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3화
절벽 위를 올라온 지크는 자신이 올라온 절벽의 아래를 내려다봤다.
바닥은 보이지 않았다. 새하얀 구름이 절벽 중턱에 걸려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절대로 쉽게 볼 수 없는 몽환적인 풍경이지만 동시에 소름이 끼치는 풍경이기도 했다.
여기서 떨어진다면 높은 허공에 내동댕이쳐지는 것과 다를 바 없을 테니까.
지크는 시선을 조금 높였다. 마치 지면의 넓은 평야처럼 하늘을 덮고 있는 하얀 구름 위로 다른 봉우리들이 불쑥불쑥 솟아 있다.
전부 만년설에 뒤덮여 하얗게 보이는 그 봉우리들은 똑같이 하얀 구름의 색채와 어울려, 하얀색밖에 없는 세계의 평야와 야산처럼 보였다.
지크는 고개를 돌려 이번엔 뒤를 쳐다봤다.
겨우겨우 구름 위로 고개를 내민 다른 산봉우리들과는 다르게 지크 뒤에 있는 산봉우리,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인 셀록블럼은 아직까지도 거대한 몸을 유지하며 지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계속 올라가야지.’
셀록블럼의 산꼭대기를 가리키는 윈두르를 등에 동여매고 그는 발을 옮겼다.
절벽은 아니어서 손가락을 벽에 꽂아 올라갈 필요는 없었지만 그저 절벽이 아닐 뿐, 그 경사는 여전히 가팔랐고 지형은 험했다.
쌓인 눈이 발목을 계속 붙잡았고 날카로운 바람은 마치 옷 속을 난도질하려 시도하는 것 같다.
주홍빛으로 물든 하늘 또한 서서히 남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지크는 계속해서 걸었다. 아무리 세계 최고 봉우리의 험난한 산길이라고 해도 그의 걸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지크는 이 세상 가장 높은 곳에 설 수 있었다.
‘설마 진짜 셀록블럼 꼭대기까지 올라오게 만들 줄이야.’
셀록블럼 중턱 어딘가의 동굴 같은 곳으로 안내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해봤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없이, 윈두르는 지크를 셀록블럼 정상으로 안내했다.
‘그래도 뭐, 한번은 올라와 볼 만한 곳이긴 하군.’
끝도 없이 펼쳐진 하늘과 그 아래 보이는 지면은 경이롭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지크의 좋은 눈으로도 지면 아래 생명체는 보이지 않는다. 주변에서 지크와 같이 서 있는 산봉우리도 없다.
말 그대로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 지금 지크보다 높은 곳에 있는 건 하늘과 구름. 그리고 천체뿐이었다. 그 사실은 천하의 지크조차 약간 감상적으로 변하게 했다.
피알루에 대한 걱정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않고 등산을 번개처럼 끝낸 지크였지만 그는 봉우리에 있는 바위 하나에 걸터앉아 잠시 아래를 내려다봤다.
‘피알루의 일이 끝나면 다른 녀석들을 데리고 한 번 더 올라와 보는 것도 좋겠어.’
혼자 보긴 아쉽다. 지크는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멍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던 지크의 뇌리에 무언가가 스쳤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볼 일이 있었다. 그는 상자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건 작은 단지였다.
지크는 단지의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잿가루가 가득 담겨 있었다.
‘잘 들어 있군.’
지크는 단지 안에 손을 넣어 잿가루를 꺼냈다. 그리고 허공에 잿가루를 뿌렸다.
휘이잉!
강렬한 바람이 잿가루를 잡아채 하늘로 도망간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크는 계속해서 잿가루를 꺼내 뿌렸다.
잿가루는 금방 사라졌다. 남은 건 손에 쥐어진 한 움큼과 단지 안에 남은, 손으로 쥘 수조차 없는 소량뿐이다.
지크는 손에 쥐어진 남은 잿가루를 바라봤다.
“내가 약속했었지? 이 세상 가장 높은 곳에 뿌려 주겠다고 말이야.”
지크는 마지막 잿가루를 뿌렸다. 그리고 단지까지 뒤집어 탈탈 털었다.
허공에 흩날리는 잿가루를 보며 지크가 입을 열었다.
“잘 가라, 트리슬로와. 그리고 원망하진 마라. 이건 전부 다 너 때문이니까.”
후우웅!
마치 진저리를 치듯 바람에 날리던 잿가루가 부르르 떠는 것 같더니, 산산이 흩어져 푸른 허공 속으로 녹아들었다.
중요한 임무 하나를 끝마친 지크는 무척이나 뿌듯했다.
‘그럼. 사람은 약속을 지키면서 살아야지.’
그 약속을 어기며 트리슬로와를 죽인 지크가 할 말은 절대 아니었지만, 여기서 그에게 항의를 할 사람은 없었다.
감상적인 느낌도 잘 음미했고 트리슬로와의 마지막 일도 끝냈다. 이제는 다시 이곳에 방문한 목적을 실현해야 했다.
지크는 윈두르를 꺼냈다. 윈두르의 날이 휘었다. 평소와 달리 윈두르의 날이 가리키는 곳은 지크의 발밑이었다.
지크는 발을 이용해 바닥을 비볐다. 높게 쌓인 눈이 지크의 발에 밀려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아래층의 꽁꽁 얼어버린 눈이 지크를 반겼다. 웬만한 충격으로는 쉽게 깨뜨리지 못할 게 분명했다.
지크는 윈두르를 쳐다봤다. 윈두르는 꿋꿋이 지크의 발밑을 가리켰다.
‘팔 수밖에 없겠군.’
셀록블럼 정상까지 와서 해야 할 일이란 게 눈을 파내는 삽질이라니.
지크는 조금 투덜거리고는 윈두르를 정상으로 돌렸다. 그러고는 마력을 잔뜩 집어넣은 후, 힘껏 꽂았다.
콰아아앙!
엄청난 폭음이 셀록블럼 정상에 휘몰아쳤다. 산봉우리에 잔뜩 쌓인 눈들이 그 폭음에 반응했다.
콰르르르!
곱게 잠들어 있던 눈들이 광폭하게 깨어났다. 주변에 아직 깨어나지 않은 눈들까지 선동해 미친 듯이 날뛴다. 새하얀 눈가루를 휘날리며 그것들은 아래로 달려 나갔다.
눈사태가 봉우리 아래로 밀려 내려간다. 하지만 거대한 재앙을 일으킨 지크는 눈사태에는 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워낙 높은 곳에서 일어난 산사태라 산 아래에 피해를 입히지도 못한다.
그는 그저 윈두르가 가리킨 곳을 계속해서 파 들어갔다.
이미 얼음덩어리로 변해 무척 단단한 강도를 자랑하는 눈이었지만 마력이 잔뜩 들어간 윈두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윈두르가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사람 크기보다 더 큰 얼음덩어리들이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카앙!
얼음 아래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얼음과 부딪치는 소리와는 명백히 다르다. 애초에 마력이 깃든 윈두르를 튕겨낼 수 있는 얼음 따위 없다.
‘찾았다!’
지크는 마력을 가득 담아 발을 굴렀다.
콰지지직!
발밑의 얼음이 완전히 깨져나갔다. 지크는 조각난 얼음을 치웠다.
아래로 단단한 금속이 나타났다.
차가운 느낌을 내뿜는 그 금속은 일단 평범한 금속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크는 금속의 종류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시선이 박힌 곳은 금속 사이에 난 긴 균열이었다.
지크는 윈두르를 그 균열에 꽂아 넣었다.
철컥!
안으로부터 무언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린다. 지크는 윈두르를 돌렸다. 윈두르를 중심으로 균열이 천천히 회전했다.
철컥!
윈두르가 완전히 한 바퀴를 돌았을 때 다시 한번 금속음이 들렸다.
쿠르릉!
셀록블럼이 떨리며 균열 주변의 금속이 서서히 옆으로 밀려났다. 얼마 후, 지크의 앞으로 사람 한 명 들어가기에 충분한 구멍이 생겼다.
‘여기군.’
누가 봐도 클로원과 관련이 있는 시설이다. 지크는 윈두르에게 나무가 있는 곳을 가리키라고 명령했다. 하나, 이번엔 윈두르에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젠 필요가 없다는 거냐.’
하여간 제멋대로인 검이다. 지크는 혀를 차며 윈두르를 등에 멨다. 그리고 구멍 안을 들여다봤다.
구멍 아래로는 긴 계단이 뻗어 있었다.
‘어쩔까.’
지크는 조금 고민했다. 원하던 걸 찾았다. 아마 이 아래에 나머지 하나의 나무가 있을 터.
‘다른 녀석들을 데려와야 하나.’
지금껏 나무들을 찾았을 때마다 쉽게 끝난 적이 없다.
불의 나무 때는 엘프들의 전쟁에 휘말렸고 물의 나무 때는 라일라의 기억을 빼내려 한 생체 괴물이 있었다. 그리고 대지의 나무 때는 방위 시스템과 마릴린과의 전투가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럴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
이번 나무는 걱정이 무색하게도 아무런 방해가 없을 수도 있다.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내려간다.’
도시에 틸과 그렌 제너드가 있는 한, 믿을 만한 누군가가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아래가 그 어떤 위험한 상황이라도 몸 정도는 충분히 뺄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지크는 구멍 아래 계단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지크의 몸이 구멍 아래로 사라지자 구멍의 문이 다시 닫혔다. 그리고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조용히 침묵에 잠겼다.
셀록블럼에는 다시 시끄러운 바람 소리만이 맴돌았다.
* * *
구멍 안은 깜깜했다. 하지만 어둠이 지크의 시야를 가릴 순 없었다. 마치 지크에게만 적용되는 거대한 광원이 어딘가 있는 것처럼 지크는 수월하게 길을 나아갔다.
계단은 나선형으로 나 있었다. 아래로 길게 뻗은 계단은 셀록블럼의 중추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길다 해도 끝은 있는 법. 지크는 계단의 밑바닥에 발을 디뎠다.
주변은 꽤 넓은 공동이었다. 이곳에도 예전 황제들의 무덤이 그랬던 것처럼 천장에서 빛이 뿜어지고 있어 주변은 밝았다.
그 빛 아래로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집 아니, 생긴 걸로 보면 신전인가?’
워낙에 오랜 시간 전에 세워진 건물이라 지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곳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지크는 신전처럼 보였다.
지크는 그 건축물로 걸어갔다. 공동이 커다란 만큼 그 건축물의 규모도 컸다.
반듯한 계단을 걸어 올라가자 거대한 기둥들이 지크를 반긴다. 그 위로는 육중한 지붕이 놓여 있었다.
산 안에 세워진 건축물이라 지붕 따위는 필요 없겠지만 아마 양식 때문인 듯싶었다.
건축물의 거대한 규모답지 않게 안은 무척이나 심플했다. 벽도 없이 그저 기둥만이 존재해 지붕을 받쳐 건축물 안쪽이 훤하게 드러나 보였다.
가장 눈에 띄는 건 건축물 깊은 곳에 있는 거대한 제단. 그리고 그 제단 위에 있는 동상이었다.
‘클로원 제국의 초대 황제.’
이미 황제들의 무덤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라일라의 아빠군.’
지크는 윈두르를 꺼내 들었다. 황제의 무덤에서도 스스로 움직이며 미쳐 날뛰던 동상이다. 여기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다.
그러나 지크가 가깝게 접근할 때까지 동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크는 계속 그것을 경계했다.
‘무덤에 있던 놈들도 계기가 있었을 때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지크는 동상을 경계하면서도 주변을 살폈다. 특별한 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 의식을 치르기 위해 준비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보일 뿐이었다.
‘신앙의 대상은 초대 황제인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클로원의 기틀을 잡은 초대 황제가 아니던가. 후대가 신으로 섬긴다고 해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클로원의 사람들이 초대 황제를 얼마나 진실되게 섬겼는지는 지크가 알 바 아니었다.
‘여기는 그다지 볼 게 없군.’
그렇게 신전 이곳저곳을 뒤지다 지크는 초대 황제의 동상 뒤에 내려가는 구멍 하나가 있는 걸 발견했다. 구멍 안에는 이번에도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길게 뻗어 있었다.
지크는 계단을 내려갔다.
이번 계단도 상당히 길었다.
지크가 계단 아래 지면을 디뎠을 때, 지크는 볼 수 있었다.
엄청나게 굵은 쇠사슬에 휘감긴 채 공중에 떠 있는, 거대한 나무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