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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400화 (400/628)

제400화

아이들이 급하게 뛰어간다. 서로를 쳐다보며 웃는 얼굴에 동경과 설렘이 가득하다.

아이 특유의 기운을 뽐내며 그들은 순식간에 행렬 안으로 사라졌다.

아이들뿐이 아니었다. 연인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자식들을 대동한 중년의 부부가 차례차례 행렬에 가담했다.

험상궂게 생긴 사내, 지팡이를 짚은 노인 등등 나이, 성별, 직종들을 불문하고 온갖 사람들이 대열을 만들어 같은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도시에서도 가장 큰 대로였다.

이미 대로에는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열기와 함께 뿜어지고 있었다.

환호의 대상은 대로 가운데를 천천히 내딛고 있는 일단의 무리.

이번에 도시를 구한 용사 지크 브레이브와 그 동료들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보기 위해 사람들은 이미 대로변에 운집한 군중들에 섞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 규모는 점점 더 커져갔다. 군중들 사이로 지크 브레이브의 일행은 천천히 행진했다. 간간이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고 사람들은 환성으로 화답한다.

바야흐로 영웅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동경과 선망의 시선을 잔뜩 머금은 사내. 낡고 더러운 옷과 비쩍 곯은 몸이 사내가 그다지 좋지 않은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하지만 얼굴만은 무척이나 수려해, 잘 먹여 살을 붙이고 얼굴을 깨끗하게 씻어낸다면 뭇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게 분명했다.

사내는 군중 안으로 파고들지는 못 했다. 그러기엔 사내의 근력이 너무 약했고 기운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든 영웅의 모습을 보기 위해 군중 위로 목을 내밀려 노력했다. 그에 몇 번 정도 용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빛나는 성검을 찬 그의 모습은 사내에게 엄청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그와 용사의 처지는 차원이 다르다. 많은 국가들에게 지원을 받으며 세계를 위해 싸우는 그와, 도시의 밑바닥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자신은 비교조차도 실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에 사랑받는 것 같은 용사의 모습을 보면서 사내는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용사가 될 수 있다면….’

콰앙!

그 순간 거대한 마력파가 들이닥쳤다.

사내의 신형이 가장 먼저 사라지고 군중이, 집이, 거리가, 지크 브레이브와 일행들마저 지워졌다. 거대한 검은 구멍이 지금껏 퍼레이드가 이어지고 있던 공간에 커다랗게 생겼다.

콰지직!

남아 있던 주변 풍경이 박살 난다. 깨진 유리 조각처럼 그것들은 산산이 파괴되어 검은 공간에 잡아먹혔다.

남은 건 검은색의 마검을 쥔 그렌 제너드뿐.

“아니야.”

그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낮게 뇌까렸다.

“이제 저건 내가 아냐. 이제는 내가 용사라고!”

토르니움에 거대한 마력이 공급된다. 검신에서 불길한 공명음을 흘렸다.

그렌은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검은 공간이 한 번 커다랗게 출렁이더니, 소리 없이 부서져 내렸다.

번뜩!

그렌이 눈을 떴다. 그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덮고 있던 이불이 거칠게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꿈.’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시간이다.

하지만 그렌은 다시 잠을 청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침대에서 내려와 탁자 위에 있던 주전자를 들었다. 옆에 컵이 있었지만 그는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들이켰다.

입에서 물이 반쯤 흘러나와 옷과 바닥을 적셨다. 비어버린 주전자를 탁자에 던지듯 내려놓고 침대에 앉았다.

‘진정해라, 그렌 제너드. 고작해야 개꿈일 뿐이야.’

지금과는 전혀 상관없는 아니, 이제는 기억에도 거의 지워진 일이다.

왜 이제 와 꿈으로 나타났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봤자 의미는 없다.

그러나 이성은 그렇게 말해도 본능적인 불쾌감은 어쩔 수 없었다. 너무도, 정말로 너무도 불쾌하다.

“우읍!”

구토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렌은 급히 입을 막았다. 고작해야 그 더러운 기억을 떠올렸다고 구토감을 느끼다니.

‘연약해! 연약하기 짝이 없어!’

그가 그리는 용사는 이런 게 아니다.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고 모든 면에서 완벽해야 한다. 이런 더럽고 약해빠진 건 용사가 아니다.

‘용사가… 아냐?’

순간 위기감이 들었다. 대체 왜 이제 와 그딴 꿈을 꾼 것일까.

‘내가 나에게 보내는 경고인가!’

이번 시간대는 확실히 이상하기 짝이 없다. 변수가 넘쳐흘러 자신보다 지크 모어가 오히려 용사 취급을 받는 상황.

망한 시간선이라 할지라도 언제나 용사로서의 지위는 어느 정도 유지했지만, 이번 시간선에서는 그를 용사라고 말해주는 이조차 별로 없었다.

‘그래! 내가 안일하게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고 있던 것에 대한 경고인 거야!’

이번 시간선은 거의 망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다음 회귀에 이용할 수 있는 정보를 얻는 걸 우선순위에 둔 채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게 잘못된 것이었다.

‘아무리 망한 시간선이라도 난 용사로서 불려야 해. 용사가 돼야 한다고!’

잃어버린 자신의 지위를 찾아야 했다. 그는 더 이상 먼발치에서 손가락만 빨며 동경의 대상을 바라보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지금부터라도 다시 시작한다!’

마침 근처에 알맞은 먹이도 있지 않은가. 그렌의 눈이 위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 * *

라일라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지크가 데네스트 산맥으로 떠난 지도 며칠. 그동안 내내 그렌 제너드에게 시달렸다.

통하지도 않을 느끼한 웃음을 지은 채 쓰잘데기 없는 대화를 하려 하는 남자는 최악이라는 걸 그녀는 여실히 느꼈다.

‘정보라도 제대로 얻었으면 좋았건만.’

그녀가 그렌과 어울려주는 건 그의 정보를 캐내기 위한 것. 하지만 썩어도 수많은 회귀를 반복한 작자라고 감탄해야 할까.

그는 은근슬쩍 라일라가 정보를 캐내기 위해 던진 질문을 능숙하게 회피했다. 때문에 그녀가 받는 스트레스는 더 상승했다.

‘거기에 며칠 전에 꾼 꿈까지.’

그것을 떠올린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파이넬의 기억으로밖에 보지 못한 클로원의 공주였던 시절의 그녀가 꿈에서 나온 것이다.

외모는 같았지만 그 행동과 사고방식, 무엇보다도 눈빛이 라일라와는 전혀 달랐다.

‘감정이란 게 없어 보였어.’

그런 자가 자신과 동일인물이었다니.

꿈에서 깬 후, 치솟는 구토감을 억누르느라 고생을 해야 했다.

‘그나마 그 이후에 그렌 제너드의 대화 빈도가 줄어서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렌 제너드의 안면에 불덩이를 날리지 않았을까.

어째서 말을 거는 빈도가 줄어들었는지는 모른다.

‘아마 내가 상대를 제대로 안 해줘서 그랬을지도 몰라.’

그렇게 추측을 할 뿐.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고생이 끝난 건 아니다.

빈도가 줄어들었을 뿐, 아예 없어진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 라일라 씨.”

복도에서 걸어가다 짜증나는 목소리가 들렸다. 당장에 구겨질 것 같은 얼굴을 필사적으로 핀다.

지금처럼 지크의 철판 같은 뻔뻔한 얼굴 가죽이 부러울 때가 없었다.

‘아니, 그렌 제너드가 상대라면 지크의 그 얼굴 가죽도 통하지 않을 거야.’

라일라는 새삼 그렌의 공포스러움에 치를 떨었다.

“안녕하세요, 제너드 씨.”

얼굴과 목소리를 최대한 평소처럼 만든 채 대답한다. 웃음기를 띄울 수는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그렌의 얼굴을 보며 그런 태도를 취할 자신도 없었다.

둘은 잠시 복도에서 얘기를 나눴다. 그러다 라일라가 슬쩍 운을 뗐다.

“요새 바빠 보이시는데, 뭔가 중요한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지금은 좀 잦아들긴 했지만, 아무래도 몬스터와 전쟁 중인 시기 아닙니까. 그래서 순찰 시간을 조금 더 늘렸습니다. 아무리 즐거운 시간이라도 사람들을 지키는 게 중요하니까요.”

판에 그린 듯한 ‘정의로운 말’이 들려왔다. 라일라는 왜 지크가 저런 정의 운운하는 말을 싫어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아니, 아니지. 지금 건 그렌 제너드가 위선적인 것을 알아서 그렇게 느낄 뿐이야. 내가 지크와 같은 생각을 하다니. 그럴 리 없잖아.’

지크를 사랑하는 건 사랑하는 거고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게 싫은 건 싫은 거다.

하지만 라일라의 생각을 그렌이 알 리가 없었다.

그는 지금껏 계속 그래왔던 것처럼 라일라에게 차를 마시자고 권했다. 라일라는 승낙했다.

장소는 언제나처럼 숙소에 있는 정원. 차 한 잔을 둔 채 담소를 나눈다.

하지만 담소를 나누는 그 누구도 이 자리에 즐거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정보를 빼내기 위해 공허한 말을 날릴 뿐이었다.

그러나 그렌은 이 상황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었다.

‘관심이 아예 없다면 이렇게 대화를 해주지도 않겠지.’

라일라의 의도를 전혀 알아채지 못한 채, 그는 그저 만족하고 있었다.

‘이렇게 조금씩 관심사를 알아가면 된다.’

이번 시간선에서 고작 하나를 얻게 된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 하나를 바탕으로 다음 시간선에선 두 개, 네 개, 여덟 개로 정보를 늘려 그녀의 성격, 취향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동료로서 들인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방법이었다.

이유는 하나. 될 때까지 하면 됐으니까. 그리고 그를 위해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처음엔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못 한 녀석들도 많았어.’

대표적인 것이 라라 브라우닝이다. 그녀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가.

초반에 그녀는 정말 이렇게 철저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렌을 거절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내 말을 듣고 그토록 자긍심 갖던 검을 버릴 정도가 됐지.’

하지만 그 생각을 떠올리자 오히려 기분이 나빠졌다. 변수가 많은 이번 시간선에 라라는 계속 검을 버리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라라 브라우닝 공략 계획이 완벽해진 이후로 이런 적은 없었던 것이다.

‘검을 버리지 않는 라라 브라우닝은 라라 브라우닝이 아니지.’

그래서 지금 그는 라라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끊고 있었다. 잘못된 것이야 다음 회귀 때 돌려놓으면 되는 것이다.

지금은 라일라에게 집중할 때다.

‘그래도 이 정도면 나름 괜찮은 상태 아닌가?’

미소를 보여주진 않지만 다과의 초대에는 꼬박꼬박 나와주고 있었다. 이 정도면 자신에게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게 분명하다.

지크의 것을 또 빼앗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가 속으로 검은 미소를 지을 때였다.

“어라? 여기 있었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렌이 고개를 돌리자 정원 입구에 지크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벌써 돌아왔나.’

그렌은 절로 찌푸려지는 얼굴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하지만 구도가 나쁘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고생하고 있는 판국에 동료는 나와 차를 마시고 있는 중인 거니까.’

게다가 라일라가 자신에게 어느 정도 마음을 열었다는 자신감도 그를 더욱 북돋게 했다.

그렌은 라일라를 돌아봤다.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지크!”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던 그녀의 미소가 환하게 빛났다. 인간 같지 않은 그녀의 미가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회귀를 하며 온갖 경험을 쌓아온 그렌조차 한순간 말을 잃어버릴 정도의 광경.

라일라가 벌떡 일어나 지크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간다. 그렌은 멍청하게 그녀의 뒷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이 엉클어져 제대로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단 하나의 느낌만큼은 확실했다.

자신이 멍청한 광대가 된 것 같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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