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396화 (396/628)

제396화

“웬만하면 네 요구 조건은 전부 들어주고 싶긴 한데, 그것만은 안 돼. 머리가 깨지면 대화를 할 수가 없잖아.”

“노력해!”

“억지 부리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

콰앙!

두 검의 사이에서 마력이 폭발하며 충격파를 만든다. 지크와 지크 브레이브 둘 다 뒤로 물러났다. 지크는 지면에 발이 닿는 즉시 다시 지크 브레이브에게 뛰어들었다.

다시 한번 검이 충돌했다. 몇 번이나 검과 검이 마주치며 공방을 이어나간다. 지크의 마력은 바람의 나무 덕에 완벽하게 해방된 상태. 그 파괴력은 얼마 전의 지크의 공격들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건 지크 브레이브도 마찬가지였다. 지크와 똑같은 마력을 보유한 그는 에스텔레이드를 수려하게 움직이며 지크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때마다 번뜩이는 에스텔레이드의 빛이 허공을 수놓았다.

콰앙!

다시 한번 검이 부딪친다. 만약 주변에 사람이 있었다면 마력이 충돌하는 여파와 두 사람이 쏘아댄 검기 때문에 몇 초 견디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을 것이다. 그 정도로 둘의 싸움은 살벌했다.

번쩍!

다시 한번 에스텔레이드의 빛이 번쩍인다. 지크는 인상을 쓰며 물러났다.

‘에스텔레이드를 정말 인상 깊게 쓰는데.’

에스텔레이드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역시 빛이다. 보통 한스는 저 빛을 쏘아내거나 검신에 감아 위력을 높이는 데 사용했다.

하지만 지크 브레이브는 그것에 더해 ‘눈부심’이라는 특징도 기술로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한스도 종종 사용하는 것이지만, 지크 브레이브는 차원이 달랐다.

정말로 교묘하게 타이밍을 맞춰 지크의 시야를 몇 번이고 차단했다. 전투 중에 오감, 특히 시야가 차단당하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

‘역시 ‘나’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작게 감탄하는 것도 잠시. 스스로 지크 브레이브를 ‘나’라고 생각했다는 것에 화가 나 지크는 무차별적으로 검기를 뿌려댔다.

“혹시 방금 어처구니없는 원한을 품지 않았어?”

“닥쳐!”

지크는 지크 브레이브의 항의를 무참하게 짓밟았다.

공방은 계속됐다. 아무래도 동일인에, 둘 다 경험도 기술도 신체도 극한까지 단련된 만큼 쉽사리 승패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지크가 우위를 잡기 시작했다.

원인은 무기 차이였다.

콰아앙!

에스텔레이드의 빛을 윈두르가 무참하게 깨트린다. 빛이라는 특성을 이용해 지크를 괴롭히던 에스텔레이드였지만, 아무래도 무기의 강도나 마력 증폭 등, 빛이라는 특성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윈두르는 에스텔레이드보다 위였다.

둘도 그걸 알았다. 지크는 기세등등해했고 지크 브레이브는 인상을 썼다.

콰앙!

다시 한번 공격이 충돌한다. 이번엔 확연하게 지크 브레이브가 밀렸다. 지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쫓아 들어갔다. 지크 브레이브도 이대로 계속 우위를 내줄 생각이 없는지 강렬한 빛을 쏘아내며 응수했다.

“이봐! 우리 이럴 때가 아니야! 정말로 중요한 얘기가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공격을 멈…!”

“네놈 대가리를 깨는 게 우선이라니까!”

“그러니까 대가리가 깨지면 말을 못 하잖아!”

지크 브레이브가 째지듯 목소리를 높였지만 지크는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아니, 내 대가리를 깨 봐야 의미 없어! 너도 알고 있잖아! 지금의 내가 진짜 지크 브레이브가 아니라는걸! 그런 내 대가리를 깨 봤자 너도 그다지 기분 좋지 않….”

“그게 진짜든 꿈이든 아니면 전혀 다른 무언가든, 일단 지크 브레이브라면 우선 대가리부터 깬다! 태초부터 정해진 법칙이야!”

“그딴 법칙이 어딨어!”

지크 브레이브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면서도 목을 자르러 날아오는 윈두르를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한 후 지크를 향해 에스텔레이드를 휘둘렀다. 지크는 혀를 차며 에스텔레이드를 막았다.

“좋아! 그럼 얘기 끝나고 대가리 깨게 해줄게!”

윈두르에서 나던 파공음이 멈췄다. 지크 브레이브는 겨우 한숨을 쉬고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얘기 끝나고?”

“그래. 어차피 너도 내 얘기는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잖냐. 나를 싫어하는 감정이 그것보다 더 커서 눈을 돌리고 있을 뿐이지.”

“눈을 돌리는 게 아냐. 그저 그에 따른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네 대가리를 깨려는 것뿐이다.”

“…절대 자랑스럽게 말할 일이 아니잖냐.”

지크 브레이브는 한숨을 쉬고는 자세를 풀었다. 다행히 그 빈틈을 노리고 지크가 공격해오진 않았다.

“일단 먼저 묻자. 넌 나를 얼마나 싫어하는 거야?”

“그렌 제너드보다 위.”

“정말로 너무하네.”

지크는 윈두르를 어깨에 대고 삐딱하게 지크 브레이브를 쳐다봤다.

“어디 그 말이란 걸 해봐.”

“허튼 말을 하면 당장에 목을 날릴 분위기인걸.”

“잘 아네.”

계속되는 지크의 냉대에 지크 브레이브도 살짝 열이 오른 모양이었다.

“진심으로 맞붙는다면 절대 쉽지 않을걸.”

하지만 지크는 지크 브레이브의 말을 일축했다.

“내가 너보다 강한 건 방금 전의 전투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됐어.”

“실력이 아니라 무기 차이 때문이잖아.”

“좋은 무기를 얻는 것 또한 실력이지. 에스텔레이드를 휘둘렀던 놈이 할 말도 아니고.”

윈두르에 비견될 바는 아니지만 에스텔레이드 또한 지크가 알고 있는 무기들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녀석이었다.

“무기 바꿔서 한 번 더 해!”

“미쳤냐?”

윈두르를 줄 생각은 없지만 에스텔레이드를 들 생각은 더더욱 없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그 할 말이라는 걸 빨리 말해 봐.”

“후후, 아무리 험한 말을 내뱉었어도 결국 너도 궁금증을 참지 못했구나.”

“아니, 빨리 듣고 네놈 대가리 깨게.”

“…….”

지크 브레이브의 얼굴에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 떠올랐지만 지크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결국 지크 브레이브는 포기한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알았어. 어차피 내 목적도 대화를 하는 것이니까.”

지크 브레이브는 에스텔레이드를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진지하게 지크를 바라봤다.

“처음… 보는 건 아니지. 꿈에서 몇 번 봤으니까. 그래도 다시 자기소개를 할게. 내 이름은 지크 브레이브.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최초 시간선의 너야.”

지크가 불쾌하게 코웃음을 쳤지만 그뿐, 지크 브레이브의 말을 부정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연히 지크 브레이브 본인은 아니야. 애초에 그게 스틸월이든 브레이브든 모어든, 결국 지크란 존재는 하나뿐이니까. 나는 세계수의 마력과 저장된 기억들을 통해 만들어진 일종의 사념체지.”

세계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단어가 나왔지만 지크는 당장 캐묻지는 않았다.

“내가 네 앞에 나타난 이유는 하나야. 지금 네가 궁금해할 것들을 가르쳐 주고, 너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기 위해서.”

지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장이라도 ‘싫다!’라고 하고 싶은 걸 필사적으로 참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지크 브레이브도 그 표정을 읽은 모양이다.

“정말로 나를 싫어하는구나.”

“당연하지.”

지크는 즉답했다.

“사념체라면 왜 하필 그딴 모습으로 나타난 거야. 굳이 지크 브레이브일 필요가 없잖아.”

“너를 통해서 투영되고 있는 거니까 아무래도 네 모습이 될 수밖에. 그리고 과거에 존재했던 많은 지크들 중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내가 가장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어.”

“네가?”

“내가.”

저 자신만만한 얼굴에 당장 윈두르를 처박고 싶었지만 지크는 초인적인 인내로 그걸 참아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뭐, 내가 지금 지크 브레이브의 모습과 의식, 행동을 하고 있긴 하지만, 정확히는 지금 내 의지는 세계수의 의지야.”

또 나왔다. 아무래도 세계수란 단어가 이번 일에 상당히 깊숙하게 관여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세계수란 게 뭔지 알겠어?”

“대충 저런 녀석들 말하는 거 아니냐?”

지크가 자신의 뒤에 있는 바람의 나무를 가리켰다.

“맞아. 정확히 말하자면 저것들은 세계수의 분신이지.”

“…분신?”

지크는 고개를 돌려 바람의 나무를 쳐다봤다. 여전히 공중에 뜬 채 주변에 바람을 두르고 있는 나무. 거기서 흘러나오는 마력은 여전히 대단했다. 괜히 회귀의 근원이 저 나무들이라고 생각한 게 아니다.

한데, 저런 나무가 단순한 분신이라니.

“우리는 저런 나무가 총 다섯 그루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다섯 나무가 모두 분신이냐?”

지크 브레이브는 고개를 저었다.

“세계수의 분신은 네가 본 네 그루가 전부야. 하지만 나무가 다섯 그루가 있다는 게 틀린 것도 아니지.”

지크는 바로 눈치챘다.

“나머지 한 그루가 본체군.”

“맞아.”

지크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분신들이 저런데 본체는 과연 얼마나 대단한 마력을 내포하고 있을까.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회귀 시스템의 근원은 그 세계수란 힘을 근간으로 써먹는 거냐?”

“그렇지.”

“그렇다면 회귀 시스템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겠군.”

자신이 행한 일이 전부 쓸데없었다는 사실은, 천하의 지크조차 가벼운 탈력감에 젖어들게 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너무 이른 생각이었다.

“아니, 회귀 시스템은 작동을 멈췄어. 축하해, 지크. 너희의 생각은 옳았어.”

“…그럼 그렌 제너드가 더 이상 회귀할 일은….”

“없어.”

지크는 웃었다. 정말로 기분 좋다는 듯이, 공동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큰 소리로.

드디어 그 망할 놈의 뒤통수를 후려 갈겼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차근차근 해나가던 지크였지만, 내심 일말의 불안을 없앨 수는 없었다. 그가 그 어떤 대단한 일을 해낸다고 해도 그렌이 시간을 돌려버린다면 그 모든 것은 없었던 일이 될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렌 제너드는 그 힘을 잃어버렸다.

“이젠 마음 놓고 놈을 엿 먹일 수 있겠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그거야?”

“그럼 이보다 더 무슨 생각을 해야 하지?”

지크 브레이브는 고개를 저었다. 평소 자신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곧잘 보이는 반응이라 지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회귀 시스템에 대해 설명이나 계속 해봐.”

더 이상 위협을 주지 않는 것이라 해도 흥미가 가지 않을 순 없다. 지금까지 일어난 막대한 회귀의 원흉은 그렌 제너드라도 그 근간은 회귀 시스템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다지 설명할 건 없어. 너도 알고 있는 게 대부분이니까. 세계수의 본체와 네 개의 분신의 힘을 이용해 세계의 시간 그 자체를 돌려버리는 시스템. 인간들이 쌓아온 노력, 결과, 성과, 실수, 잘못 그 모든 것들을 목표한 시간 이후부터 전부 날려버리는 것. 그게 브뤼셀 시스템이지. 물론 발동하는 자는 제외하고 말이야.”

“발동 조건은?”

“죽음.”

예상한 바다.

“얼마나 돌릴 수 있지?”

“사용 방법에 따라 다르지만, 적어도 그렌 제너드는 일정 시점으로만 돌아간다고 알고 있었어. 그렇게 사용했고.”

“사용 방법은?”

“세계수가 있는 곳에 조작 장치가 있어. 뭐, 지금은 그걸 완전히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지크는 또 다시 나온 세계수라는 단어가 걸렸다. 그는 지크 브레이브를 봤다. 분명 지금 지크 브레이브의 의지는 세계수의 의지라고 했었다. 그리고 그는 지크에게 무언가 부탁을 하기 위해 왔었다고도 했다.

그래서 지크는 다른 질문을 모두 제치고 물었다.

“세계수는 뭘 원하냐?”

지크 브레이브의 대답은 무척이나 간결했다.

“자유.”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