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1화
하지만 그렌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용사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그의 광기 어린 집착은 거센 정신적 충격에도 표정에 흔들림을 보이지 않게 했다.
마치 멀리 출장을 갔다 온 남편과 그를 기다리던 아내라는 신혼부부와도 같은 둘의 모습을 보며 그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입니다, 지크 씨.”
그렌이 지크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라일라가 고개를 돌린다. 지크를 반길 때와는 전혀 다르게 그녀의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 모습이 그렌의 짜증을 한층 더 오르게 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오랜만이군요, 제너드 씨.”
지크가 그렌의 손을 가볍게 맞잡았다가 놓았다.
“몬스터들의 이상 준동을 조사하고 오신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성과는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지크가 고개를 저었다.
“주변 몬스터가 상당수 내려오긴 했는지 몬스터들의 모습이 줄어들긴 했습니다만, 발견한 건 그것뿐입니다. 원인이 뭔지는 모르겠습니다.”
“흐음, 그것 참 아쉽군요.”
말과는 다르게 그렌은 무척이나 기분 좋았다. 만약 지크가 이 사건의 원인을 알아왔으면 그의 명성은 한층 더 올라갈 것이 뻔했다. 그런 게 반가울 리 없다.
무엇보다도 지크의 실패 자체가 그렌에게는 기쁨이었다.
지크가 라일라를 보며 물었다.
“지금 몬스터들의 행동은 어때?”
“예전처럼 대규모 습격은 없었어. 출몰 빈도도 낮아졌고. 하지만 꾸준히 도시 근처로 내려오고 있는 것 같아.”
“결국 사태는 해결되지 않았다는 거군.”
고개를 주억거린 지크가 그렌에게 시선을 돌렸다.
“전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며칠 간 산맥을 휘젓고 다녔더니 피로가 쌓였네요.”
“아, 제가 눈치 없이 잡고 있었군요. 어서 들어가 쉬시지요.”
지크는 살짝 눈인사를 하고 등을 돌렸다. 그의 뒤를 라일라가 따라붙었다.
그녀도 눈인사를 하긴 했지만 더 이상 그렌에겐 신경도 쓰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둘이 사라진 곳을, 그렌은 잠시 응시하다가 몸을 돌렸다.
* * *
지크는 윈두르를 방 한구석에 놓아두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으, 편하다!”
푹신한 이불에 몸을 묻으니 온몸의 피로가 조금씩 떨어지는 것 같다. 지크는 사지를 활짝 벌린 채 고치를 만드는 애벌레처럼 몸을 뭉기적거렸다.
“피곤해?”
“적당히.”
그 지크가 적당히라고는 해도 피로를 느끼다니. 고작 산맥을 헤집고 다닌다고 피로를 느낄 지크가 아니다. 그게 아무리 데네스트 산맥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뭔가 있었구나?”
“뭔가 있었지.”
라일라가 의자 하나를 끌어와 침대 옆에 앉았다. 당장 말을 하라는 뜻이었다.
“피곤하다니까.”
“적당히라며? 천하의 지크가 그 정도로 앓는 소리를 내진 않을 텐데.”
“그건 그렇지.”
반박할 수 없는 완벽한 논리에 지크는 상체를 일으켰다.
일단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자가 있는지 살폈다.
숙소는 여전히 텅텅 비어 있었다. 가장 꺼려지는 그렌 일행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렌도 숙소를 나간 모양이었다.
“발견했어.”
지크는 그렇게만 말했다. 그러나 라일라에겐 그걸로 충분했다.
“속성은 뭐였어?”
“바람.”
“어떻게 생겼는데?”
“불이나 물처럼 화려하진 않더라. 다만 공중에 떠 있고 주변에 바람이 꽤 거세게 몰아친다는 게 특징이었지.”
라일라가 눈을 반짝였다.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 봐 공중에 떠 있는 나무라는 데에서 상당한 호기심을 느낀 것이다.
당장이라도 바람의 나무에 대해 온갖 질문을 퍼붓고 싶었지만 라일라는 참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별일 없었어?”
“응. 뭔가 있었으면 바로 돌아와 너한테 도움을 청했겠지.”
왕이 되겠답시고 설치는 귀 긴 놈들도, 제멋대로 움직여대는 거대한 동상들도, 고대의 실험체도 없었다.
“다행이네. 이번에도 영락없이 이상한 사건을 겪을 거라고 생각했어.”
“겪긴 했어.”
의문의 눈빛을 던지는 라일라에게 지크는 천천히 자기가 경험한 일을 설명해줬다.
묵묵히 말을 듣던 라일라는 지크의 말이 끝나자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만 기다려줘.”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와 머리가 복잡한 모양이었다. 지크는 그녀가 조용히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다시 이불 위에 누웠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지났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 정도면 제국이나 회귀에 관해서는 대부분 알아낸 거네.”
“그렇지.”
하지만 다시 상체를 일으킨 지크는 개운치 않아 보였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그렌 제너드나 흑막에 대해서 알아내지 못한 게 아쉬워.”
“지크 브레이브가 갑자기 사라졌다고 했지?”
“그래. 그때의 상황을 생각하면 녀석이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
무언가 방해가 들어온 게 확실했다.
“그 흑막이란 자일까?”
“아니면 원래 시간제한이 있었는데 그놈이 멍청하게 잊고 있었든지.”
“…그건 아니지 않을까?”
아무래도 지크는 지크 브레이브를 어떻게든 깎아내리고 싶은 것 같았다.
“아니, 충분히 그럴 놈이야. 그러니까 약속도 내팽개쳤지. 어라? 이 녀석, 정말로 대가리 깨지기 싫어서 도망간 거 아냐?”
혹여나 다음번에도 만나게 된다면 바로 대가리를 깨버리겠다는 둥, 이자를 붙여서 팔다리도 다져놔야겠다는 둥, 순진한 사람이 듣는다면 하얗게 질릴 법한 살벌한 말을 중얼거리는 지크. 지크 브레이브에 대한 그의 집착 어린 원한이 여전한 걸 확인하고 라일라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선 별것 없었냐?”
“없었어. 계속 몬스터 토벌을 다닌 것 정도고.”
“그렇게 보기엔 그렌 제너드와 상당히 친해 보이던데?”
“어머. 질투하는 거야?”
라일라가 살짝 웃으며 물었다.
“궁금증이 돋았을 뿐이야. 내가 아는 라일라는 그렇게 눈이 낮은 녀석이 아니니까.”
“이럴 때는 질투했다고 해주는 거야.”
“질투 났어. 질투가 너무 나서 그렌 제너드의 얼굴에 당장이라도 윈두르를 꽂아 넣고 싶은 기분이야.”
“그건 평소와 같잖아.”
지크는 언제나 그렌의 얼굴에 윈두르를 꽂아 넣고 싶어 했다.
킬킬거리는 지크를 보며 라일라가 말했다.
“네가 떠난 후에 갑자기 접근하더라고. 차나 한잔 하자며 말을 걸고는 잡담 같은 걸 하길래 어울려 줬지. 녀석의 정보를 빼내기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빼낸 건 있어?”
“전혀. 정말로 철저하게 자신의 일에 대해서 숨기고 있어. 말해봤자 중요하지 않은 것들뿐이고.”
“평생을 거짓과 기만 속에서 살아온 놈이다. 이제 와 순진하게 자기 정보를 털어댄다면 오히려 의심을 해야지.”
그렌의 그 능력만큼은 지크도 인정을 했다. 때문에 라일라가 정보를 빼내지 못한 것에도 실망을 하진 않았다.
“그런데 정말로 그놈이 널 제 동료로 찍은 것 같은데? 부럽다, 부러워.”
라일라의 손에 뾰족한 얼음 송곳이 생기는 걸 보고 지크는 얼른 침대 뒤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눈 위쪽만 쏙 빼서 라일라를 쳐다봤다.
“그 외에 뭔가 할 말이 있어?”
“꿈을 꿨어.”
얼음 송곳을 없애고 그녀가 말했다.
“꿈?”
“지금까지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라일라는 꿈속에서 클로원의 공주이자 브뤼셀 시스템의 코어였던 자신의 모습을 봤다고 했다.
“날짜를 역산해보면 아마 네가 지크 브레이브를 만난 직후가 아닌가 싶어.”
“녀석과의 만남이 너한테도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는 거군.”
“그리고 그 꿈을 꾼 이후부터, 그렌 제너드가 나를 꼬시는 빈도가 줄었어.”
지크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놈도 꿈을 꿨나?”
“가능성은 충분하지. 그리고 녀석의 행동이 변한 걸 보면, 그 꿈이 녀석에게 뭔가 영향을 줬을 수도 있고.”
녀석을 조금 더 주의해서 봐야 할 이유가 늘었다.
“어쨌든 여기서 목적한 건 얻은 거지?”
라일라의 질문에 지크는 생각을 머리 한켠에 집어넣었다.
“그렇지. 지크 브레이브의 말을 다 듣지 못한 건 아쉬움이 남지만, 그래도 다음에 할 일은 정해졌으니 됐어.”
지크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 한구석에 세워둔 윈두르를 들어 올렸다.
지크의 마음을 아는 듯 그것은 검의 날을 휘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지금껏 가리킨 곳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라일라는 윈두르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세계수의 일부라니. 범상치 않은 검임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런 대단한 존재의 일부일 줄은 몰랐다.
“그럼 바로 떠날 거야?”
“조금은 더 남아 있어야지. 아직 해결 안 된 게 있잖아.”
“틸과 그렌 제너드 말이지?”
“그것도 있고. 아직 몬스터의 습격이 안 끝났다며. 그건 해결하고 가야지.”
라일라가 두 눈을 깜박였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확실히 묻어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녀의 눈이 초승달을 그렸다.
“그래. 몬스터들의 습격에 위험한 도시를 구해야지.”
“…뭔가 불쾌한 기분이 든다만.”
마치 기특한 아이를 보는 어머니의 눈빛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지크는 아버지, 새어머니는 물론 친어머니에게도 저런 시선을 받아본 적이 없다.
“기분 탓이야.”
“그래, 기분 탓이겠지.”
“그런데 틸과 그렌 제너드는 그렇다 치고, 몬스터 습격은 언제 끝날지 모르잖아. 정말로 끝날 때까지 있을 거야?”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습격 때문에 한 도시에만 머무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다. 지크 일행처럼 뚜렷한 목적이 있다면 더더욱.
하지만 지크는 느긋했다.
“그렌 제너드 놈의 회귀가 끝장났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여유가 많이 생겼어.”
그건 그렇다. 언제라도 자신이 행해왔던 모든 일이 그 어떤 전조도 없이 헛된 꿈처럼 사라지는 일이 없을 거라는 사실은 생각 이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었다.
“게다가 몬스터의 습격은 바람의 나무의 봉인이 반쯤 풀려서 두서없이 뿜어진 마력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든. 곧 사그라들 가능성이 높아.”
그것 또한 일리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크의 말은 반만 맞았다.
몬스터들의 습격은 가라앉지 않고 다시 폭증하기 시작했다.
* * *
서걱!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포효하는 오거의 목이 잘렸다. 어찌나 깔끔하게 잘렸는지 오거의 머리는 아직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허공에서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지크는 자신에게 쓰러지는 머리 없는 오거의 몸뚱이를 슬쩍 피하고 다른 몬스터를 찾았다.
주변은 몬스터의 사체와 피로 엉망이었지만 그의 신색은 무척이나 깨끗했다.
‘끝났군.’
다른 몬스터들은 일행에게 모두 쓰러져 있었다.
지크는 윈두르를 등에 멨다.
일행의 몸을 한 번 훑었다. 상처를 입은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지크에게 다가오는 라일라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계속 늘어나고 있어, 지크.”
“그러게 말이다.”
지크는 데네스트 산맥을 쳐다봤다.
구름을 뚫고 커다랗게 솟아있는 그 산맥은 도시를 내려다보며 사람들의 발악을 비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바람의 나무 때문일까? 우리 생각과는 달리 그게 오히려 몬스터를 끌어들이고 있을 수도 있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지크는 그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고 봤다.
“아드로원 대수림에서 몬스터들이 날뛰진 않았잖아.”
불의 나무는 이미 일찌감치 해방되어 있었다.
하지만 엘프들이 몬스터들에게 대규모 습격을 받았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아드로원 대수림도 상당한 몬스터들이 서식하고 있는 곳이다.
만약 불의 나무가 몬스터를 끌어들였다면 엘프들이 그렇게 쉽게 살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막 봉인에서 깨어나서 그런 걸 수도 있어.”
그건 가능성이 있다.
“비올루윈과 슈트올의 상황을 좀 알아봐야겠군.”
그 두 곳 모두 나무의 봉인이 최근에 풀렸다. 피알루가 바람의 나무 때문에 곤혹을 치르고 있는 것이라면, 그 두 도시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나무 때문은 아니라고 봐.”
“그럼?”
지크는 저 멀리 보이는 피알루의 성벽을 쳐다봤다.
교대 시간대로라면 그 녀석은 아직 거기 있을 것이다.
‘그렌 제너드.’
지크의 눈이 싸늘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