파헤쳐져 있고 성문도 상당히 상해 있었다. 다행히 사상자는 없어 보였지만 사람들 대부분이 얼이 빠져 있는 게 많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마력파는 성문 밖에서 계속 전해져 오고 있었다. 이제는 전투 소리까지 제법 또렷하게 들렸다.
‘물어봐? 아님 따라잡아?’
상황파악을 먼저 해야 할지 아니면 전투를 따라잡아야 할지. 아주 짧은 순간에 지크의 머릿속이 회전했다.
그리고 결론이 났다.
‘전투를 따라잡는다.’
지크는 다시 지면을 걷어찼다.
‘아마도 틸과 그렌 제너드가 싸우고 있는 걸 거야.’
지크의 예측은 정확했다. 전력으로 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지크는 전투 현장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 곳에는 어마어마한 전투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렌 제너드가 토르니움을 맹렬이 휘두른다. 주인의 힘을 대책 없이 증폭시키는 이 마검은 그렌 제너드의 마력을 탐욕스럽게 잡아먹고 그 막대한 힘을 자비 없이 배출했다.
웬만한 실력자는 감히 대적할 엄두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그렌의 실력은 엄청났다.
하지만 그를 상대하고 있는 틸은 누가 보기에도 그렌보다 한 수 위였다.
그렌이 휘두른 검이 모조리 튕겨나간다. 토르니움에서 뿜어진 검기는 틸이 대검을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산산이 부서졌다.
이번엔 직접적으로 베어 들어갔지만 포악한 토르니움의 이빨로도 틸의 대검을 부수지 못했다.
콰앙!
“크윽!”
오히려 그렌의 몸이 밀렸다.
‘엄청나군.’
지크는 틸의 실력에 감탄했다.
거칠고 둔탁하다. 틸의 검술을 요약하자면 딱 저랬다.
어쩌면 지크의 검술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검술일지도 모른다. 압도적인 재능과 경험으로 예술적이라고까지 부를 수 있는 지크의 검술과는 정말로 완벽하도록 대비되는 검술.
하지만 차이만 있는 건 아니었다. 지크와 틸의 검술에는 딱 한 가지, 완벽한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강하다는 것.
콰아앙!
“크으으윽!”
다시 한번 틸의 검에 맞은 그렌의 몸이 뒤로 날려갔다.
‘그렇지!’
그 모습을 보고 지크는 속으로 환호했다. 목이 째져라 환호성을 지르지 못하는 게 너무나 아쉬울 정도였다.
‘정말 마음에 드는 인간이야!’
틸에 대한 지크의 긍정적인 감정이 급속도로 치솟아 올랐다.
지크에게 그런 감정이 들게 만들 정도로 틸의 힘은 그렌을 압도했다.
단순하게 휘두르는 한 번의 칼질이 주변 공기를 떨어 울렸고 찌르기는 마치 산 하나를 통째로 뽑아 내던지는 것 같다.
게다가 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그 검로는 확실히 유리한 지점을 이용해 상대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그야말로 용병검술의 정점. 오로지 실전으로만 단련된 검로의 극한이었다.
‘정말로 저 작자, 재난의 마왕 같은데?’
그 압도적인 검술을 보고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콰앙!
“아악!”
결국 그렌이 틸의 일격에 크게 튕겨져 나가 땅바닥을 뒹굴었다.
생각 같아서는 음악가 한 명을 고용해 쓰러진 그렌의 앞에서 희열에 댄스라도 추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필사의 인내심을 사용해 욕망을 떨쳐낸 지크가 그렌의 옆으로 뛰어갔다.
“괜찮습니까?”
“괘, 괜찮습니다.”
입에 피를 흘리면서도 그렌은 주춤주춤 일어섰다.
‘칫! 많이 다치진 않았군.’
틸에 대한 평가가 조금은 내려갔다. 족치려면 조금 제대로 족칠 것이지 고작 이 정도의 부상만으로 끝내다니.
하지만 지크는 실망감을 내리눌렀다.
지금은 그렌이 준비했을 이 촌극에 어울려줘야 할 시간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저분은 틸 씨 아닙니까?”
“맞습니다.”
“왜 둘이 싸우고 있는 겁니까?”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드리기로 하고. 저 사람이 사각뿔의 원혼을 갖고 있습니다.”
지크가 틸을 쳐다봤다. 그의 얼굴이 무척이나 일그러져 있었다.
“틸 씨가 이 모든 일의 흑막이란 말입니까?”
“아직은 모릅니다. 하지만 제압할 이유는 충분하죠.”
그러며 그렌은 지크의 옆에 섰다.
“힘을 빌려주시죠.”
그렌이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