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0화
“닉이다.”
다짜고짜 라일라에게 내뱉는 지크. 하지만 라일라는 그 성의라곤 1도 없는 지크의 말을 바로 이해했다.
“예상대로네.”
“그러게 말이야.”
닉은 틸을 타락시킬 때 용병 놈들이 이용했을 주변인 용의자 1순위였으니,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정말로 그렇다면 그 작자는 자기 딸마저 위험에 처하게 한 거야? 뭐 그런 쓰레기가 다 있어!”
라일라가 분노해 씨근덕거렸다. 하지만 지크는 오히려 반대로 생각했다.
“자신의 딸을 지금부터 일어날 사건에서 벗어나게 두려는 의도일 수도 있어. 개인적으로는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납치를 한 후에도 아이들에게 해코지를 하지 말라는 말도 했다고 하니까. 나중에 아이들을 써먹을 때가 있다는 식으로 돌려 말한 모양이지만.”
물론 두 납치범 놈들은 자신들의 범죄가 들키자 아이들에게 칼을 들이대면서 인질로 삼았고 일이 안 좋게 돌아갔을 때에는 진짜로 해칠 생각도 하고 있었지만, 아마 닉도 그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그 장면을 봤다면 그 두 놈의 목부터 꺾어버리지 않았을까.’
“어쨌든 놈에게 계획의 성공 사실은 알렸어. 뭔가 움직임이 있겠지. 그게 그렌 제너드든 닉이든. 이제부터는 기다릴 때야. 뭐, 그렇게 오래 걸릴 것 같진 않지만.”
지크의 예상대로 얼마 후, 일행은 그렌이 돌아온 것을 알게 됐다.
* * *
그렌의 귀환은 녀석들의 계획이 다음 단계로 이행했다는 것을 뜻한다.
때문에 그렌과 닉의 행동을 면밀히 살피고는 있었지만 지크는 그 자신의 행동이 크게 쓸모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렌이 명성을 노리고 있다면 오히려 녀석이 먼저 어떤 것이든 행동을 취할 거야.’
지크의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중요한 얘기가 있다며 그렌이 그를 부른 것이다.
오라고 한 장소가 시청인 것을 보면, 아마 시장에게 부탁을 해 장소를 빌린 모양이었다. 초대받은 이도 지크 한 명이 아니었다.
‘자신의 업적을 자랑할 무대를 만들려는 건가.’
그렇다면 아마 그가 초대한 자들은 그의 대단한 업적을 치켜세우기 위한 단역들일 것이다.
‘나는 그래도 조역 정도는 되지 않을까?’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회귀 전의 배역은 그래도 주역이었는데 말이야.’
그때 지크는 주인공의 앞을 막아서는 마지막 장애물로서 자신의 배역에 충실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회귀 전의 일. 이번에도 실에 매달린 인형 따위가 될 생각은 없다.
‘당장은 네가 정해준 배역에 충실해주마.’
하지만 그게 오래가진 않을 것이다. 회귀 전 보이지 않는 실에 휘둘려 화려한 춤을 추던 인형에게 더 이상 실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자신이 휘두르던 인형이 멋대로 움직여 극을 박살 낸다면, 아마 무척이나 좋아하지 않을까.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어.’
누가 뭐라 하든 이젠 멋대로 할 테니까. 지크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 * *
지크는 시청을 향해 느긋하게 걸어갔다. 소집 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주변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지크를 보고 웅성거린다. 나쁜 시선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건 존경에 가까운 시선이었다.
이미 도시에 지크의 명성은 착실하게 퍼져 있었다.
‘어색해.’
공포와 증오의 눈길은 익숙하지만 이런 존경과 선망의 눈길엔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용사의 길을 걷기 위해 짊어져야 할 업보라지만 과연 이 시선이 익숙해질 때가 올지는 알 수 없었다.
다각!
옆에서 들리는 말발굽 소리에 지크가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십니까, 지크 씨.”
말을 탄 틸이 어느새 그의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읏차!”
틸은 날랜 동작으로 말에서 뛰어내렸다. 말이 잠시 투레질을 해댔지만 틸이 얼굴을 쓰다듬어두자 곧 진정했다.
그는 고삐를 잡고 지크의 옆으로 붙었다.
“안녕하십니까, 틸 씨.”
“지크 씨도 시청으로 가는 중이시죠?”
“그렇습니다. 제너드 씨에게 불려서 말이죠. 틸 씨도 그렇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늑대의 송곳니 단장인 틸 씨까지 부르다니, 제너드 씨가 뭔가 대단한 걸 발견한 모양입니다.”
‘스스로 준비한 거겠지만.’
정말로 생각할수록 맥이 풀리는 일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틸은 신중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발견일까요? 제발 지금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발견이었으면 좋겠군요.”
“뭐, 좋은 발견 아니겠습니까. 몬스터의 습격이 뜸해진 것도 그 사람이 말한 ‘발견’이라는 것 때문일 수도 있고요.”
‘분명 그렇겠지.’
그래야 자신의 명성이 더 올라갈 테니까.
그러나 지크의 속을 모르는 틸은 허허롭게 웃었다.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어서 이 사태가 해결이 돼야 저도 아들을 보러 갈 수 있으니까요.”
“옆 도시로 보낸다고 하셨죠? 잘 도착했다고 합니까?”
지크는 시치미를 딱 떼고 모른 척 물었다.
“아뇨. 연락은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바로 숙소를 잡고 우리가 연락을 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을 뿐이죠.”
“그래도 잘 도착했다는 연락 정도는 받는 게 좋지 않습니까?”
“몬스터가 습격하는 지금, 고작 연락 한번 하자고 이 도시에 오겠다는 사람 찾는 것도 힘들 겁니다. 녀석들 보고 오라고 하는 것도 좀 그렇죠. 아이들을 지키려면 전력을 분산시켜야 하는데 지금은 소수로 움직이는 건 위험하니까요.”
“불안하진 않으십니까?”
“자랑스러운 부하들입니다. 실력도 실적도 신뢰도 높은 녀석들만 추렸죠. 피알루가 함락당하고 몬스터들이 옆 도시까지 진군을 하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고작 아이들 호위 정도에 불안감을 느끼진 않습니다.”
틸에게서 무척 드높은 자부심이 느껴졌다. 믿던 부하 중 두 놈이 동료들을 배신하고 그의 아들에게까지 칼을 들이댄 걸 알았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어쨌든 납치에 대해서는 모르는군.’
지크의 말에 따라 달튼이 조용히 지내는 것 같아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 뒤로 둘은 간간이 얘기를 나누며 시청을 향해 걸었다.
* * *
둘은 시청 안에 있는 한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영지와 도시의 문양과 더불어 깔끔한 내부 장식으로 꾸며진 방은 꽤 규모가 있었다.
방 한가운데 커다란 탁자와 그를 둘러싼 의자들이 보인다.
회의실이었다.
의자에는 이미 몇몇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살펴보니 저번에 사령관이 앞으로의 전투를 위해 진행했던 회의에서 본 적이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지크 일행 정도는 아니더라도 전투에서 상당히 두각을 드러내는 무리를 이끌고 있거나 그저 본인이 강한, 도시의 고위 전력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들이었다.
‘어이구, 아주 고급 단역들만 모아 놨군.’
지크는 속으로 혀를 찼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자리에 명패 같은 게 없는 걸 보니 딱히 지정석이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지크와 틸은 빈자리에 앉았다.
몇몇 사람들이 말을 걸어 왔다. 지크는 그들의 말을 적당히 받아가며 시간을 때웠다.
다행히 이번 주인공은 배우들을 그토록 기다리게 하진 않을 모양이었다.
문이 벌컥 열리며 이번 전투의 총지휘를 맡고 있는 사령관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뒤로 그렌이 따라 들어왔다.
그렌은 여느 때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지크는 거기서 득의양양한 기분을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그럴 거야. 아무렴.’
지크가 보기에도 그렌의 얼굴에 그런 티는 나지 않았지만, 지크는 무조건 그렌이 그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령관이 들어오자 사람들이 일어서려 했다.
“아, 계속 앉아 있으시오.”
사령관은 그렇게 말하고 가장 상석으로 향했다. 그렌은 여전히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사령관이 자리에 앉고 그렌이 그의 바로 옆에 앉았다.
“전부 모이신 것 같군.”
사령관이 장내에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전부 확인한 후 말했다.
“우선 갑작스러운 모집에 응해주신 것에 감사를 드리오.”
귀족인 그가 감사의 말을 하는 게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도시가 위급한 상황에서 실력자들을 소홀히 대할 수는 없다.
게다가 여기엔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인 지크와 그렌도 있으니 체면을 구기는 것도 아니었다.
“여기 있는 분들 대부분은 내 옆에 있는 제너드 씨가 특별한 임무를 안고 데네스트 산맥으로 떠난 것을 알고 계실 것이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 회의에서 얻은 유일한 성과가 그것이지 않던가.
“혹시 무슨 성과가 있었습니까?”
어떤 성급한 자가 급히 입을 열었다.
자신의 말이 끊긴 것이 기분이 나쁠 만도 하건만, 사령관은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지크가 알기로 사령관은 분명 성격이 좋은 편이긴 했지만 저 무례에 가까운 반응에 저런 기꺼운 미소를 지을 정도로 호구 같은 작자도 아니었다.
‘그렌 제너드가 가져온 성과가 무척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지크의 생각은 정확했다.
“그건 제너드 씨가 설명을 해주실 것이오.”
사령관이 자신을 쳐다보자 그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렌 제너드라고 합니다.”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한 이후 그가 본격적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시간도 없으니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몬스터의 준동 원인을 찾았습니다.”
사람들은 놀랐다. 눈을 빛내거나 아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사람도 있었고 진짜냐고 중얼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반응은 여러 가지였지만 느끼는 감정은 대부분 같았다. 기쁨과 환희였다.
“그게 뭡니까?”
아까 성급하게 사령관의 말 사이에 끼어들었던 자가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그렌이 두 손을 들어 그를 만류했다.
“자자, 너무 재촉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설명은 다 해드릴 테니까요.”
“그래 인마. 너 아까부터 너무 나대고 있어.”
그의 지인인 듯한 자가 그의 옷자락을 쥐고 강제로 의자 등받이까지 밀어붙였다. 그도 자신이 성급한 걸 깨달았는지 순순히 등받이에 등을 붙였다.
“일단 이걸 먼저 봐주시죠.”
그렌이 품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마법 상자였다.
그리고 상자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마법 상자를 처음 본 사람들은 그 조그마한 상자에서 물건이 끝도 없이 나오자 상당히 놀랐다.
그런 물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격한 건 처음인 것이다.
하지만 마법 상자에 익숙한 자들은 그렌이 꺼내는 것에 더 집중했다.
“저건 뭐지?”
“뿔… 같은데?”
“아니면 커다란 짐승의 송곳니거나.”
“그런데 표면에 뭐가 그려져 있는데?”
“마법진 아냐? 그럼 아티팩트인가?”
사람들이 그렌이 내놓은 물건을 보며 수군거린다.
지크도 그 물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사람들의 표현대로 그건 어떤 동물의 뿔이나 송곳니를 가공한 것 같았다.
둥근 뿌리 부분부터 완만하게 휘어가다 뾰족하게 끝난다. 표면에는 여러 무늬와 그림들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마법사들이 만든 아티팩트같이도 보였고 웬 야만인들이 갖고 다니는 장신구처럼도 보였다.
처음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것을 쳐다보던 사람들이 점점 인상을 찌푸렸다.
“근데 이거 무척 더러운 기분이 드는데?”
“너도 그래?”
“너도?”
하나같이 그 물건에게서 불쾌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몇몇은 의자를 뒤로 빼 그 물건들과 거리를 뒀다.
그 정도로 그 물건들은 사람들의 혐오감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게 뭡니까?”
당연히 그런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렌은 담담하게 물건의 정체를 밝혔다.
“‘일각뿔의 한탄’이라는 물건입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