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9화
지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회귀의 힘을 부리는 자는 그렌 제너드다. 당연히 그렌 제너드가 브뤼셀 시스템을 재가동시켰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부정적이다. 하지만 지크는 바로 납득했다.
지크도 그렌의 뒤에 또 다른 흑막이 있지 않을까 꾸준히 생각을 해 온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확답을 내리지 못했던 추측이기도 했다.
“설마 그 브뤼셀 시스템을 재가동시켰다는 녀석이 모든 일의 흑막인 거냐?”
“그래.”
“그럼 그놈이 그렌 제너드를 이용하고 있는 거겠군.”
지크 브레이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각한 얼굴의 지크. 하지만 그건 오래 가지 않았다.
“뭐, 그렇다 해도 그렌 제너드를 엿 먹인다는 방침은 바꾸지 않을 테지만.”
그저 엿 먹일 놈이 하나 더 늘어난 것에 불과하다.
“…새삼 생각하지만 너 참 성격 끝내주는구나.”
“내가 보기엔 네 그 병신 같은 정의감이 더 끝내주는 성격이야.”
지크 브레이브를 향해 하는 야유는 전혀 아끼지 않는 지크였다.
“하지만 그렌 제너드를 이용하는 게 가능한 거냐? 그놈은 회귀의 힘을 가지고 있잖아.”
그게 지크가 흑막의 존재를 확신할 수 없었던 이유다.
“아무리 그놈을 이용하려고 해도 회귀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언젠가 눈치챌 가능성이 높을 텐데. 아니, 무엇보다 브뤼셀 시스템을 가동시킨 게 그 흑막이라면서 회귀 능력은 왜 그렌 제너드가 가지고 있는 거냐?”
“흑막이 그렌 제너드에게 건네줬으니까.”
지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흑막이란 자가 브뤼셀 시스템을 재가동시켰다고 했으니, 회귀 능력을 타인에게 건네줄 수 있단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납득이 되는 건 아니다.
“…회귀 능력을 타인에게 넘겼다고? 설마 다음 대 황제에게 능력을 넘겼던 클로원의 황제들처럼 그도 능력을 넘기고 죽었나?”
“팔팔이 살아 있어.”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군.”
회귀 능력을 안 썼으면 안 썼지 누군가에게 넘긴다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이미 너무 많이 사용해서 공포 때문에 힘의 사용을 포기했을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그러나 그게 회귀 능력을 포기할 이유는 되어도 다른 사람에게 넘길 이유는 되지 못한다. 회귀 능력을 지닌 사람이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알고 그 힘을 넘긴단 말인가. 그가 저지른 악행에 자신이 휘말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크 브레이브가 그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건 브뤼셀 시스템이 재가동되기 이전의 일을 알아야 해. 네가 나일 때, 라일라가 아직 클로원의 공주로서 부활했을 때의 일 말이야. 클로원이 망한 후 아직 회귀 능력이 단 한 번도 사용되기 이전, 첫 번째 시간선의 이야기지.”
지크는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지크 브레이브가 말한 ‘네가 나일 때’라는 말이 마음에 안 든 것이다. 그러나 지크 브레이브의 말을 막진 않았다.
“첫 번째 때 라일라가 마왕이었던 알지?”
“알지. 그것 때문에 라일라가 상당히 괴로워했었으니까.”
“…솔직히 그 끔찍했던 마왕이 그렇게 변할 줄은 몰랐어. 게다가 설마 날 좋다고 할 줄은….”
“은근슬쩍 너와 나를 동일시하지 마라.”
“너무 그러지 마. 아무리 싫어해도 너와 나는 동일인물이라고.”
“역시 당장 대가리를 깨야….”
“알았어, 알았어.”
윈두르를 쥐어 잡는 지크를 지크 브레이브가 말렸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변한 게 믿기지 않는 건 사실이야. 그녀에게 상당히 고생했었거든. 아무리 그녀가 변한 걸 받아들인다고 해도 나는 너처럼 친근하게 다니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아.”
“내가 네놈이 아닌 것처럼 그 녀석도 지금은 클로원의 공주가 아니야. 라일라일 뿐이지. 나름 귀염성도 있고 능력도 좋고 미인에 성격도 좋아. 싫어할 이유가 어디 있냐. 오히려 네가 편견에 매몰되어서 녀석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고 있는 거야.”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알면서도 자신이 없어.”
정말로 클로원의 공주였던 시절의 라일라에게 온갖 고생을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크는 그런 지크 브레이브의 고생을 이해해 줄 생각이 없었다.
“근성 없는 놈.”
“만약 그렌 제너드가 개심했고, 또 다른 네가 그렌 제너드와 친구를 하라 그러면 어떻게 하겠어?”
“대가리를 깨버려야지.”
“…….”
너무도 뻔뻔한 말에 지크 브레이브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 대가리를 깬다는 말, 무척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그저 간신히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빨리 설명이나 계속 해.”
지크의 채근에 지크 브레이브는 다시 설명을 이어 갔다.
“첫 번째 시간선에서 모든 일은 라일라가 깨어나며 시작됐어. 너도 알다시피 당시 라일라는 클로원의 공주로서 클로원의 부활을 꾀했지. 그리고 방해가 되는 걸 모조리 박살내며 움직였어. 그때의 피해는 말도 못 할 정도야. 괜히 사람들이 그녀를 마왕이라고 부르며 공포스러워한 게 아니지.”
지크가 자신의 재능과 엇비슷한 재능을 가졌다고 판단한 자가 바로 라일라다. 그녀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터다.
게다가 그녀가 동원한 건 그녀 스스로의 힘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남아 있던 온갖 클로원의 유산들을 이용했어. 그녀가 이끌고 다녔던 온갖 몬스터들의 군단이 그 힘 중 하나였지. 게다가 그녀는 세계수를 다루는데도 뛰어났어. 물론 브뤼셀 시스템을 유지해야 했던 터라 나무들의 모든 힘을 동원하진 못했지만, 일부의 힘만으로도 세계에 힘을 과시하는 데는 충분하다 못해 넘쳤지. 그리고 그녀를 따르는, 특이한 힘을 다루는 자들도 있었고.”
바로 생각나는 존재가 있었다.
“마인들.”
로브들이 마인을 만들려 할 때 특이한 힘을 부여하려 했었던 게 기억났다.
“그러니까 당시 라일라가 이끌던 군세는 몬스터와 마인들이고, 라일라 자신은 압도적인 재능에 더불어서 세계수의 마력까지 동원했다는 얘기지?”
“완전히 같은 건 아니지만, 비슷하다고 보면 돼.”
“…너도 엄청난 싸움을 했었군.”
물론 당시 라일라가 마인 시대에 있던 모든 마인들을 이끌던 건 아닐 것이다. 마인 시대의 마인들 중엔 클로원의 유산을 받지 않고도 마인이 된 이들도 꽤 많았다.
힘의 마왕이었던 지크나 마도의 마왕이었던 윌위스 드웨인도 그러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걸 생각하더라도 충분히 강한 전력이다.
‘아무리 못 해도 내 전부하들의 능력이었던 뱀파이어, 서큐버스, 웨어울프는 저쪽에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마인 시대에는 타락하여 세계를 혼란케 만들던 자들이 지크 브레이브의 힘이 되어준 경우도 있었을 테고 전 세계가 합심하여 대항했을 테니 지크 브레이브에게 완전히 불리한 것만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크 브레이브가 엄청난 싸움을 했다는 것도 분명했다.
“너한테 감탄을 받을 줄은 몰랐어.”
“난 인정할 건 인정해.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우는 사람이 아니니까.”
“…이건 내가 지적을 하면 지는 거지? 그렇지?”
지크는 설명이나 빨리 더 하라며 손짓을 했다. 지크 브레이브는 납득할 수 없다는 듯 투덜댔지만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그녀와의 싸움은 정말로 피말렸어. 하지만 결국 우리는 그녀를 이겼지.”
지크 브레이브의 얼굴에 살짝 자긍심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건 잠시 동안의 일이었다.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던 모든 일이 어그러진 건 그때였어.”
“흑막이 뒤통수를 쳤나 보군.”
“그래.”
“그 흑막이 누구냐.”
“그건….”
순간 지크 브레이브의 모습이 흔들렸다. 마치 물에 비친 그림자가 물결에 이지러지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지크 브레이브의 당혹스러운 얼굴이 그걸 증명했다.
그가 입을 연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간간이 한 글자씩 끊겨 들릴 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어이, 무슨 일이야!”
지크가 외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상황은 점점 악화됐다. 지크 브레이브의 목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고 모습이 점점 흐려져 갔다.
그 와중에 그가 윈두르를 가리켰다. 그의 모습이 다급해 보인다.
“이 녀석을 따라가라고?”
지크 브레이브의 입 모양을 보고 지크가 말했다.
뜻이 통한 모양이다. 지크 브레이브가 조금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지크는 달랐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가 지크 브레이브의 몸에 손을 댔다.
손이 그대로 통과한다. 지크 브레이브의 몸이 마력으로 서서히 분해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곧 사라지는 걸 알게 된 지크가 분통을 터뜨렸다.
“이 자식아, 갑자기 이렇게 사라지는 게 어디 있어!”
지크 브레이브의 표정이 미안함에 물들었다. 그러나 뒤이은 지크의 말에 그의 얼굴에는 미안함 대신 당혹감이 자리잡았다.
“이야기 끝나고 대가리 깨게 해준다며!”
그 외침은 정말로 비통했다. 그렇게까지 감정적으로 나올 만한 일이던가.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지크 브레이브가 사라졌다.
그러나 지크 브레이브의 생각 따위 지크는 알 바 아니었다.
“이 빌어먹을 자식! 약속을 이따위로 어기다니!”
지크가 씩씩대며 지크 브레이브가 사라진 곳에서 방방 뛴다. 그러나 그런다고 마력으로 변해 허공으로 흩어진 지크 브레이브가 다시 돌아올 리 없었다.
결국은 지크도 분을 내는 걸 멈췄다. 그러나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이 녀석을 따라가라고 했지. 그렇다면 이 녀석이 안내해 준 곳에서 또다시 지크 브레이브를 만날 수도 있을지 모르지.’
이미 그를 한 번 만나봤다. 두 번은 불가능하다고 누가 정했는가.
‘만약 또다시 만난다면, 다음에 반드시 깨버린다.’
지크는 윈두르의 손잡이를 꽉 쥐며 맹세했다.
* * *
딱!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닿는 것만으로도 얼어붙을 것 같은 싸늘한 시선이 눈앞에 있는 어떠한 기계를 훑는다.
딱!
다시 한번 소리가 인다. 자세히 살피니 손가락이 어떤 기계장치 위를 두드리는 소리였다.
두드리는 자는 어떤 남성이었다. 눈썹이 잔뜩 찌푸려진 걸 보니 기분이 무척 좋지 않아 보였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부하인 듯 옆에서 공손히 대기하고 있던 자가 물었다.
“무언가가 잘못됐어.”
“시스템이 말입니까?”
“그래.”
부하의 얼굴도 심각해졌다. 시스템은 그들 조직의 근간. 시스템의 이상은 그들 조직의 이상을 가리킨다.
남성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가자.”
“어디로 모실까요?”
“그렌 제너드에게 가야겠다.”
부하가 살짝 눈을 찌푸렸다. 그는 그렌 제너드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위선적인 면모도 면모이거니와, 그들의 주인을 마치 부하 부리듯 부리는 태도에는 부아가 치민다.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는 천치가!’
하지만 그들 주인의 명령이다. 부하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준비하겠습니다.”
부하가 사라진 후, 그는 부하와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그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를 눈 안에 뒀다. 이글거리는 마그마에 둘러싸인 거대한 나무.
‘반드시 원인을 밝혀내야 해.’
그, 예전 비올루윈에서 지크 일행의 동상을 마차 안에서 관찰하던 남성은 진중한 눈을 한 채 눈앞에 있는 세계수의 본체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 * *
그렌은 요 며칠 라일라에게 계속 공을 들였다. 친절한 얼굴로 말을 건네며 그녀의 호감을 사도록 노력했다.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그는 제법 라일라와 말을 틀 수 있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그가 알기를 원하는, 그녀의 과거에 대한 정보는 일절 얻을 수 없었다.
과거를 알아야 시간을 되돌렸을 때 수작을 부릴 수 있다. 때문에 쉽게 입을 열지 않는 라일라의 태도에 그는 짜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절대 그 짜증을 표현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의를 불태웠다.
‘반드시 나만 바라보게 해주겠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무한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그의 여유를 송두리째 뽑아가는 일이 생겼다.
‘…이건 꿈이다.’
그렌은 몇 번이나 자신을 타일렀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있는 광경은 그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과거의 모습이었으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