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7화
“자유라….”
개인적으로 지크에게는 무척이나 공감가는 이유다.
자신을 속박하는 모든 것을 집어 던지고 힘을 얻겠다는 이유로 세상을 제멋대로 뒤집어엎었던 지크가 아니던가.
물론 지크의 그건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었지만.
“자세히 설명해 봐.”
“그 이야기는 브뤼셀 시스템이 만들어졌을 때까지 올라가야 해. 클로원 제국이 어마어마한 국가인 건 알고 있지?”
“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브뤼셀 시스템 하나만으로도 그 어떤 나라의 위업도 따라오지 못한다.
거기에 로브를 쓴 놈들이 마인들에게 뿌린 온갖 능력도 클로원의 유산일 가능성이 높지 않던가.
“그 뿌리는 네가 아는 대로 브뤼셀 시스템이야. 하지만 아무리 제국의 마법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시간을 되감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 제국의 마법력이 최고조로 발달한 건 브뤼셀 시스템을 이용해 국력을 극도로 성장시킨 이후이기도 하고. 즉, 제국의 모든 것은 세계수로부터 시작된 거야.”
이미 나무들이 회귀의 근간이라고 예상을 하고 있었기에 지크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황금 황제는 알고 있지?”
“클로원의 초대 황제잖아. 브뤼셀 시스템을 만들기도 한.”
“그래. 제국을 개국한 인물인 사람이지만, 그 전에도 상당히 지위가 높은 가문의 사람이었던 모양이야. 무엇보다 대단한 천재이기도 했다고 해.”
그 라일라의 아버지다. 천재라는 게 이상한 건 아니다. 오히려 지크가 어색함을 느꼈던 건 다른 쪽이었다.
“정확히 아는 게 아닌가? 지금 한 말은 어디까지나 어디선가 들은 말을 설명해준다는 투잖아.”
“나도 모든 걸 아는 건 아냐. 내가 갖고 있는 지식은 어디까지나 브뤼셀 시스템에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의 기억을 모은 것에 불과하거든. 거기에 세계수의 의지가 끼어든 거지.”
“클로원과 브뤼셀 시스템의 근원을 아는 놈이 있다고? 그렌 제너드인가?”
“아니, 이건 음, 라일라의 기억이야.”
라일라라는 이름이 어색한 듯 지크 브레이브는 약간 말을 더듬었다.
“라일라가 떠올리지 못하는 기억 중 하나인 모양이군.”
“그것도 아니야. 이 기억은 원래 라일라의 원래 인격인 마왕의 기억이거든. 그 기억은 깨끗이 지워진 상태야. 정확히는 브뤼셀 시스템이 한 번 초기화되면서 그 전까지의 기억이 완전히 날아간 거지.”
“그건 반가운 소식이네. 녀석이 다시 마왕이 될 일은 없을 테니까.”
사람의 인격이란 것은 원래 타고난 성품과 더불어 그 사람이 겪어 온 경험에 바탕을 둔다. 기억이 사라졌다는 것은 그 경험이란 것이 완전히 날아갔다는 뜻.
‘라일라에게 알려주면 기뻐하겠어.’
알게 모르게 라일라가 신경을 쓰던 걸 알고 있다. 분명 그녀는 기뻐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확인해야 할 게 하나 있었다.
“라일라의 기억에서 지워졌다면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라일라의 기억을 기억하고 있던 녀석이 있었으니까. 너도 만나봤지?”
바로 떠오르는 존재 하나가 있다.
“파이넬.”
“맞아. 그녀의 기억이야.”
지크 브레이브의 목소리는 다소 씁쓸했다. 정의에 환장한 녀석이니, 아마도 그녀의 처지에 동정을 가졌을 것이다.
“라일라에게 보여준 기억 말고도 그녀는 다른 기억들을 꽤 많이 가지고 있었거든. 그녀는 죽었지만, 다행히 그 전에 기억을 보관할 수 있었어. 뭐, 라일라처럼 기억 저장을 전문적으로 하는 코어가 없는 터라 그 기억을 오래 보관할 순 없지만 단시간 담아두는 건 가능하거든.”
즉, 라일라의 초기화된 기억을 파이넬이 기억하고 있었고, 세계수는 그 기억을 이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지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어쨌든 그 황금 황제는 젊었을 적 세계수를 발견했다고 해. 엄청난 발견이었지. 말 그대로 거의 무한한 마력을 품고 있는 존재였으니까. 그때부터 황금 황제는 자신의 모든 걸 투자해서 세계수를 조사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그 마력을 이용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지. 그 천재적인 두뇌와 가문의 부를 바탕으로 연구는 굉장히 순조롭게 진행된 모양이야. 그리고 꽤 여러 가지 세계수를 활용할 방안을 구상했지.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황금 황제는 어느 한 연구에 집착하기 시작했어.”
“오래 살고 싶었겠지. 뻔한 이야기야.”
불로불사는 이 세상 모든 권력자의 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 하루를 더 살기 위해서 권력자들은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세계수라는 꿈과도 같은 존재를 얻은 자라면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네 말처럼 그는 자신의 생명을 늘리는 작업을 했어. 물론 세계수의 마력을 이용한 터라 그건 쉬웠던 모양이야. 하지만 황금 황제는 그걸로 만족하지 못했어. 세계수를 깊이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그 힘에 빠져들었고, 더욱 더 커다란 힘을 얻길 원했지.”
지크 브레이브는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조금 불쾌한 투였다.
하지만 지크는 달랐다. 그도 힘을 얻기 위해 세계를 뒤집어엎은 경험이 있다. 그는 지크 브레이브보다 황금 황제 쪽에 가까운 자였다.
“결국 황금 황제는 세계수를 이용해 하나의 커다란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지.”
“그게 브뤼셀 시스템이군.”
지크 브레이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세계수를 더욱 잘 다루기 위해서 세계수에서 네 개의 힘을 떼어냈어. 아무래도 세계수의 마력은 너무도 강해 다루기가 버거웠거든. 그렇게 만들어진 게 네가 본 네 그루의 나무들이야. 그리고 본체의 가지 하나를 꺾어 시스템의 열쇠로 사용하기 위한 검을 하나 벼렸어.”
지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애검으로 향했다.
지크 브레이브는 그런 지크의 생각을 긍정했다.
“맞아, 그게 윈두르야.”
지크는 윈두르를 뽑아 그 검신을 살폈다. 여전히 기괴하게 생긴 검이다. 하지만 이제 그 생김새가 이해가 갔다.
‘나뭇가지같이 생긴 게, 진짜 나뭇가지였었기 때문이군.’
“윈두르는 나중에 황제의 상징으로서 여겨지게 돼. 그에 따라 제국의 온갖 중요 건물들은 모두 윈두르로 열 수 있게 설계가 되지. 황제에게는 그 무엇도 숨기지 않는다는 충성의 표시로서 말이야.”
왜 윈두르가 그 많은 클로원 유적을 열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황금 황제는 세계수의 본체와 네 개의 분신들을 연동시킨 후, 시스템을 만들어 시간을 되돌리려 했지.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그건 성공했어.”
그건 말 그대로 황금 황제에게 무한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거칠 것이 없어졌지. 실패 따위 전혀 두려워할 요소가 되지 않았어. 불리한 점이 있다면 시간을 돌리면 그만이니까. 그는 자신의 나라를 세우고 그걸 제국으로 불렸지. 그리고 브뤼셀 시스템도 점점 발전시켜 나갔어. 자신의 자식들 중 가장 뛰어났던 딸을 시스템의 일부로 했던 것도 그 일환이었고.”
라일라의 이야기다.
“에스텔레이드와 토르니움이 태어난 것도 그때야. 윈두르와 에스텔레이드, 토르니움에 입력된 지식은 코어인 라일라의 기억 속에 차곡차곡 쌓이게 됐지. 보통 윈두르는 황제가, 에스텔레이드는 황태자가, 토르니움은 제국의 가장 위대한 장군이 가졌어. 하지만 경우에 따라 잠시 소유자가 바뀔 때도 있었지. 더 중요한 정보를 얻게 될 거라고 생각될 때 말이야. 윈두르는 반드시 황제가 가지고 있었지만.”
황제의 증표이니,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대로 이 세상은 오로지 황금 황제를 위한 정원이 될 것만 같았어.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황금 황제는 결국 죽었지. 이상하지? 그렇게 막대한 능력을 가진 자가 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을까. 아무리 수명의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계속 시간을 돌리면 되는데 말이야.”
지크는 어깨를 으쓱이며 농담조로 말했다.
“삶이 지루했나 보지. 아니면 뭔가 깨달음을 얻었거나.”
“그건 아냐.”
“그게 아니라면 남은 건 하나뿐이군.”
지크는 고개를 돌려 바람의 나무를 쳐다보며 말했다.
“브뤼셀 시스템에 한계가 있는 거겠지.”
“정확해. 이 세상을 자신의 장난감 삼아 마음대로 날뛰던 황금 황제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는 어떤 심각한 상황을 느끼게 됐어. 시간을 돌리면 돌릴수록 자신의 머리가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한 거야. 정확히 말하면 오직 단 하나의 생각에 매몰되기 시작한 거지. 자신의 가장 큰 소망에 말이야.”
“소망이라. 황금 황제의 소망은 뭐였는데?”
“불사.”
지크는 시큰둥해했다.
“원래 그가 원하던 것 아닌가? 그리고 이룰 수 있는 수단도 갖고 있잖아. 그 소망이 조금 더 커지는 게 뭐가 문제지?”
“소망의 성취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한 수단에 불과해. 하지만 회귀의 반복으로 인한 부작용은 그 수단을 목적으로 만들어버린다더군. 그것도 무척이나 비틀리고 편협하게 말이야.”
“단순히 노망드는 것 아냐? 한두 살 처먹은 게 아닐 거 아냐.”
지크 브레이브는 피식 웃었다.
“일리 있는 말이지만 그것과는 확실히 다르다고 해. 자신이 자신이 아니게 되고, 오로지 목적 하나만을 위해 움직이는 인형이 되는 기분이라고 했어. 간단히 말해 미쳐버리는 거지. 그 세계를 넘어 시간마저 오시하게 된 황금 황제가 공포를 느낄 만큼.”
“그래서 회귀를 그만뒀군.”
“그래. 그게 시스템의 한계인지 인간의 한계인지는 몰라. 하지만 결국 황금 황제는 그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죽음을 받아들였어.”
“브뤼셀 시스템은 다음 대로 넘어갔겠고 말이야.”
“그리고 그건 제국의 발전으로 이어졌지. 하지만 회귀에 의한 공포는 다음 대 황제에게도 나타났어. 그리고 얼마 안 돼 그 황제도 죽음을 받아들였지.”
“즉, 클로원 황제의 재위 기간은 브뤼셀 시스템을 받아들인 후, 그 공포를 느낄 때까지로군.”
“맞아. 그 기간은 사람마다 다른 모양이고.”
지크는 설명을 계속하라 눈짓했다.
“그렇게 제국은 계속 번성해 나갔어. 지식을 저장하고 회귀를 하여 기회를 다시 잡는다. 심플하게 들리지만 정말 사기적인 방법이지. 아마 이상이 없었다면 클로원은 영원히 군림하는 제국이 됐을 거야.”
“하지만 결국 클로원은 망했잖아.”
“변수가 생긴 거지.”
지크 브레이브의 눈이 살짝 가라앉았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일정 횟수의 회귀를 경험한 사람은 자신의 정신이 비틀리는 걸 느끼고 공포에 빠져서 회귀의 힘을 쓰지 않게 돼. 직접 느끼진 못했지만 정말 엄청난 공포일 거야. 한두 사람도 아니고, 세상의 모든 걸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 클로원의 황제 전원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공포니까. 하지만 클로원의 황가에 태어나버리고 만 거야. 그 공포조차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욕망에 빠져버린 사람이.”
“클로원의 마지막 황제겠군.”
지크 브레이브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처음엔 다른 황제들과 마찬가지였어. 제멋대로 하는 면도 있었지만 그건 클로원의 황제들이 모두 그랬던 일이야.”
자신이 한 일을 없었던 일로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인간이 그 힘을 남용하지 않는 건, 정말로 웬만한 성인이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그도 제국을 발전시키려 할 때는 발전시켰어. 하지만 점점 회귀의 끝이 다가왔지. 그의 재위기간이 끝날 때가 온 거야. 하지만 그는 공포에 질렸으면서도 끝끝내 계속 회귀를 시도했어.”
“그리고 미쳐버렸겠군.”
“마지막 황제의 소망은 군림이었어. 그래서 철저하게 폭군으로 변했지. 그건 정말로 지옥 같은 상황이었다고 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고 고문당했지. 그러자 아무리 유구한 세월을 버텨온 제국이라도 점점 불만을 가진 사람이 늘어났어. 그 상황에 일어날 사건은 쉽게 생각나지?”
지크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반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