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5화
정원으로 넓게 꾸며진 곳과는 다르게, 이 숙소엔 자그마한 뒤뜰이 또 하나 마련되어 있었다.
관리는 잘 되어 있었지만, 정원처럼 신경 써서 꾸몄다거나 하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한스는 오히려 그게 좋았다.
후웅!
에스텔레이드를 쥔 손에 힘을 주고 강하게 검을 휘두른다. 순찰을 돌고 온 상태지만 그는 기본적인 훈련을 쉬지 않았다.
지크가 푹 쉬라고 휴가를 줄 때도 한스는 반드시 조금쯤은 검을 휘둘렀다. 지금은 그러지 않으면 오히려 몸이 찌뿌둥해 불편했다.
후웅!
온갖 정신을 집중해 검 한 번 한 번을 내리친다. 마력은 완전히 억제한 상태라 그의 얼굴에 땀이 흘렀다.
‘오늘은 이쯤 할까.’
내일도 순찰을 나가야 하니 너무 무리한 수련은 금물이다. 충분한 휴식도 훈련의 일부. 한스는 에스텔레이드를 갈무리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또 뵙네요.”
“그러게요.”
어느새 라라가 그의 곁에 서 있었다.
“혹시 불쾌하셨나요?”
“정식적인 수련도 아니고, 고작 몸 풀기로 검 몇 번 휘두른 것 갖다가 불쾌해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은 아닙니다, 전.”
“다행이네요.”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숙소를 이곳으로 옮겼거든요. 그런데 한스 씨가 보이더라고요.”
“그런가요.”
그리고 잠시 둘은 말이 없었다. 아예 모르는 사람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인연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활발하게 화제를 주고받을 정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서로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대화를 나눌 공통적인 화제가 없을 뿐이었다.
그냥 갈까 생각하던 한스의 눈에 라라의 허리춤에 있는 검이 눈에 들어왔다.
“검을 놓지 않으셨군요.”
“…그래요.”
그녀의 표정은 밝지 않다. 재능도 있고 좋아하기도 하는 길이다. 한데 표정이 어둡다면 외부의 요인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나는 건 하나.
“제너드 씨는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하시는 모양이군요.”
“…….”
그녀가 입술을 깨문다. 정답인 것 같다. 아니, 반응을 보아하니 그저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정도도 아닌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마주쳤을 때 파티에서 겉도는 느낌이었지.’
고작 지나가다 슬쩍 본 것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느껴질 정도라니.
“혹시 파티 내에서 따돌림이라도 당하고 있습니까?”
물어보면서도 ‘설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라는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정말로 그렇습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라라는 휙 등을 돌려 마치 도망치듯이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부정하긴 했지만 태도나 분위기로 볼 때 파티 내에서 그다지 좋은 대우를 받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녀 정도면 훌륭한 파티원 아닌가?’
지크를 좋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인 터라 한스도 그녀를 썩 좋게 보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그녀는 분명 실력 있는 검사였다. 지크의 인정까지 받지 않았던가.
하지만 한스는 거기서 생각을 접었다.
‘내가 상관할 바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녀는 남의 파티원이다. 참견할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다. 네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 따윈 하지 말아라. 지크의 가르침이었다.
한스는 준비해놨던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시원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생각할 셈이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로비를 걷는데 먼저 간 라라가 보였다.
방금 어색하게 헤어진 터라 말을 걸 생각은 없었다. 그녀를 지나쳐 방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라라는 멍하게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을 지나칠 때,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활짝 개방되어 있는 로비에서는 정원의 모습이 바로 보였다.
한스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건 라일라였다. 이상할 건 없다. 그녀는 요 근래 계속 정원에 얼굴을 비추고 있었으니까.
항상 같이 있던 지크가 없다고 해도 그녀가 정원에 있지 말아야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와 같이 있는 사람이 문제였다.
‘그렌 제너드.’
그다지 좋은 인상의 사내는 아니다. 무리의 리더인 지크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터라 그 영향을 받은 게 크지만, 몇 번 만나 본 이후로 한스 자신도 그가 조금 꺼려졌다.
그렌은 평소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채로 라일라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라일라 쪽도 적당히 얘기를 받아주는 모양이었다.
‘이상하군. 라일라 님은 우리 일행을 제외하면 그다지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분이 아니신데.’
게다가 지크만큼은 아니더라도 라일라도 그렌을 상당히 싫어하는 기색이 아니었던가.
‘뭔가 생각하시는 게 있나 보군.’
혹시 라일라가 그렌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 같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지금 라일라가 짓고 있는 표정이 겉치레라는 정도는 한스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결론을 내리는 한스완 달리 라라의 심경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라라가 몸을 돌렸다. 한스를 발견했지만 그녀는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어 보였다.
그녀는 계단을 올라갔다. 한스는 그녀의 뒷모습이 마치 쓰러지기 전의 패잔병 같다고 생각했다.
* * *
스녹과 엘레나는 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피알루는 무역도시, 그것도 산맥 너머의 전혀 다른 문화권과 교류를 하는 도시다. 당연히 이색적인 물품들이 많다. 평소대로라면.
“오늘도 별달리 색다른 건 없네.”
가판대에 진열된 물건에 눈을 떼며 엘레나가 중얼거렸다.
피알루에 도착한 이후 뭔가 신기한 물건은 없을까 종종 거리를 누볐지만 그녀의 마음에 차는 물건을 발견하진 못했다.
애초에 물건 자체가 적었다. 이유야 뻔했다. 지금 피알루를 공격하는 몬스터들. 그것들 때문에 물류가 막힌 것이다.
몬스터에게 완전히 포위된 상태는 아니기에 기본적인 물류 이동은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산맥을 통한 물류 이동은 대부분 막혔다고 봐야 했다.
다만, 그래도 무역도시인지 간간이 귀중한 물품이 발견되기도 했다. 마법 물품도 그중 하나였다.
물론 엘레나에게 그리 대단한 물품은 아니었다. 지크 일행은 온갖 희귀한 물품들을 갖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구경용으로는 충분했다.
“…드웨인?”
그녀가 마법 물품을 보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쿠스?”
“여기서 만나네.”
피나 어쿠스가 옆에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도 마법 물품을 살펴보고 있던 모양이다.
그녀가 스녹을 바라봤다.
“일행이지?”
“응. 스녹이라고 해.”
“안녕하세요.”
스녹이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어깨에 타고 있던 노웸도 ‘쿠!’라며 외쳤다. 노웸을 본 피나가 눈을 반짝였다.
“대지의 환수.”
저번 전투 때 스녹과 노웸이 어떻게 싸우는지를 목격한 그녀다. 마법사 특유의 호기심이 눈빛에 그대로 드러났다.
쿠우….
노웸이 서둘러 스녹의 품으로 숨어들었다. 마법사들의 저 눈빛은 천하의 대지의 환수인 노웸조차도 겁에 질려하기 충분했다.
아쉬운 얼굴을 하는 피나였지만 그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피나 어쿠스예요.”
그녀가 스녹을 향해 자기소개를 했다.
“드웨인과는 같은 마탑 출신이죠.”
“얘기는 들었습니다. 스녹입니다.”
둘은 짧은 악수를 나눴다.
“너도 스누위크에서 나왔을 줄은 몰랐어.”
엘레나의 말에 피나가 담담하게 말했다.
“거기에 남아 있는 게 힘들었으니까.”
“역시 그 일 때문이야?”
“그렇지.”
엘레나는 입을 다물었다. 피나도 말을 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 속에 스녹이 둘의 눈치를 봤다. 노웸도 스녹의 품에서 얼굴만 내민 채 눈동자를 굴렸다.
“…마법, 잘 사용하더라.”
먼저 침묵을 깬 건 피나였다.
“너도 여전히 대단한 실력이던데?”
엘레나가 대답했다. 그리고 둘은 다시 침묵했다.
어색한 침묵에 스녹이 뭔가 말을 하려고 했을 때였다.
피나가 엘레나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엘레나는 흠칫 놀랐다. 피나의 눈 속에 경쟁심 혹은 적의로 느껴지는 강렬한 감정이 깃들어 있는 걸 눈치 챈 것이다.
“난 반드시 스누위크로 돌아갈 거야. 그래서 마탑주의 자리에 올라 다시 우리 학파의 명예를 회복할 거야.”
“어, 어쿠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세상이 알게 해주겠어.”
지금까지의 냉담한 어조와는 달리, 확실하게 감정이 든 말투로 그녀는 선언했다.
“플루 학파보다 우리 퀘이럴 학파의 마법이 더 뛰어나다고.”
피나가 몸을 돌렸다. 바람 소리까지 날 정도로 정말 쌀쌀맞은 태도. 그녀는 계속 차가운 기운을 흩뿌린 채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엘레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아무래도 날 원망하는 것 같아.”
“너라기보다는 네 아버지겠지. 아니면 할아버지라든가. 어쩌면 너희 학파 전체를 싸잡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스녹이 엘레나의 옆에 서며 말했다.
“하지만 따지자면 널 원망할 이유는 없어. 재위크가야 이용당했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의 선택이었잖아. 하긴, 감정에 이유가 필요하겠냐만.”
쿠우.
노웸이 스녹의 품속에서 뛰쳐나와 엘레나의 어깨로 올라왔다. 그리고 마치 위로라도 하듯 앞발로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엘레나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고작 저 정도로 기죽지 마. 네가 잘못한 건 없고 책임질 것도 없어. 저 여자의 분노가 이해는 갈 수 있어도 받아들이는 건 얘기가 달라. 죄책감 가질 필요는 없어.”
“…정말 그럴까?”
“그래. 그리고 학파 이야기도 마찬가지야. 설마 밀릴 생각은 아니지?”
“물론이지.”
이번만큼은 엘레나는 확신에 차 말했다.
지금 엘레나의 학파는 솔직히 플루 학파라고 하기 힘들었다. 그녀에게 마법을 가르치고 있는 건 라일라였으니까. 하지만 그랬기에 더더욱 피나에게 밀릴 수 없었다.
완벽하기 이를 데 없는 스승의 가르침이 다른 이보다 달린다는 오명을, 엘레나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나도 절대 지지 않아.”
엘레나는 굳게 다짐했다.
* * *
지크는 눈을 떴다. 감각을 끌어 올리고 주변을 살폈다.
마력 폭발이 있기 전까지와 별로 달라진 건 없었다.
공동은 여전히 커다랬고 쇠사슬은 힘없이 널브러져 있으며 나무는 오연하게 떠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마력이 동원됐는데 아무런 일이 없을 리가 없다.
지크는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윈두르를 내려다봤다.
“이번엔 무슨 짓 한 거냐, 너.”
천하의 지크를 이렇게 마음대로 다루다니.
지크는 슬슬 자신의 애검을 지크 브레이브, 그렌 제너드 바로 밑의 재수 없는 놈으로 임명을 해야 할까 고민했다.
저벅!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공동에 자신 이외의 누군가가 있다.
지크는 고개를 돌렸다. 상대를 확인한 지크의 눈이 커졌다.
“반가워.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
콰앙!
상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크는 검을 휘둘렀다.
마력을 가득 담긴 검이 그대로 상대를 짓누른다. 하지만 상대는 지크의 공격을 착실히 막아냈다.
윈두르를 막아내는 새하얀 검이 인상 깊다.
“저기, 난 대화를 하고 싶은데….”
“아, 대화. 물론이지. 나도 대화 좋아해. 하자고. 일단 네 대가리부터 깨고 난 후에 말이야!”
그 말에, 지크 브레이브는 쓴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