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4화
그건 무척이나 기묘한 광경이었다.
본래 나무란 존재가 커진다면 하늘을 향해 하염없이 커지는 존재라지만, 그 시작은 어디까지나 땅이다.
하늘을 향하더라도 뿌리만은 단단히 지면을 움켜잡고 있는 존재가 바로 나무인 것이다.
물론 대지의 나무는 뿌리를 하늘에 내리고 땅속으로 자라는 기묘한 형태를 하고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지면에 붙어 자란다는 명제는 어기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나무는 달랐다. 나뭇가지는 당연하고 뿌리 끝까지 어디 하나 지면과 붙어 있는 곳이 없었다.
나무를 휘감고 있는 쇠사슬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저 공동 천장까지 떠오를 것만 같았다.
나무를 휘감고 있는 쇠사슬은 지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자유롭게 날아가려는 새를 강제로 땅에 묶어 두는 올가미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도 그리 강한 봉쇄 같진 않군.’
나무를 묶고 있는 쇠사슬의 상당수가 끊겨 허공에 휘날리고 있었다.
거의 반수 이상이 끊긴 것 같다. 그리고 그건 현재진행형이었다.
쾅!
쇠사슬 하나가 더 끊겼다. 끊긴 쇠사슬이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휘둘리다 지크를 향해 날아왔다.
지크는 허리를 굽혀 피했다.
파앙!
마치 공기를 후려치는 듯한 소리가 위에서 들렸다. 쇠사슬은 불규칙한 궤도를 그리며 지크에게서 멀어졌다.
‘정통으로 맞았으면 위험했을 거야.’
극한까지 팽팽해져 있던 쇠사슬이 끊어지며 휘둘러질 때의 힘은 절대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다.
일반인 정도라면 뼈가 부러지는 정도가 아니라 상체와 하체가 끊어졌을 것이다. 거기에 저 쇠사슬은 보통의 금속으로 이루어진 물체로 보이지도 않거니와 마력도 잔뜩 머금고 있다.
얻어맞았다면 지크조차도 단순 부상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저게 나무를 억제하고 있는 물품이겠지?’
호수의 눈물과 화염의 눈물 그리고 대지의 나무를 감싸고 있던 녹색의 나무와 같은 역할을 하는 물건.
하지만 상당수가 끊겨 있는 걸 봐서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느껴지는 나무의 마력도 많다.’
지금껏 억제되어 있는 나무와 억제가 풀린 나무의 마력 차이는 많이 느껴봤다. 지금 느껴지는 마력은 억제된 나무가 뿜고 있는 것이라기엔 너무 많았다.
‘하지만 억제되지 않고 있다고 보기엔 또 너무 적어.’
반쯤 억제기가 효율을 잃은 상태. 그렇게 보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오래된 세월로 인해 억제기가 열화된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지금껏 봤었던 다른 억제기들은 세월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처럼 생생히 자신의 성능을 뽐내고 있었다.
추측일 뿐이지만, 시간은 억제기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럼 다른 나무의 억제기를 제거했기 때문일까?’
나무들이 회귀의 근원일 거라고 생각되는 바. 그렇다면 어떻게든 나무끼리의 연결이 있을 가능성이 크니, 억제가 풀린 다른 나무들이 이 나무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있었다.
지크는 나무 바로 아래까지 걸어갔다.
휘이이이잉!
가면 갈수록 공기가 요동을 친다. 옷깃이 나부끼며 머리카락이 사정없이 물결친다.
지하 안에 바람이 칠 리 없다. 외부로 통하는 공간이 깊은 통로 안으로 뻗은 계단밖에 없는 이곳이라면 더더욱.
결국 바람의 근원은 눈앞의 나무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바람의 나무로군.’
그거라면 지금 지크의 몸을 간질이는 바람도,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나무의 상황도 모두 설명할 수 있다.
잠시 나무를 감상한 지크는 가장 근처에 있는, 나무를 지면에 고정하고 있는 쇠사슬에 다가갔다. 쇠사슬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강철이라도 진흙을 베듯 베어버릴 수 있는 지크라지만 쇠사슬도 보통 쇠사슬이 아니다.
다른 억제기들을 생각하면, 아무리 반쯤 성능을 잃었다 해도 얕볼 것이 못 된다.
하지만 지크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는 등에서 윈두르를 뽑아 손에 쥐었다.
잠시 후.
우우우웅!
윈두르가 떨렸다. 동시에 바람의 나무도 진동했다.
‘왔다!’
잠들어 있던 지크의 마력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 충만한 느낌은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부상당해 움직이지 못하는 신체를 다시 마음껏 움직일 수 있게 되는 느낌이랄까.
지크는 완벽히 깨어난 자신의 마력을 천천히 돌려봤다. 전능감이 온몸을 타고 흐른다.
지크는 씨익 웃으며 윈두르에 마력을 집어넣었다.
우우우웅!
거센 마력이 주입되자 윈두르의 검신이 떨렸다. 지크는 윈두르를 높이 들어 올려, 눈앞의 쇠사슬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콰지직!
거센 저항을 받았지만 지크는 쇠사슬을 잘라내는 데 성공했다.
후웅!
쇠사슬이 지크의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다. 팽팽한 장력이 일순간 풀려나며 쇠사슬을 무시무시한 무기로 만들었다.
‘쉬운 일이 없군.’
쇠사슬을 자르는 데만 신경 썼다가는 저 살벌한 쇠사슬에 몸이 조각날 것이다. 지크는 정신을 집중하고 쇠사슬을 하나하나 끊어나갔다.
쇠사슬이 끊어질수록 나무에서 나오는 마력이 많아졌다.
콰지직!
지크가 마지막 쇠사슬을 자르는 순간, 나무에서 폭발하듯 마력이 쏟아졌다. 공동 안이 미친 듯 바람에 흩날렸다.
촤르르륵!
나무에 걸쳐 있던 쇠사슬이 바람에 전부 날아갔다. 자신을 구속하는 모든 것을 벗어던진 채, 바람의 나무는 오연히 허공에서 그 자태를 뽐냈다.
‘됐군.’
이걸로 피알루에 온 목적을 이뤘다.
‘어처구니없게도 쉬웠어.’
예전 다른 나무들을 조우했을 때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좀 김이 새긴 했지만 그렇다고 나쁜 것만도 아니다. 지크는 모든 성과가 강한 시련 뒤에 성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디스트는 아니었으니까.
‘편한 길이 있다면 편한 길이 낫지.’
어쨌든 원하던 목적을 이뤘다. 지크는 바람의 나무를 올려다봤다.
‘이걸로 억제기를 벗겨낸 건 총 네 그루. 이쯤이면 그렌 제너드의 회귀 능력도 없어지지 않았으려나.’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돌아갈까.’
바람의 나무를 해방한다는 목적을 이뤘지만 아직 피알루에서 해야 할 일은 많았다.
그렌 제너드도 경계해야 하고 틸의 마왕화도 막아야 했으며, 몬스터들의 움직임도 감시해야 했다.
지크가 발길을 돌리려 할 때였다.
쿠웅!
거대한 마력의 박동이 들렸다. 지크는 걸음을 멈춘 채 바람의 나무를 올려다봤다. 그것이 새하얗게 발광을 하고 있었다.
우우우웅!
동시에 윈두르가 진동했다. 누가 봐도 나무와 공명하고 있었다.
윈두르에게서 복잡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진다. 그것은 바람의 나무의 지원을 받으며 차츰차츰 어떤 구조를 이뤄나갔다.
‘그럼 그렇지. 쉽게 끝날 리가 있나.’
지크는 혀를 찼다. 고작 쇠사슬 얼마 부수고 말 정도였으면 윈두르가 직접 길을 안내할 이유도 없지 않았을까.
‘이젠 놀랍지도 않다. 뭘 할 생각이냐?’
지크는 윈두르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윈두르의 마력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 순간.
퍼엉!
소리도 섬광도 없다. 하지만 지크는 느낄 수 있었다. 공동에서 무언가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 것을.
지크의 의식은 그 폭발에 삼켜졌다.
* * *
지크가 셀록블럼으로 올라간 후, 라일라는 한스, 스녹, 엘레나를 데리고 피알루의 방어에 주력했다.
지크가 아침 일찍 혼자서 산을 올랐다는 소리에 잠깐 당황한 것도 잠시, 셋은 순순히 라일라의 지시를 들었다.
성벽에서는 아직까지 피해를 수습하고 있었다.
막대하게 생긴 몬스터들의 시체를 치워야 했고 부서진 성벽도 수리해야 했다. 게다가 몬스터들의 습격이 끝났다는 확증도 없으니 순찰도 계속해야 했다.
라일라는 일행을 이끌고 그들에게 배정된 순찰 경로를 돌았다. 저번 습격 때 엄청나게 몬스터를 쏟아냈기 때문인지 몬스터들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좋지 않은 만남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안녕하십니까.”
서글서글한 미소를 띤 채 다가오는 남자. 그렌 제너드였다.
돌아가는 길에 피알루에서 나오는 그의 파티와 마주쳤다. 아마도 지크 일행의 다음 순번 순찰로 배정된 모양이었다.
절로 혀를 찰 뻔했지만, 아무래도 정면에서 그러기엔 무리가 있다. 라일라는 태연하게 반응했다.
“안녕하세요.”
그렌이 라일라의 뒤를 잠깐 살폈다.
“지크 씨가 보이지 않는군요. 어디 가셨습니까?”
“셀록블럼에 올라갔어요. 몬스터들의 이상사태를 규명할 수 있을지 알아본다는군요.”
“대단하시군요.”
그렌이 감탄한 표정을 띄운다. 지크의 행동력에 깊이 감명을 받은 듯한 표정이다.
그의 음습한 속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속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의 겉치레는 대단했다.
두 집단은 그렇게 대단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그저 스쳐 지나가다 안면이 있는 사람과 인사를 나누는 것뿐. 그렇게 두 집단은 헤어졌다.
하지만 인연이 있는 몇몇은 아무래도 상대 집단에 있는 사람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브라우닝 씨, 상당히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는데….’
꽤 접점이 많았던 라라를 신경 쓰는 한스.
‘정말로 피나였어.’
같은 마탑 출신의 마법사를 확인한 엘레나.
그러나 가장 먼저 상대방 집단의 사람을 만나러 온 건, 의외라면 의외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사람이었다.
“잠시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라일라 씨.”
요새 지크와 같이 편안하게 쉬는 공간이 된 정원에서 혼자 유유히 차를 마시고 있던 라일라에게 그렌이 다가왔다.
* * *
“좀 놀랐어요. 이 숙소에서 당신들을 본 기억은 없는데.”
라일라는 눈앞에 앉은 그렌을 보며 말했다. 그렌은 언제나 짓고 있는 사람 좋은 미소를 보였다.
“저희도 좀 좋은 숙소를 찾고 있었거든요. 한데, 여기에 지크 씨 일행이 머물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옮겼습니다.”
“저희가 그렇게 친한 사이였던가요? 다른 일행이 머무는 숙소를 찾았다고 바로 옮길 정도로?”
“그거야 상황에 따라 다르죠. 적어도 지금은 협력해야 할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적을 상대할 때 손을 잡을 정도의 사이는 되잖습니까, 우리. 잔말피에서도 그랬고요.”
“그때도 끝날 때는 상당히 안 좋게 헤어졌죠.”
“뭐,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높은 건 이해합니다. 그렇다고 같이 싸우는 사람을 완전히 외면하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죠.”
“당신의 생각은 알겠어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하셨을까요?”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아무리 데면데면한 아니, 좋지 않은 사이라고 해도 같이 싸울 상대 아닙니까. 약간의 친분을 쌓으려는 게 욕먹을 일은 아닐 겁니다.”
“그런 거라면 지크와 하는 게 나을 거예요. 우리 일행의 리더는 지크니까요. 게다가 당신과 가장 충돌을 한 것도 지크고요. 지크가 돌아올 때 알려드릴까요?”
“아하하, 지크 씨와도 얘기를 나눠봐야죠. 하지만 당장은 안 계시니, 일단 라일라 씨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라일라는 확신할 수 있었다.
‘나를 찍었구나.’
아무래도 자신을 동료로 삼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니, 동료라기보다는 자신의 옆에 세우는 예쁘장한 인형이 더 어울리는 단어가 아닐까.
지크라는 방해꾼이 사라진 이때를 기회라고 생각한 게 빤히 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