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406화 (406/628)
  • 제406화

    커다란 전투가 끝난 후, 지크 일행은 숙소에서 푹 쉬었다. 다른 병사들은 전장의 뒤처리를 하고 있지만 감히 지크 일행에게 뒤처리를 요구하는 자는 없었다.

    지크는 꿀맛 같은 잠을 즐겼다. 역시 열심히 일을 하고 난 후에 취하는 휴식은 달콤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다음 날. 일찍 일어나 식사를 마치고 정원에서 우아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시는 지크의 모습이 보였다.

    정원에는 오로지 그뿐이었다. 안 그래도 사람이 적었던 숙소는 몬스터의 침공이 본격화된 지금 아예 텅텅 비어 있었다.

    모두 다른 도시로 도망간 것이다.

    따라서 지크 일행은 마치 숙소를 전세 낸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아주 여유가 넘쳐 보이네.”

    숙소에서 나온 라일라가 자신 몫의 차를 들고 지크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원래 급박한 상황에서도 짤막한 시간 동안의 여유를 즐기는 자가 진정 위대한 자인 법이야.”

    “뭐래.”

    늘 그렇듯 라일라는 지크의 헛소리를 부드럽게 넘겼다. 그리고 정원을 슬쩍 둘러보며 찻잔을 입에 가져다댔다.

    “어제의 전투가 꿈만 같아.”

    그녀의 말처럼 숙소의 정원은 여전히 멋진 풍경을 유지하고 있어서, 어제의 그 피 냄새 가득 나는 전투가 일어난 곳과 같은 도시에 있는 곳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우리가 열심히 지킨 풍경이라고 생각해.”

    “네가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물론이지. 이래 봬도 용사 지망….”

    턱을 높이 들고 젠체하며 말하다 얼굴을 구기는 지크.

    라일라는 그 모습을 어이없이 쳐다봤다.

    “그놈의 용사 혐오는 조금 고쳐야 용사 노릇의 일부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자기가 용사라 자칭하는 것만으로도 인상을 찌푸리는 정도라니.

    라일라는 지크가 정말로 용사 노릇을 할 수 있을지 걱정됐다. 동시에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인식이 문제라는 것에 기가 차기도 했다.

    “괜찮아. 나는 하려면 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썩 설득력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나는 용사’라고 마치 자기 세뇌를 하듯 중얼거리다 몸을 부르르 떠는 지크를 라일라는 차를 홀짝이며 바라봤다.

    “정말로 여유 있나 보네.”

    아마 몬스터의 또 다른 습격을 고민하고 걱정하고 있는 사람들이 지크를 본다면 아무리 온화한 사람이라도 자동적으로 욕설을 내뱉지 않을까.

    “여유가 넘치는 건 사실이야.”

    “네가 아까 말한 위대한 자이기 때문에?”

    “아니. 앞으로 당분간은 몬스터 습격이 없을 거거든.”

    이건 놀라운 말이다. 라일라는 찻잔을 내려놓고 탁자 위에 두 팔을 겹쳐 올린 다음 지크를 빤히 쳐다봤다. 빨리 말하라는 무형의 압박이었다.

    “그렌 제너드가 데네스트 산맥에서 몬스터 이상 준동의 원인을 찾는다고 올라갔어.”

    “그러고 보니 아까 그렌 제너드가 나갔지.”

    창문 너머로 그가 어디론가 떠나는 걸 지켜봤었다.

    ‘꽤 멀리 가는 것 같긴 했어.’

    그의 동료들이 배웅을 나와 있었었다. 잠깐 자리를 비우는 거라면 그런 배웅은 필요 없을 것이다.

    “이 사태, 그렌 제너드가 일으킨 거지?”

    “그래.”

    “본인이 사건을 일으키고 본인이 사건을 해결한다. 그것참, 용사 노릇 하기 참 편하겠어.”

    라일라는 그렌의 느끼한 얼굴을 떠올리며 빈정거렸다.

    “그래. 그러니까 우리 용사께서 떠나 계실 때, 몬스터의 습격이 있어선 안 되겠지. 혹시라도 누가 활약을 해서 더더욱 명성을 떨치게 된다면 녀석에겐 재미없는 일이 되어버리잖아. 구체적으로 잘생겼고 실력도 좋은 전직 마왕이라든가 말이야.”

    “아주 자기 얼굴에 금칠하는 데는 망설임이 없지?”

    “사실을 말하는 건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니까.”

    지크는 여전히 뻔뻔했다.

    “어쨌든 녀석이 더 이상 몬스터를 보내지 않을 가능성은 커. 나를 마왕으로 만들 정도로 의식하던 녀석이야. 더 이상 명성을 쌓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겠지. 게다가 이 도시엔 녀석의 동료도 있어.”

    “동료가 죽을 수도 있을까 봐? 그래도 동료는 소중한가 보지?”

    “자신을 띄워주기 위한 도구를 잃기 싫은 기분일 수도 있지.”

    녀석이 라라에게 하는 짓을 생각하면, 지크는 자신이 말한 의견이 더욱 설득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 그렇다면 구제할 수도 없는 쓰레기잖아.”

    “뭘 이제 와서.”

    “그런데 너는 가만히 있을 거야? 너라면 조용히 녀석을 쫓아가는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지크라면 절대로 그렌이 좋을 대로 하게 두진 않을 것이다. 라일라는 자신의 마법을 걸 수도 있었다.

    “놈의 실력이 나보다 훨씬 아래인 건 분명하지만, 계속해서 미행을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야. 평소보다 훨씬 더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테니까. 내가 미행 전문이 아니기도 하고.”

    “…미행 전문이 아니면서 그렇게 사방을 뒤집으면서 다닌 거야?”

    지금껏 지크가 한 일을 생각나면 암살자나 첩자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다. 지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굳이 위험 부담을 안으면서 놈을 찾아다닐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녀석의 계획하에서 움직이는 다른 인물을 쫓으면 그만이니까.”

    “그게 누군데?”

    지크는 턱짓으로 숙소 쪽을 가리켰다.

    “나왔네.”

    라일라가 고개를 돌렸다.

    숙소 로비에 몇 명의 사람이 보였다. 지크처럼 비정상적으로 눈이 좋은 건 아니지만, 라일라도 그들이 누군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험상궂은 얼굴에 무장을 한, 누가 봐도 ‘나 용병이요’라며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두 아이가 보인다.

    윌터와 엘리였다.

    그리고 아이들을 둘러싼 사람들은 아이들의 아버지인 틸과 닉. 그리고 부하 용병들이었다.

    * * *

    “안녕하십니까.”

    용병들 사이로 지크가 끼어들었다. 아직 어제 겪었던 전장의 열기가 빠지지 않았는지 용병들이 옅은 살기를 뿜으며 갑자기 나타난 이를 경계했다.

    하지만 상대가 지크인 걸 알고는 바로 경계심을 거뒀다.

    “아저씨!”

    “아저씨다!”

    윌터와 엘리가 지크를 반겼다.

    다른 이들이 어떤 인식을 가지든, 지크는 아이들에겐 그저 자신들과 재미있게 놀아주는 아저씨일 뿐이었다.

    지크는 아이들에게 한 번 웃어준 후 틸과 닉을 쳐다봤다.

    “두 분께서 한 번에 찾아오신 걸 보는 건 처음 같군요.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대답은 아이들에게서 나왔다.

    “우리 다른 곳으로 간대요!”

    “응, 응! 여기보다 더 재미있는 곳으로 간대!”

    “그러니?”

    예전에 맥스가 말했던, 틸과 닉의 자식들을 다른 곳으로 피난시키려 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건 지크가 기다려온 기회이기도 했다.

    아이들은 지크의 옆에서 잠시 쫑알쫑알 떠들더니 곧 옆에 있던 라일라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그리고 라일라와 떠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지크가 물었다.

    “피난시키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이 도시는 너무 위험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틸이 대답했다. 닉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두 사람을 동시에 만난 건 몇 번 안 되지만, 그렇더라도 이렇게 의견이 통합된 건 처음 본다.

    “호위는 충분히 준비했습니까? 아무리 어제 침공이 끝나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다 해도 도시 주변에 어슬렁거리는 몬스터가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부하들을 딸려보낼 생각입니다.”

    틸이 주변 용병들을 보며 말했다.

    “오래 전부터 용병단에 있던 녀석들입니다. 신뢰도 실력도 충분하죠.”

    틸의 목소리에 믿음이 묵직하게 실려 있다. 실력과 더불어 신뢰도 언급하는 걸 보니, 아마도 맥스가 말했던, 초창기 때부터 늑대의 송곳니에 있었던 용병들인 모양이었다.

    ‘자식들을 보호할 자들이니 당연히 신뢰도 확실해야겠지.’

    틸이 라일라와 있던 자식들을 불렀다. 윌터와 엘리가 다시 쪼르르 달려왔다.

    “자, 그럼 그만 가자꾸나. 성문까지는 데려다 주도록 하마.”

    “정말로 아빠는 안 가?”

    윌터가 틸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엘리도 막상 아빠와 헤어지려니 싫은지 슬쩍 닉의 손을 잡았다.

    “안 가는 게 아냐. 조금 늦게 가는 거지. 아빠와 아저씨들은 아직 여기서 할 일이 있거든.”

    “그렇단다. 가서 여기 있는 아저씨들과 조금만 기다리고 있거라. 얼른 일을 끝내고 아빠도 가도록 하마.”

    아이들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납득보다는 체념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 용병단에서 커온 아이들이라 그런지,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 부모와 헤어질 때 보이는 공포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윌터와 엘리가 숙소 앞에 서 있던 마차에 탔다. 성문까지 둘을 배웅하기 위해 틸과 닉도 그 마차에 올라탔다.

    지크와 라일라에게 인사를 하고는 용병들은 숙소 앞을 떠났다. 아이들이 마차 밖으로 몸을 빼 손을 흔든다. 지크와 라일라도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숙소 앞에는 둘 만이 남았다.

    “숙소가 더 조용해지겠네.”

    아이들과 상당히 정을 붙였는지 라일라가 아쉬워했다.

    “이제는 어떻게 할 거야?”

    “당연히 따라가 봐야지.”

    “아이들을?”

    “그래. 그렌 제너드야 나름 실력도 있고 경험도 있는 녀석이니 계속 미행하기는 힘들지만, 저 녀석들은 다르지.”

    지크는 용병들이 사라진 곳을 쳐다봤다.

    “거리 좀 두고 천천히 따라가면 눈치 못 챌 거야.”

    “정말로 뭔가 일이 일어날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아이들이 휘말릴 가능성도 굉장히 높기에, 라일라는 적잖이 우려스러웠다.

    “가능성은 높아. 그렌 제너드가 틸을 엮으려 한다면 아이들만큼 훌륭한 미끼가 없기도 하고.”

    “하지만 이번에 틸을 엮는다는 보장은 없잖아. 틸을 타락시키는 시기는 꽤 훗날일 수도 있어.”

    “그때는 그때야.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하지만 적잖은 자신감을 볼 때, 지크는 자신의 생각대로 일이 돌아갈 높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네 얘기가 맞으면 좋겠네.”

    “하핫, 나도 그래.”

    지크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야 부드럽게 그렌 제너드를 엿 먹일 수 있으니까.”

    “…넌 은근슬쩍 어휘를 이상하게 사용하는 거 아니?”

    “고상하게 사용한다고 해줘.”

    “그건 절대 아냐.”

    * * *

    윌터와 엘리를 태운 마차는 피알루를 떠나 가장 가까운 도시로 향하기 시작했다.

    틸과 닉은 성문까지 배웅을 해준 후 다시 도시 안으로 돌아갔다. 아이들을 보호하는 건 일곱 명의 용병이 전부.

    보통 아이들이라면 부모를 떠나 험상궂은 어른들 사이에 있을 때 두려움에 떨겠지만 윌터와 엘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더 거친 환경에서 자란 데다가 그들을 호위하고 있는 용병들 또한 무척이나 친하게 지낸 사람들이었던 까닭이다.

    “아저씨. 우리 도착하는 데 얼마나 걸려요?”

    “글쎄? 아마 사흘쯤 걸리지 않을까?”

    마차의 창문 밖으로 몸을 빼고는 옆에서 걷던 용병에게 그리 물을 정도로 아이들은 낯을 가리지 않았다.

    “그보다 몸 집어 넣거라. 이제부터 꽤 빠르게 달릴 테니까. 자칫하다간 마차 밖으로 떨어질지 몰라.”

    아무리 잘 정리된 가도라도 마차가 달린다면 꽤 격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건 바로 승차자의 피로로 이어진다. 때문에 아이들이 적잖이 고생을 할 거란 건 뻔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피알루에서 도망을 치는 것이다. 아이들이 고생을 한다고 하더라도 강행군을 할 필요가 있었다.

    “네!”

    다행히 아이들은 말을 잘 들었다. 아이들이 마차 안으로 몸을 넣자 마차가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말을 탄 용병들이 마차를 둘러싸 호위하며 같이 달렸다.

    그리고 피알루에서부터 그들을 조용히 쫓던 지크도 슬며시 속도를 올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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