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3화
술을 꽤 좋아하는 편인 지크였지만 오늘 그가 마신 술은 고작 맥주 한 잔뿐이었다.
그가 고작 술 좀 마신다고 판단력이 흐려지거나 몸을 가누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와 술을 마시는 맥스는 달랐고, 일단 그를 배려해야 하는 지크도 술잔을 내려놨다.
잔 바닥에 고인 몇 방울의 맥주도 어떻게든 핥아 먹으려는 맥스의 모습이 처량하게까지 보였다.
하지만 맥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남의 시선보다는 조금 남은 맥주가 훨씬 중요했다.
“한 잔 더 먹지 그럽니까?”
“단장님이 절대 두 잔 이상 마시지 말랬다.”
마치 부모님에게 꾸중이라도 들은 양 그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그럼 그만 일어나죠.”
“기다려 봐. 아직 조금 남았잖아.”
맥주잔 안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혀가 혐오스럽다. 지크가 한숨을 내쉬고 그를 다시 한번 채근하려 할 때였다.
땡! 땡! 땡! 땡!
시끄러운 종소리가 도시를 가득 울렸다. 일어서 있던 지크도, 하염없이 빈 맥주잔 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맥스도, 그 외의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종소리가 들린 곳을 쳐다봤다.
성벽 위 종탑에서 요란스럽게 종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탓!
지크와 맥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뛰었다. 목표는 비상사태가 일어났을 때를 대비해 지정해진 집결지였다.
그들은 거리를 내달렸다. 갑작스럽게 울린 비상종은 안 그래도 불안감에 꽉 차 있던 도시 사람들의 감정을 아주 제대로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들이 지나친 거리마다 걱정과 불안에 빠진 사람들이 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혼란. 그 불길한 개념이 스멀스멀 도시 안에서 독처럼 퍼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몬스터인가?”
“그럴 가능성이 높죠.”
앞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능숙하게 피해가며 둘은 대화를 나누었다. 맥스를 두고 훨씬 더 빠르게 목적지로 갈 수 있는 지크였지만 그는 맥스와 발을 맞췄다.
어차피 그들이 가는 집결지는 같은 곳이었다.
데네스트 산맥을 바로 마주 보는 성벽. 몬스터들이 습격을 할 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펼쳐진 곳이다.
저번 습격에서 지크 일행과 그렌 일행, 그리고 늑대의 송곳니의 범상치 않은 실력을 확인한 도시 상층부가 그들의 집결지를 바꾼 것이다.
“이번에도 저번과 비슷한 규모려나?”
“그렇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둘은 빠르게 집결지에 도착했다. 이미 도착해 있는 도시 병력의 지휘관에게 자신들이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고 사태를 살피기 위해 성벽 위로 뛰어올라 산맥 쪽을 쳐다봤다.
몬스터의 무리가 몰려오는 게 보였다.
“규모는 비슷한 것 같은데….”
아직 몬스터들을 전부 본 건 아니지만 어림짐작으로 저번과 비슷한 규모란 생각이 든 맥스는 조금 안도한 투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지크의 말이 그의 안도를 깨부쉈다.
“저기를 보세요.”
지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맥스가 쳐다봤다.
“…뭐냐, 저거?”
방금 전까지의 안도감은 어디로 가고 딱딱한 긴장감이 그의 몸을 맴돌았다.
몬스터 사이에 이상한 것이 섞여 있었다.
아니,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도 분명 몬스터였다.
문제는, 쌓은 경험이 상당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맥스조차 처음 보는 형태의 녀석이라는 데 있었다.
고블린, 오크, 트롤, 오거 같은, 흔한(?) 몬스터 사이에 있는 그 녀석은 덩치가 무척이나 컸다. 주변 몬스터들을 마구 짓이기며 기어 오는 그것의 모습은 사람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지크가 그 정체에 대해 말했을 때, 맥스는 그 추상적인 공포가 실체를 드러내며 비웃는 것 같았다.
“바실리스크입니다.”
“…저게?”
바실리스크. 무식한 용병인 맥스도 들어본 몬스터다.
외견은 보이는 대로 거대한 뱀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 꼬리는 강철을 깨뜨리고 그 독은 바위를 녹이며 그 눈빛은 사람을 돌로 만든다고 하는, 존재가 확인은 됐지만 보통 사람들에겐 이야기 속에서나 나타나는 그런 존재에 가까운 몬스터였다.
“하긴, 데네스트 산맥이라면 저런 놈들 있는 것도 이상하진 않지만….”
생전 처음 보는 몬스터이니 맥스의 당혹감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 몬스터가 강력한 몬스터라면 더더욱.
“저거 막을 수 있겠냐?”
“한 마리 정도라면 충분합니다.”
“그래?”
지크의 말에 다시 한번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뒤 이은 지크의 말에 표정을 굳혔다.
“저게 한 마리만 있다면 말이죠.”
“…설마 아니겠지?”
“저도 확답은 할 수 없지만, 솔직히 바실리스크가 보인다면 고위급의 몬스터들도 이상 준동의 영향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한데 데네스트 산맥의 고위 몬스터가 저 녀석 한 마리라는 것도 이상한 일이죠.”
“이런, 젠장!”
지크의 암울한 소리에 맥스는 신경질적으로 성벽을 걷어찼다.
‘솔직히 데네스트 산맥의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저번 전투가 쉬웠던 거지.’
본격적인 전투는 지금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병력들이 속속 도착하는 게 느껴진다. 그중에는 지크 자신의 일행도 있었다. 그리고.
‘그렌 제너드도 왔군.’
지크는 성벽 아래로 다른 일행과 급히 달려온 그렌을 내려다봤다.
* * *
“쏴라!”
본격적인 충돌은 저번 전투에서도 그랬다시피 피알루 성벽에서 쏟아진 화살로부터 시작됐다.
화살에 맞은 소형 몬스터들이 픽픽 거꾸러진다. 재수 없게 화살이 급소를 가격한 중형 몬스터들도 목숨을 잃었다.
그 다음 쏟아진 건 마법 공격이었다.
콰앙! 콰앙!
불덩이들이 몬스터들을 마구잡이로 가격한다. 폭발 한가운데에 있던 몬스터들은 몸이 갈기갈기 찢겼고 주변에 있던 몬스터들도 폭풍과 화염에 피해를 입었다.
특히 마법들은 강력한 몬스터들이 있는 곳들을 집중적으로 타격했다. 트롤이나 오거 같은 강력한 몬스터들이 산산이 찢겨 허공으로 날아가는 모습은, 공포 때문에 심적으로 위축된 사람들에게 시원한 감정을 선사해줄 광경이었다.
하지만 저번 전투 같았으면 환호를 했을 병사들이 이번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키에에에엑!
끔찍한 소리에 병사들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게 빈틈이 되어 부상을 입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는 경우까지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그 괴성은 심부의 공포를 자극해댔다.
콰드득!
앞에 얼쩡거리던 코볼트 한 마리가 무참하게 짓이겨진다. 피가 확 튀어 단단한 비늘에 흔적을 남긴다.
하지만 바실리스크는 또 한 마리의 작은 몬스터가 고작 자신의 움직임만으로 죽어버렸다는 사실에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그것의 불길한 눈은 그저 피알루의 성벽에 못 박혀 있었다.
콰직!
성벽 위로 올라오던 오거의 두개골을 찍어낸 지크가 바실리스크를 바라봤다.
‘슬슬 가볼까.’
녀석이 더 이상 성벽에 다가오게 만들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덤빈 몬스터들은, 아무리 강한 녀석이라도 성벽이라는 이점을 어찌어찌 살릴 수 있는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바실리스크는 아니다.
‘녀석의 사거리 밖에서 쓰러뜨려야지.’
지크는 성가퀴 위로 올라섰다. 옆의 병사들이 놀라 그를 쳐다봤지만 곧 다시 몬스터들 쪽으로 신경을 돌렸다.
이미 지크는 피알루, 특히 병사들 사이에서 유명한 자였다.
알아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윈두르의 특색 있는 모습은 어디서나 눈에 띈다.
탓!
그의 옆으로 누군가 올라왔다. 지크는 무표정한 얼굴로 옆으로 봤다.
재수 없는 얼굴이 보였다.
“바실리스크를 토벌할 생각이죠?”
“당신도 갈 생각입니까?”
“위험은 한시라도 빨리 없애는 게 좋으니까요. 일반 병사들이 감당할 수 있는 놈도 아니고 말이죠.”
그렌의 손에 쥐어진 토르니움이 그 묵빛의 이빨을 드러낸다. 그렌은 저 멀리 기어 오는 바실리스크에 시선을 뒀다가 힐끔 지크를 쳐다봤다.
‘이 녀석이 눈에 띄게 만들 순 없지.’
물론 몬스터 토벌로 지크를 능가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다.
지크의 실력을 그렌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물론 그것에 실망하진 않는다. 이 전투에서 눈에 띌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은가.
지크가 몬스터를 아무리 죽인다 하더라도 최고의 공적은 자신이 받을 것이라고 그렌은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녀석이 눈에 띄게 설치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수도 없어.’
최대한 지크의 공적은 가리고 자신의 공적은 띄워야 한다. 그런 판국에 지크가 바실리스크를 단독 토벌하게 둘 리 없었다.
그런 그렌의 속내를 지크는 확연히 꿰뚫고 있었다.
‘옛날이라면 재수 없는 용사 자식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지금은 속 다르고 겉 다른 개자식이라는 이미지였다.
‘어라? 이 녀석, 적어도 회귀 전의 용사 그렌 제너드보다는 호감형이 됐나?’
적어도 지크는 정의롭고 고결한 용사보다는 겉 다르고 속 다른 개자식이 더 나은 사람 아니던가.
지크는 그렌을 잠시 쳐다봤다.
“…왜 그렇게 보시죠?”
“아뇨, 별일 아닙니다.”
지크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성 아래로 뛰어내리며 생각했다.
‘저 새끼가 날 이용해먹은 것만 아니었다면 관계를 새롭게 했을지도 모르겠어.’
물론 자신을 이용해먹었으니만큼 적대 관계가 풀릴 일은 절대로 없겠지만.
* * *
지크와 그렌은 몬스터들을 난도질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윈두르와 토르니움이 휘둘러질 때마다 눈앞의 몬스터가 뭉텅뭉텅 썰려 나갔다.
그들의 전진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일반인이 전속력으로 달리는 속도와 엇비슷할 정도였다. 몬스터들의 벽은 그들에게 장애물조차 되지 않았다.
때문에 그들이 바실리스크 앞에 당도할 때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바실리스크도 그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섬뜩한 눈빛이 지크와 그렌을 향했다.
키이이이익!
녀석이 입을 벌리며 괴성을 내질렀다. 독액이 뚝뚝 떨어지는, 촘촘하게 난 커다란 이빨이 무척이나 섬뜩했다.
녀석이 몸을 뒤로 뺐다. 지크와 그렌의 거침없는 전진에 겁이라도 먹은 것일까. 그러나 바실리스크는 그런 몬스터가 아니었다.
투확!
마치 팽팽한 화살줄에서 튕겨나간 화살같이 바실리스크의 머리가 앞으로 쏘아졌다. 쩍 벌어진 입과 날카로운 이빨 그리고 독액이 둘을 향했다.
둘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양 옆으로 갈라졌다.
콰아앙!
성 안에서 쏟아지고 있는 마법 공격에 뒤지지 않을 커다란 굉음이 났다.
이빨과 독만이 그것의 무기가 아니었다. 탄탄한 근육과 단단한 비늘에서 나오는 육탄전 또한 바실리스크의 치명적인 무기였다.
바실리스크가 휩쓸고 지나간 지역에 커다란 도랑이 파였다. 휩쓸린 몬스터들이 산산이 부서져 있다. 이빨에 스친 몬스터는 독 때문에 몸 전체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모골이 송연한 광경이다. 그러나 지크와 그렌에겐 겁을 먹은 기색이 없었다.
둘 모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실리스크의 몸뚱이에 검을 휘둘렀다.
콰지직! 콰직!
마력은 가득 머금은 윈두르와 토르니움이 단단한 바실리스크의 비늘을 깨뜨리고 살을 갈랐다.
카아아아악!
바실리스크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흔든다. 그것만으로도 강대한 공격이 됐다. 지크와 그렌은 뒤로 물러났다.
후웅!
바실리스크가 꼬리를 휘둘렀다. 목표는 지크였다. 아무래도 그렌보다는 지크가 낸 상처가 더 아픈 모양이었다.
지크가 허리를 숙였다. 위로 바실리스크의 꼬리가 지나간다. 거센 파공음과 풍압이 그 위력을 예측케 했다.
바실리스크의 신경이 지크에게 쏠린 틈을 타 그렌이 다시 한번 토르니움을 휘둘렀다. 꼬리를 피한 지크도 윈두르를 휘둘렀다.
키에에에엑!
몇 번 더 몸을 굴리고 꼬리를 휘둘렀지만 지크와 그렌을 잡을 순 없었다. 분노한 바실리스크가 둘을 노려봤다.
그 순간이었다.
번쩍!
바실리스크의 눈이 빛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