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2화
몬스터를 인위적으로 조종하는 방법은, 지크가 아는 한 세 개다.
일단 예전 트리슬로와가 만들려 시도했던 사각뿔의 원혼을 이용한 방법. 라일라가 클로원의 공주 시절 몬스터를 동원했던 방법. 그리고 비올루윈에서 로브 놈들이 도시를 습격했을 때 사용했던 방법이 있다.
물론 그것들이 전부 다른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적어도 클로원의 공주였을 시절의 라일라가 몬스터를 동원한 방법과 로브 놈들이 비올루윈을 습격했을 때 몬스터를 동원한 방법은 같을 가능성이 크지.’
둘 다 클로원의 유산을 이용했을 것이다.
‘밸리드의 사각뿔의 원혼도 마찬가지야.’
많은 회귀를 거치며 온갖 곳에 손길을 뻗은 그렌이 밸리드는 가만히 놔두었을 거란 상상은 하기 힘들다.
‘어쩌면 사각뿔의 원혼도 그렌이 밸리드에게 몰래 제공한 물건일지도 모르지.’
어쨌든, 그렌은 분명 몬스터들을 동원할 방도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걸로 뭔가 수작을 부리려는 게 분명했다.
‘이렇게 빨리 그놈을 엿 먹일 기회가 올 줄이야.’
세상에서 성공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는, 찾아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지크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도시를 떠나기 전에 기분 좋은 일 하나 할 수 있겠어.’
지크는 기분이 좋아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의 기분과는 다르게 일행은 지크와 멀찌감치 거리를 두었다. 심지어 라일라도 지크에게 몇 걸음 물러났다.
“소름끼쳐.”
라일라의 중얼거림이 일행의 심정을 대변했다.
* * *
그 뒤로 지크는 그렌을 감시했다. 녀석이 무언가를 꾸민다면 어떤 움직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렌에게서 수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녀석은 그저 몬스터를 퇴치하고 숙소에 머무르며 종종 거리를 거닐거나 라일라의 관심을 끌려 할 뿐이었다.
설마 지크의 예상이 틀린 것일까. 하지만 지크는 그 가능성은 낮게 봤다.
그렇다면 예상가는 건 둘.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거나 아니면 이미 필요한 수작을 전부 부려놨거나.’
지크는 후자의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봤다. 이미 몬스터의 습격이라는 이상 현상이 가시화되어 있는 것이다. 아마도 지크가 바람의 나무를 확인하기 위해 도시를 떴을 때 수작질을 해놓은 것이 아닐까.
라일라에게 감시를 맡겨놓긴 했지만, 아무래도 그녀 능력상 교활한 그렌의 모든 걸 감시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오로지 그렌 제너드의 감시에만 전력을 쏟아 붓지도 못했을 테고.’
그렇다면 그렌이 해놓은 수작질은 무엇일까.
떠오른 것은 후일 재난의 마왕이 되리라 생각되는 틸과 피알루를 공격하고 있는 몬스터들이다.
틸 그리고 몬스터. 그 두 개의 단어를 두고 지크는 그렌의 행동을 짐작해 봤다.
‘녀석의 목표는 당연히 용사 놀음이겠지.’
그렇다면 몬스터 토벌은 아니다. 용사로 추앙받으려면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굉장한 공적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피알루엔 그렌 일행뿐만이 아니라 지크 일행도 있다. 그리고 지크 일행의 실력은 그렌 일행의 실력보다 우위에 있다. 그것도 훨씬.
기껏 몬스터의 습격을 연출해도 지크 일행에게 눈길을 빼앗길 것이 뻔했다.
‘녀석이라도 지금의 실력 차이를 모르진 않을 거야.’
오히려 더더욱 신경 쓰고 있을 것이다. 일정 지역뿐이라지만 용사 취급을 받고 있는 지크는 그에게 눈엣가시일 테니까.
물론 몬스터의 움직임과 완전히 무관계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몬스터를 움직인 이유가 없을 테니까.
단, 진짜 목적은 따로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틸인가. 녀석이 틸을 이용하는 방법엔 뭐가 있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지금껏 로브 놈들이 마인들을 타락시킬 때 사용한 방법이다. 주변인을 이용해 상대를 타락시키는 것.
‘틸의 주변 인물이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틸과 사이가 안 좋았던 닉과 반대로 틸과 사이가 좋았던 맥스다.
‘아이들도 있긴 하지만….’
설마 아이들을 이용할까?
‘아니, 녀석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어.’
그 빌어먹을 그렌 제너드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지크는 확신할 수 있었다.
‘어쨌든 틸의 주변을 살펴야 한다는 건 확실하군.’
지크는 감시 대상에 그렌과 함께 틸의 이름을 올렸다.
* * *
몬스터의 습격은 계속됐다. 며칠 동안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간간이 도시 주변에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몬스터들의 수는 많아졌고 몬스터들의 출몰 빈도도 잦아졌다.
사람들은 불안해했다. 또다시 몬스터들이 대량으로 습격하는 전조가 아닐지 걱정된 것이다.
저번 몬스터의 습격은 성공적으로 막아냈지만 피해가 없던 게 아니다. 게다가 저번과 비슷한 규모로 습격이 온다는 보장도 없다.
두 번째 습격은 첫 번째 습격보다 더 대규모로 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크는 몬스터의 움직임이 인위적이라는 전제를 갖고,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관점으로 이 현상을 보고 있었다.
‘몬스터를 조종해서 도시를 습격하려 한다면, 이런 식의 운용은 필요치 않아.’
오히려 도시 사람들의 경계심을 강화해서 방해만 될 뿐이다. 차라리 몬스터들의 습격을 점점 줄이거나 아예 없애, 도시 사람들의 방심을 유도하는 편이 낫다.
‘그렇다면 도시 습격은 목적이 아니라는 얘긴데.’
혹, 도시 습격이 계획 안에 있더라도 주목적은 아닐 것이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역시 도시에 불안감을 조장시키려는 것이다. 지금 도시의 불안감은 최고조에 이르러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최종 목적은 아닐 것이다.
‘도시에 혼란을 초래하거나, 무역을 중단시키거나.’
아니면 전혀 다른 이유가 있거나.
‘일단 다른 정보를 얻어야겠어.’
지금 생각난 목적 후보들을 가려낼 정보가 더 필요했다.
지크는 거리로 나갔다. 만날 사람이 있었다.
도시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지만 거리에는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꽤 많았고 상점들도 문을 열고 있었다.
불안감 속에서도 사람들은 살아야 했고 아직 몬스터들이 대대적인 습격을 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시각은 슬슬 해가 질 무렵이다. 가게 밖으로 테이블을 차려 놓은 술집에 몇몇 사람이 앉아 있었다. 대부분은 일을 끝낸 용병들이었고 시민들도 조금 껴 있었다.
“여기야!”
테이블에 앉은 한 사람이 손을 들어 지크를 부른다. 지크는 그에게 다가갔다.
“일찍 나왔군요.”
“네가 늦은 거야.”
상대, 맥스는 지크가 맞은편에 앉는 걸 보고 종업원을 불렀다.
“맥주지?”
제대로 대답도 듣지 않고 맥스는 맥주를 주문했다. 이미 그의 앞에는 반쯤 마신 맥주가 놓여 있었다.
“대답도 듣지 않고 시키깁니까?”
“대답은 무슨. 시답잖은 소리 말고 주는 대로 마셔. 지금껏 다른 건 마시지도 않던 녀석이….”
그리고 맥스는 껄껄 웃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그의 얼굴에 있는 흉터가 위협스럽게 꿈틀거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라며 지크를 깍듯이 대접하던 맥스였지만 지금은 마치 친한 동료 혹은 동생을 대하듯 행동하고 있었다.
지크가 틸의 주변을 감시한다 정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몸을 숨긴 채 그의 주변을 살핀다는, 감시라는 단어에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릴 그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위험성이 크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그래서 다음으로 떠올린 것이 틸의 주변 사람에게서 정보를 캐는 것이었다. 정보를 얻는 데 시간이 걸리고 얻은 정보도 정보를 전달한 사람의 주관에 뒤틀릴 가능성이 있는 방법이지만, 직접적으로 감시를 하는 것보다 위험성도 낮고 시간의 소모도 적다.
그렇게 지크가 선택한 사람이 맥스였다.
틸과 무척 가까운 사람 중 한 명이자 카르위먼의 성기사인 지크에게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
‘그리고 틸을 타락시키는 용의자 중 한 명이기도 하고.’
물론 지금은 용의자라는 표현을 쓰기도 우스운 상태다. 어떤 근거도 없이 그저 틸 주변에 있는 인물들을 죄다 의심하고 있는 상태니까.
그러나 틸과 가까운 사람이니만큼 눈여겨볼 사람임은 분명했다.
어쨌든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지크는 맥스에게 접근했다.
둘은 꽤 빠르게 친해졌다. 맥스는 안 그래도 예전 지크 일행과 그들 용병단 사이의 트러블 때문에 지크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하고 있었다.
거기에 지크의 성기사답지 않은, 좋게 말하면 호방하고 나쁘게 말하면 거친 성격은, 아무리 신뢰와 믿음을 중점으로 둔다 하더라도 그 근본은 용병일 수밖에 없던 맥스와 무척이나 잘 맞았던 것이다.
어느새 둘은 종종 일이 끝난 후 만나 맥주 한 잔을 기울이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지크의 눈치를 보던 맥스가 지크에게 말을 놓을 정도로 무척 친한 사이로.
종업원이 주문한 맥주를 들고 왔다. 두 잔이었다.
한 잔은 지크의 앞에 두고 다른 한 잔은 맥스의 앞에 둔다. 어느새 맥스의 맥주잔은 텅 비어 있었다.
“그렇게 많이 먹어도 됩니까?”
두 번째 맥주잔을 들고 좋아라하는 맥스를 지크가 타박했다.
아무리 오늘의 임무가 끝났다고 하더라도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언제든 최소의 전투 준비는 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만 마시고 그만 마실 거야.”
그의 목소리가 음울하다. 지금 들고 있는 맥주잔이 마지막이라는 것에 심란한 모양이었다.
사막을 여행해 온 목마른 나그네가 물을 들이켜듯 마시던 첫째 잔과는 달리 맥스는 이번엔 뜨거운 차를 마시듯 홀짝였다.
마시면서도 인상을 찡그리는 게, 줄어드는 맥주의 양이 불쾌한 모양이다.
그 알기 쉬운 표정에 지크는 고소를 지으면서 자신의 맥주를 마셨다.
지크와 맥스는 잡담을 나눴다. 정보를 얻기 위해 맥스를 만났지만 지크는 굳이 정보를 끌어내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대화는 둘 사이의 공통적인 주제가 주 화제가 되는 노릇이다. 지크가 그 화제를 언급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흐른다.
“몬스터들의 습격이 빈번해지는 건 너도 알고 있지?”
이렇게 말이다.
“물론이죠. 그것 때문에 도시도 불안감에 휩싸여 있지 않습니까.”
“그 때문에 윌터와 엘리를 다른 도시로 보내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어.”
맥스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지크는 눈을 빛냈다.
“하긴, 아이들을 이 도시에 두는 건 위험하죠. 언제 또 몬스터의 습격이 일어날지 모르는 판국에 말입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이제야 단장님과 닉 부단장이 정신을 좀 차렸나 싶어.”
원래부터 용병단에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틸과 닉의 방식에 거부감을 표하던 맥스였다. 당연히 이번에 나온, 아이들을 다른 도시로 보내자는 의견이 하니 무척이나 마음에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용케 그런 의견을 말할 사람이 있었군요? 용병 일을 하는 중에도 아이들을 끼고 다닐 만큼 극성인 두 분에게 그런 말을 하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요.”
“쉽지 않지. 다만 이번에는 괜찮았어. 말을 꺼낸 사람이 닉 부단장이었거든.”
“그렇군요. 그렇다면 별문제 없었겠습니다.”
그러며 지크는 더 이상 흥미 없다는 듯 다시 맥주를 홀짝였다. 하지만 그의 눈에 이채가 반짝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