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9화
“그놈들은 어떻게 했어?”
“정보를 토해낸 대가로 살려는 주려고 했는데, 근성 없는 놈들이 그대로 나자빠져 버리더라고. 지금은 땅속에서 얌전히 쉬고 있을 거다.”
고문 후유증으로 죽어서 땅에 묻었다는 뜻이다.
끔찍한 이야기였지만 지크도 라일라도 태연했다. 이제 와 그 정도로 동요할 두 사람이 아니었다.
“원흉은 누구야?”
“녀석들도 모르더군. 로브를 뒤집어쓰고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깔고 있는 정체불명의 인간이 갑자기 권유해 왔다고 해.”
“로브 놈들인가?”
“난 아니라고 보고 있다. 혹시나 놈들이 설칠까 계속해서 도시를 감시했잖냐.”
하지만 발견한 건 없었다.
“아마 로브 놈들의 세력이 아니라, 정체를 들키지 싫은 작자가 로브를 입은 것에 불과할 거다. 우리가 로브 놈들이라 부른다고 해서 로브를 녀석들만 사용하는 옷은 아니니까.”
오히려 먼 길을 다니는 사람들에겐 대중적인 옷이다. 그리고 정체를 드러내기 싫은 사람들에게도.
“늑대의 송곳니 야영지 근처에서 제안을 들었다고 하니 역시 용병단 내부에 범인이 있지 않을까. 녀석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녀석들이 의심하고 있던 사람은 없어?”
“새로 들어온 용병들.”
라일라는 어이없어 웃었다.
“본인들은 돈에 배신을 했으면서, 자신들처럼 초창기부터 용병단을 따른 용병들보다는 새로 들어온 용병들을 의심한 거야?”
“내가 말했잖아. 세월로 인해 쌓인 신뢰는 무겁다고.”
그런 생각을, 그 세월로 인해 쌓은 신뢰를 무참히 배신한 인간들이 갖고 있다는 게 어처구니없긴 하지만.
“그래도 로브 놈들이나 그렌 제너드와 아무 상관 없는 건 아니겠지?”
“물론이지. 오히려 나는 녀석들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라일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을 해봐. 늑대의 송곳니 초창기 멤버들은 신뢰받는 동료 관계였어. 우습게도 습격자인 그놈들조차 초창기 동료들은 아이들의 납치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렇다면 아이들을 납치할 협력자를 만들려 권유를 할 때, 보통 그런 이들에게 할까?”
“아니지.”
오히려 절대로 권유를 하지 말아야 할 인물들이다.
“물론 그런 이들이니 더더욱 배신에 적합한 인물들이긴 하지. 하지만 아무에게나 섣불리 권유했다간 오히려 납치 계획이 전부 새버렸을 거다.”
하지만 늑대의 송곳니 용병들은 범인들을 제외하고 이 계획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그럼 처음 권유한 초창기 멤버가 바로 당첨이었단 뜻이네? 그것도 두 명이나.”
“그렇지.”
“우연은 아니겠네.”
만약 그런 운을 가지고 있는 자라면 세계 정복도 한번 노려볼 만하지 않을까. 계획하는 족족 자신의 의도대로 돌아갈 테니.
“아니겠지. 그렇다면 범인은 어떻게 녀석들이 그런 성향이란 걸 알아냈을까?”
“오랜 세월 옆에서 봐 와서?”
“다른 용병들에게 물어봤는데, 녀석들의 평소 행실에 이상한 점은 없었다고 한다. 다른 용병들처럼 아이들과도 잘 놀아줬다고 하더군.”
“그럼 혹 미래에서 보고 왔다거나?”
라일라가 장난스럽게 말한다. 하지만 그게 바로 지크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렇다면 아무 망설임 없이 녀석들에게 권유를 할 수 있겠지.”
즉, 이번 건에도 미래를 아는 그렌과 로브 놈들이 관여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녀석들은 아이들을 납치해서 뭘 하려고 한 거야?”
“납치범들도 정확한 의도는 모르더군. 그저 아이들을 납치한 후에 얼마 정도 아이들을 데리고 숨어 있으라고만 한 모양이야.”
“아이들로 무언가를 할 생각은 없다는 건데. 아이들이 납치를 당했다는 상황 그 자체가 중요했던 건가?”
“아마도. 그래서 녀석들의 장단에 맞춰주려고.”
지크는 품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들었다.
“납치에 성공하면 미리 정해둔 곳에 성공을 알리는 쪽지를 두라고 했다더군. 원하는 대로 해 줄 생각이야.”
“필적은? 의심받지 않겠어?”
“걱정 마. 녀석들이 나자빠지기 전에 스스로 써 준 편지니까.”
“너를 속였을 가능성은?”
“내가 녀석들에게 그런 여유를 줬을 거라고 생각해?”
“그럴 리 없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지크의 명령에 따라 편지를 작성했을 그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정말로 녀석들의 협조에는 고마움을 금할 길이 없다니까.”
라일라는 웬만하면 지크에게 죽은 사람의 무덤 곁으로는 지크를 데려가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열 받아서 무덤에서 튀어나올지도 몰라.’
* * *
편지를 두기로 지정된 곳은 도시와 상당히 멀리 떨어진 숲 속이었다. 가도에서도 꽤 멀리 벗어난 곳인데다가 무엇보다 데네스트 산맥과 인접한 곳이라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크는 그 장소를 보고 꽤 좋은 곳이라 여겼다.
인적이 없다는 건 무언가를 몰래 하기에 좋은 곳이라는 뜻이다. 피알루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라고는 해도 걸어서 며칠씩이나 걸리는 곳도 아니다. 무엇보다 데네스트 산맥의 근처라는 점이 좋았다.
‘순찰이라는 명목으로 편지를 회수할 수 있는 곳이야.’
몬스터의 습격을 한 시라도 빨리 알 수 있도록 피알루에서는 꽤 많은 순찰자들을 데네스트 산맥의 근처에 보내고 있었다. 지크가 달튼의 무리를 미행한 것도 그 핑계를 대고 한 것이 아니던가.
지크는 숲을 살폈다. 꽤 울창하게 우거진 숲이었다. 지크는 숲 안으로 들어가진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거로군.’
지크는 숲 가장자리에 있는 높은 나무 하나를 쳐다봤다. 번개에 맞았는지 한 쪽이 새까맣게 그을린 그 나무는 먼 거리에서도 눈에 잘 띄었다.
‘여기인가.’
네드빌에게 들었던 것처럼 뿌리 아래에 작은 공간이 하나 있었다.
지크는 편지를 공간 안에 넣었다. 그리고 주변 나뭇가지에 올라 조용히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동안 몇몇 사람들이 숲 옆을 스쳐 지나갔다.
전부 도시에서 보낸 순찰자들이었다. 하지만 숲에 접근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 두 명의 인간이 숲에 접근하는 것이 보였다. 단단한 무장을 한 채 주변을 살피는 그들이 누군지 지크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늑대의 송곳니의 용병들.’
건들거리며 어슬렁거리는 폼이 그들이 새로 합류한 용병임을 어렵지 않게 알게 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예리하게 벼려 혹 기습이 온다 해도 바로 반격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역시 인성이 좋지 않을 뿐, 그들도 늑대의 송곳니에서 받아들일 만한 베테랑 용병임이 분명했다.
지크는 조용히 그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그들은 경계 어린 눈초리로 산맥과 숲 안을 들여다보다 슬금슬금 종이를 숨겨둔 나무 쪽으로 향했다.
‘저 녀석은….’
둘 중 한 명이 눈에 익었다. 늑대의 송곳니의 용병들 중에서도 상당히 높은 실력을 가지고 이번 전투에서도 활약한 자였다. 지크의 눈에 익을 만큼.
‘과연, 저렇게 대비를 했군.’
저 자라면 혹 네드빌이나 셰드가 자신들에게 일을 시킨 자를 찾겠답시고 근처에 숨어 있다고 해도 놓치지 않고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크를 발견하는 건 무리였다.
그 자가 슬쩍 지크가 종이를 넣어둔 나무뿌리 아래에 손을 넣었다.
곧 흙먼지가 조금 묻은 종이가 딸려 나왔다.
그는 종이를 탈탈 털어 흙을 제거하더니 동료에게 돌아갔다.
지크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이, 찾았어! 부단장이 찾아오라던 물건이야.”
부단장. 닉, 맥스 어느 쪽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크는 아무래도 닉을 일컫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나중에 들어온 용병들을 감싸고도는 건 닉 쪽이었으니까.
“편지인가? 내용물이 뭐야?”
“야, 야! 관둬! 보지 말라고 했잖아!”
“살짝 보는 건 상관없지 않겠어?”
“초로 봉인까지 되어 있는데 어떻게 조금만 보겠다는 건데! 네놈이 자살을 희망하는 건 상관없지만 거기에 나까지 끼게 하지는 마!”
내용물에 흥미를 보이던 용병이 투덜거렸지만 그것뿐, 더 이상 편지를 훔쳐보자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편지의 내용물은 암호로 적혀 있어, 그들이 보았더라도 무슨 내용인지 알지 못했을 테니까.
그저 닉의 신뢰만 깎아 먹었을 것이다.
용병들은 숲을 떠났다. 그들의 본래 임무인 정찰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다만 역시 이번에도 추적자가 있는지 냉철하게 주변을 살피는 모습을 보였다.
지크는 그들을 추적했다. 용병들은 피알루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도시에 접근하자 점점 엄폐물로 사용할 만한 것이 줄어들었다. 인적도 많아졌다.
피알루 사람들에게 있어 지크란 존재가 점점 유명해지고 있는 바, 미행의 난이도가 급하게 상승했다.
지크는 오랜만에 라일라가 줬던 투명화 아티팩트를 꺼냈다.
그렌에겐 어설픈 투명화 아티팩트는 먹히지 않을 테고 달튼의 무리를 쫓을 땐 굳이 아티팩트까지 사용할 필요가 없어 쓰지 않았지만, 지금은 사용하는 편이 좋았다. 이번에 놈들의 야영지 안까지 따라 들어갈 생각이었으니까.
‘틸이 있진 않겠지?’
틸의 실력이면 충분히 이 아티팩트를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순찰을 나갔을 시간이다.
신뢰와 성실의 대명사인 틸이 순찰을 빼먹진 않을 터.
용병들은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몬스터의 대규모 습격이 시작된 후, 늑대의 송곳니는 야영지를 성 안으로 이동시켰다. 도시 안에 있는 커다란 광장 하나를 통째로 사용해 야영지를 차렸다.
지크는 조심스럽게 용병들의 뒤를 밟아 늑대의 송곳니의 야영지에까지 침입했다.
야영지에 들어온 후 두 용병은 서로 흩어졌다. 당황할 만도 하건만, 지크는 침착하게 한 명의 용병을 쫓았다.
편지를 가지고 있는 용병이었다. 그 용병은 야영지를 가로지르더니 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지크는 천막에 최대한 가까이 붙어 새어나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 왔수!”
“그래. 물건은 찾았나.”
‘닉의 목소리다!’
역시 그가 범인이었을까.
천막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종이가 스치는 소리다. 용병이 편지를 꺼낸 게 분명했다.
“여기 있수.”
“수고했다. 그만 나가 봐.”
“뭐야, 자기 볼장만 보고 바로 나가라고 하는 거요?”
“뭔가 더 필요한 게 있나?”
“그런 말은 보통 사람 눈을 보고 하는 해야지! 하, 됐어! 부단장한테 뭘 바라겠수.”
용병이 불쾌한 어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천막 안에서 무언가 던져지는 소리가 났다. 약간의 금속 부딪치는 소리가 끼어 있었다.
“같이 간 놈이랑 같이 술이나 먹어.”
“헤헤! 내가 이래서 부단장을 좋아한다니까!”
돈 자루라도 받은 모양이다. 용병의 태도가 완전히 변했다.
“너도 알겠지만 지금은 일단 비상시기다. 절대로 술에 취하도록 먹지 마.”
“내가 용병 생활 일이 년 해본 줄 아슈? 그리고 어차피 맥주 정도로 취하지도 않으니 걱정은 마슈.”
천막의 입구가 펄럭이며 용병이 기분 좋은 얼굴로 나왔다. 앞으로 술을 마실 생각에 대책 없이 즐거움이 샘솟는 모양이었다.
용병이 떠난 이후에도 지크는 닉의 천막 근처에서 떠나지 않았다.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린 후, 천막 안은 잠시 고요에 휩싸였다. 편지를 확인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좋았어!”
낮지만 분명 환희에 찬 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크도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이야, 댁이 기분이 좋으니 나도 기분이 좋네.’
진심이었다.
더 이상 얻을 건 없어 보인다. 지크는 조용히 늑대의 송곳니의 야영지에서 나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