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5화
“어서 오시오.”
사령관이 지크를 반겼다. 지휘관이나 다른 용병들도 호감 어린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강력한 아군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 쉽다. 거기에 지크는 앞장서서 이야기에서나 들었을 법한 강력한 몬스터들을 쓰러뜨리고 있는 상황.
현재 전장에서 무기를 휘두르는 사람들 중, 지크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령관은 빈자리에 지크를 앉혔다. 사령관의 바로 옆자리였다. 그가 얼마나 지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절대 나쁜 상황이 아니지만 지크는 내심 기분이 나빴다. 지크의 옆자리에 그렌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렌의 활약상이라면 사령관에게서 두 번째로 떨어진 자리에 배정받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지크도 거기에 항의를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저 그 녀석의 옆자리에 앉아 있다는 상황 자체가 기분이 나빴을 뿐이다.
지크가 자리에 앉자 사령관이 목을 가다듬었다. 그가 마지막인 모양이었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소.”
회의실에 묵직한 긴장감이 자리 잡았다.
“여러분을 부른 것은 앞으로 전장의 상황에 대해 토의하기 위함이오. 여러 관점에서 전장을 본다면 한 명의 눈으로만 봤을 때보다 더 좋은 판단을 내릴 수 있으니.”
그러며 사령관은 지크가 앉아 있는 쪽, 도시의 정규군이 아닌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니 여러분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개의치 않고 말해주길 바라오.”
대부분이 용병인 그들에게도 발언권을 준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지만, 그건 그만큼 현재 도시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걸 알기 때문에 용병들은 그다지 좋은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
“그럼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겠소.”
굳은 표정으로 사령관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도 모두 아시다시피, 도시의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소. 네 차례에 이르는 몬스터들의 습격을 모두 성공적으로 막아냈지. 그것도 피해가 그리 크지 않은 상황에서. 솔직히 기적에 가까운 일이오.”
사람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경험과 실력이 뒷받침되어주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수성이 유리하다지만 지금의 성과는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여기 계신 분들의 노력과, 특히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 두 분 그리고 그 일행의 힘이 무척이나 컸소이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오.”
지크와 그렌을 띄우는 사령관의 말에 그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모두의 생각은 같았다.
지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렌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모두의 노력 덕분입니다.’ 같은 틀에 박힌 소리를 해댔다. 지크는 욕지기를 느꼈다.
“하지만 우리의 성과에 비해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 또한 모두 알고 계실 것이오.”
사람들이 동의했다. 몇몇은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했다.
“몬스터의 습격 빈도는 짧아지고 있고 그 질 또한 상승하고 있소. 이건 최악의 가정이지만, 한 달 뒤쯤에는 베히모스, 바실리스크 같은 고위 몬스터 수십 마리를 동원한 몬스터 군단이 매일 쳐들어올지도 모르오.”
그 끔찍한 가정에 사람들이 신음을 흘렸다. 몇몇은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
“그 정도의 몬스터가 동원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참석한 한 용병이 물었다.
지금껏 쳐들어온 몬스터의 숫자만도 분명 비정상적이다. 한데 그것이 계속해서 충원될 수 있을까.
“데네스트 산맥은 높고 넓소. 그 크기를 제대로 아는 자가 없을 만큼. 그런 산맥에서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 형편이니, 우리는 가능하다고 판단했소.”
“원군은 없습니까?”
이번엔 지휘관 중 한 명이 물었다.
“영주님께서 중앙에 신청을 하셨소. 상황이 급박해진 만큼 원군이 파견되긴 할 테지만, 어느 정도 시일이 걸릴 것이오.”
그나마 희망적인 말이다. 하지만 원군이 도달하기 전에 도시가 함락되어버린다면 아무 소용없는 일. 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상황이 이러니 혹시 뭔가 생각해둔 묘수가 있다면 말해주길 바라오. 사소한 거라도 상관없소.”
하지만 사태를 해결할 묘수라는 게 사람만 모아놓는다고 툭 튀어나오는 게 아니다. 몇몇 의견 교환이 있긴 했지만 그다지 실효성 있는 방법은 나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그렌이 입을 연 것은.
“제게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좌중의 시선이 집중됐다. 지크도 시선을 돌려 그렌을 쳐다봤다.
‘드디어 움직이려는 건가.’
다른 이들이 품은 기대와는 전혀 다른 기대감을 품고 지크는 그렌의 말을 기다렸다.
“일단 지금의 문제는 모두 데네스트 산맥에서 발생한 몬스터들의 습격 때문입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딨수?”
성격 급한 용병 한 명이 퉁명스럽게 말했다가 다른 이들의 시선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기분이 나쁠 법도 하건만 그렌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계속 말을 이었다.
“물론 여기 계신 분들도 모두 알고 계신 일이죠. 그저 한번 짚고 넘어갔으면 해서 한 말입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후, 그렌은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저는 데네스트 산맥으로 들어가 몬스터의 습격에 대해 조사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많은 몬스터들이 합심해서 인간들의 주거지, 그것도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을 공격하는 것은 분명 비정상적인 일입니다. 그에 대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음….”
사령관이 살짝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렌의 생각에 그다지 동의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제너드 씨의 말은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만약 성공한다면 분명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겠지요. 하지만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렌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사령관은 조심스럽게 반론을 꺼냈다.
“아까 말한 대로 데네스트 산맥은 크고 넓습니다. 정말로 그런 이유가 존재한다고 해도 쉽게 찾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며 지크를 힐끔 쳐다봤다.
“여기 있는 지크 씨도 제너드 씨와 같은 이유로 산맥에 올라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크가 긍정했다.
“성과는 있으셨습니까?”
“있다면 상황이 이렇게 됐을 리 없죠.”
성과는 있었고 지금의 습격은 원래의 습격과는 다른 것이지만, 지크는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나무에 대해 퍼뜨릴 생각은 없었으니까.
사령관이 시선을 그렌에게 돌린다.
“물론 지크 씨가 실패했다고 해서 제너드 씨도 실패하리란 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단서도 없이 다짜고짜 찾아간다고 해서 성공하리란 생각은, 죄송하지만 쉽게 들지 않는군요.”
그렌이 도시 소속이 아니고 많은 공을 세웠으며 카르위먼의 명예성기사라는 신분을 갖고 있는 데다 공식적인 회의 자리이니만큼 조심스럽게 말하는 사령관이었지만, 만약 그 이유가 아니었다면 쌍욕을 퍼부으면서 제정신이냐고 일갈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사령관의 부정적인 의견 앞에서도 그렌은 여전히 당당했다.
“단서가 있습니다.”
좌중이 술렁였다. 사령관도 눈을 크게 떴다.
“단서가 있다고요? 어떤 단서입니까?”
그가 상체를 그렌 쪽으로 내밀며 조바심을 보였다. 그렌의 말이 진실이라면 지금의 상황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나오는 것이다.
사람들의 기대에 찬 시선이 모인다. 그러나 그렌은 천천히 고개를 저어 사람들의 기대를 부정했다.
“죄송하지만,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실망감으로 변한다. 몇몇은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렌은 꿋꿋했다.
“어째서 알려주실 수 없단 말입니까?”
“제 개인적 정보 통로를 이용한 것이라서 말이죠. 게다가 아직 확실하지도 않죠.”
“확실하지 않은 일을 말한 겁니까?”
사령관의 목소리에 약간의 불쾌감이 섞였다.
그러나 그렌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강하게 나갔다.
“지금 확실한 게 어디 있습니까? 사태를 해결할 작은 단서마저 없는 상황이죠.”
사령관은 할 말이 없었다.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일입니다. 어차피 좋은 방안은 없지 않습니까? 대안 비슷한 건 제가 낸 의견이 유일한 듯싶은데요.”
그리고 그렌은 사령관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저를 산맥으로 보내주세요.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혼자 도망가려는 거 아니요?”
한 용병이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제 일행은 두고 갈 겁니다. 어차피 이건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하니까요.”
“그러니까 동료조차 두고 도망가려는 것 아….”
용병은 말을 하는 걸 멈췄다. 지금껏 무슨 말을 들어도 평온했던 그렌의 얼굴이 찌푸려진 것이다.
상대가 일반인이라면 옳다구나 하고 더 속을 긁어댔을 용병이지만, 상대는 고위 몬스터를 혼자 때려잡는 괴물이다.
“웬만한 모욕은 참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만, 동료를 두고 도망치려 한다는 말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군요.”
그렌의 싸늘한 말에 용병의 눈이 이리저리 굴렀다.
“그… 미안합니다.”
용병이 작은 목소리로 쥐어짜듯 말했다. 막 나가는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게 용병이란 족속들이고, 그 용병도 이미지와 상당히 맞아 들어가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누구나 들이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과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렌은 용병에게서 눈을 뗐다. 용병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렌의 시선이 다시 사령관을 향했다.
“어떠십니까?”
“음….”
고민에 빠진 사령관.
그때, 그렌을 편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저는 찬성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에게 쏠렸다. 자연스레 그렌의 고개도 돌아갔다.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찬성을 표한 자는 바로 지크였다.
“제너드 씨가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한번 보내주시는 게 어떠십니까?”
찬성을 표하는 걸 넘어 아예 지원까지 한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전력이 빠지는 일이 싫어서 그러시는 거겠죠.”
솔직히 그렌의 전력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면 속는 셈 치고 한번 보내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그렌이 차지하는 전력이 너무 높은 것이 문제였다.
지크와 그렌을 비롯한 몇몇만이 고위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었다. 만약 고위 몬스터들이 아무런 방해 없이 일반 병사들 사이에서 난리를 친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끔찍한 상상밖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제너드 씨가 나름 자신이 있는 것 같으니, 맡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죠.”
“으음….”
사령관의 고민이 깊어졌다.
* * *
그날의 회의는 끝났다. 예상했던 대로 썩 좋은 의견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크의 지원에 힘입어 그렌의 제안은 통과가 됐다.
그는 바로 다음 날 데네스트 산맥으로 향하기로 했다.
“설마 당신이 나를 도와줄지는 몰랐습니다.”
회의실에서 나온 후, 그렌이 지크에게 말했다.
“뭘 그렇게 놀랍니까? 대단한 도움도 아닌데.”
“당신과 내가 도움을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그럼 지금껏 전투에서 협력한 건 뭡니까? 이번 건도 그런 선에서 한 거니까 괜히 찝찝해할 필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고마워하진 않겠습니다.”
“바라지도 않습니다.”
지크는 손을 내저으며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그렌의 시선이 느껴진다.
‘새꺄, 도와줬으면 걍 받아 처먹어. 감사는 바라지도 않으니까.’
오히려 녀석이 감사를 한다면 온몸에 즉사성 두드러기가 나 목숨을 잃을 자신이 있었다.
‘네 놈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야 뭔 꿍꿍인지 알 거 아냐?’
슬슬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가 된 것일까. 히죽 올라간 지크의 입가에서 진한 음모의 향기가 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