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1화
몬스터들은 그게 아무리 약한 몬스터라도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한다.
그 강함의 정도나 교활함은 몬스터의 종류마다 다르지만, 잔혹함 하나만큼은 모든 몬스터가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먹이로 취급하는 것은 기본이고 그것보다 더 끔찍한 짓을 저지르기도 한다. 게다가 약한 몬스터들도 무리를 짓는다거나 혹은 다른 방법으로 약함을 메워 공격하기도 하기에 약하다고 무조건 얕볼 수도 없다.
때문에 전쟁의 상대가 같은 인간이 아닌 몬스터라는 사실은 알게 모르게 병사들의 사기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인간의 뇌리 깊숙이 박혀 있는, 몬스터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마저 일거에 날려버릴 정도로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시작은 거대한 마법. 과장 않고 집채만 한 불덩이가 나타나 그 끔찍한 몬스터들을 불사르는 것부터 시작됐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마법을 본 적이 없다. 그런 그들에게 어렸을 적 봤던 동화 속 마법을 그대로 재현한 듯한 화염 마법은 그 자체로 깊은 충격을 안겼다.
동시에 그들의 마음속에 커다란 희망을 새겼다. 저런 대단한 마법사가 참가한 전투라면 아무래도 승리할 가능성이 더 높아질 테니까.
하지만 그들의 희망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갑자기 성벽 아래로 뛰어내린 세 명의 인간. 세 사람이 직접 뛰어내린 걸 본 사람은 적었다.
하지만 병사들이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될 때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뭇가지같이 생긴 기괴한 검을 휘두르며 전면에 있는 몬스터들을 마치 썩은 나무토막 부수듯 부숴버리는 인간과 연신 빛을 뿜는 검을 휘둘러 몬스터들을 토막 내는 인간.
그리고 웬 무서운 생물을 타고는 땅을 뒤집고 일으키며 몬스터들을 압사하는 인간.
사방에서 수도 없이 몬스터들이 몰려오고 있었지만 그들은 전혀 밀리지 않고, 오히려 여유까지 가진 채 몬스터들을 밀어붙였다.
그건 분명 동화 속에서 봤었던 영웅의 모습이었다.
콰아앙!
다시 한번 마법이 몬스터들을 불사른다.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는 한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 마법을 사용한 마법사 옆으로 다른 마법사가 보였다.
최초의 마법사가 사용하는 마법보다는 위력이 적은 듯 보였지만, 그녀가 사용하는 마법들도 몬스터들을 불태우기엔 문제가 없었다.
‘이것 참.’
성벽 아래를 보고 틸은 혀를 찼다. 한심하거나 기가 막혀서 혀를 찬 게 아니다. 너무도 경이로운 모습에 할 말이 없어서 혀를 찰 수밖에 없었을 뿐이다.
처음 틸은 지크 일행을 봤을 때 무척이나 반가웠다. 비록 첫 만남은 좋지 않았지만 그건 이미 잘 해결한 상태.
요 근래에는 그들이 아들과 잘 놀아주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안 그래도 아들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틸은 지크 일행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약간의 언쟁 때문에 지크를 불쾌하게 보던 닉도 지크 일행이 그의 딸과 놀아준다는 말을 듣고 태도를 바꿨다.
원하는 길이 달라 지금은 으르렁거리는 둘이었지만 본질인 자식 사랑만큼은 변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반가운 건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그마치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 그 무력은 절대 범상치 않을 것이다.
단순히 이름값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교수대에 끌려간 전 부하들의 증언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합류한다면 이 전투는 분명 유리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건, 명예 성기사의 동료가 사용한 마법으로 확실해졌다. 나름 많은 경험을 쌓으며 마법사들도 몇 만나 본 틸이었지만, 저런 대단한 마법은 처음이었다.
이길 수 있다. 그것도 최대한 피해를 억누르면서. 틸의 생각이 확고해졌다.
그러나 그런 틸도 지크를 포함해 세 명이 성벽 아래로 뛰어내릴 때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일까. 혹시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라는 자가 이런 전투에서 겁을 먹어 자살을 한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이후에 일어난 결과는, 숙련된 용병인 틸조차 할 말이 없게 만들었다.
대형 몬스터마저 상당한 비율로 섞여 있는 몬스터의 해일이, 고작 세 명에게 말 그대로 유린당하고 있었다.
저건 싸움이 아니었다. 일방적인 학살일 뿐. 주변 용병들에게 명령을 내려야 하는 자신의 의무조차 잠시 망각할 정도로 틸은 충격을 받았다.
그를 일깨운 건 근처의 라일라였다.
“지휘 안 하실 건가요? 다른 곳은 슬슬 몬스터들이 기어 올라오고 있는데요?”
그녀가 마법 한 방을 더 꽂아 넣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성벽을 오르려 기를 쓰는 몬스터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지크 일행이 꽤 많은 수의 몬스터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지만, 몬스터들은 그 이상으로 많았던 것이다.
황급히 정신을 차린 틸은 바로 주변에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궁수들은 당장 화살을…!”
틸이 입을 닫았다. 그의 눈이 지크, 한스, 스녹을 쳐다보는 걸 눈치 챈 라일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굳이 저 녀석들 때문에 화살 쏘기를 머뭇거릴 필요는 없어요. 눈먼 화살 정도에 당할 녀석들이 아니니까.”
생각해보니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틸은 다시 힘차게 사격 명령을 내렸다.
화살이 성벽 너머를 향해 날아갔다. 그의 걱정대로 몇 발은 지크 일행이 있는 곳에 떨어져 내렸지만 셋은 눈조차 돌리지 않고 화살을 튕겨냈다.
그 모습을 보고 틸은 안심하며 화살 사격을 계속 명령했다.
다른 용병들은 성벽 아래로 뜨거운 물을 붓거나 커다란 돌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몬스터들을 막을 수 없어, 하나둘 몬스터의 손이 성벽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용병들은 자신의 무기로 그것들을 하나하나 찍어냈다.
“흐읍!”
틸이 휘두른 커다란 대검이 성벽 위로 목을 내민 몬스터 셋을 일거에 절단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닉이 창을 휘둘러 몬스터의 이마에 구멍을 냈고 맥스가 도끼로 몬스터들의 머리를 쪼갰다.
지크 일행이 계속해서 몬스터들을 도륙하는 것에 힘입어 용병들은 무척이나 수월하게 성벽을 사수해 나갔다.
당연히 그 싸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지크 일행이었다.
그들과 가장 가까운 성벽에 있는 용병들은 물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피알루의 병사들마저 그들의 전투를 목격했다. 당연히 지크 일행에게 향하는 시선은 극히 호의적이었다.
그리고 그렌은, 그 상황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빌어먹을!’
속으로 욕설을 내뱉는다. 병사들이 지크 일행을 보는 선망의 눈빛이 짜증 났다.
저 눈빛은 자신이 받아야 했다. ‘정당한 용사’인 자신이.
한데 어떤가. 지금 전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지크와 그 일행이다. 이대로 전투가 끝난다면 그 누구도 자신들은 기억하지 못하리라.
‘나도 간다.’
남은 길은 그것밖에 없었다. 관심을 독차지하지는 못 하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남은 관심은 끌어올 수 있으리라.
“첼시!”
“네!”
“너는 주변을 돌면서 다친 병사들을 치료해줘.”
“응? 그러면 그렌은요?”
“내가 이까짓 전투에서 부상을 당할 사람으로 보여?”
“으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으니 내키진 않지만, 알았어요.”
“피나!”
“응.”
“너는 마법을 사용해 병사들을 도와.”
“응.”
“나는 성벽 아래로 내려간다.”
그렌은 토르니움을 꽉 잡았다. 라라가 급하게 그를 만류했다.
“위험해, 그렌!”
자신의 충고도 듣지 않는 여자가 짜증스럽게 방해한다.
그렌이 라라를 쳐다봤다. 그 싸늘한 시선에 라라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저자들이 하는 걸 내가 못한다는 거야?”
“그, 그런 게 아니라. 저 사람들은 같이 싸우는 사람들이 있잖아. 뭣 하면 나도 따라가서….”
“됐어.”
그렌은 라라의 말을 차갑게 끊었다.
“너까지 지키며 싸울 수는 없어.”
“지킬 필요는 없어! 나도 나름 실력은 있…!”
“됐다니까.”
이번에도 그렌은 라라의 말을 잘랐다.
“그, 그럼 나는 뭘….”
“주변 병사들을 도와.”
그렇게 말하고 그렌은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 모습을 라라는 멍청하게 쳐다봤다.
“…먼저 갈게.”
피나가 어색한 침묵이 거북한 듯 지팡이를 들고 성가퀴 쪽으로 뛰어갔다.
“브라우니 양도 힘내세요!”
첼시는 특유의 미소로 라라를 격려해준 후 -첼시의 성격상 그건 격려라기보다는 비웃음에 가까웠지만– 가장 가까이 있는 부상을 입은 병사에게 다가갔다.
라라는 혼자 남았다. 주변에서는 온갖 고함과 비명이 넘쳐나고 사람과 몬스터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펼쳐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마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다행히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아직 성벽 위로 몬스터들이 발을 디디는 정도는 아니라지만 전장 한가운데서 멍 때리고 있는 게 좋을 리 없다.
라라는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성가퀴에 달라붙어 올라오는 몬스터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서걱!
그녀의 검이 깔끔한 궤적을 그리며 오거의 목을 날린다. 목을 잃은 오거의 몸이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서걱! 서걱! 서걱!
라라의 검이 계속해서 휘둘러진다. 그때마다 몬스터는 목을 잃었다. 절대 가볍게 볼 수 없을 정도로 라라의 검은 깔끔했다. 지크도 제법이라며 고개를 끄덕일 정도의 것이었다.
하지만 라라의 얼굴을 무표정했다. 마치 감정을 죽인 기계처럼, 그녀는 묵묵히 몬스터들의 목을 베었다.
* * *
몬스터 해일 속에 뛰어든 또 한 명의 사람을 보고 병사들은 열광했다.
세 명이서 몰려다니는 지크 일행과는 다르게 그는 어디까지나 혼자서 몬스터들을 도륙했다.
물론 아무래도 인원수의 차이도 있고 실력도 떨어지기에 그는 지크 일행만큼 몬스터들을 학살하진 못했다.
하지만 몬스터의 무리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실력이었다.
라일라도 그 장면을 봤다.
‘그렌 제너드네?’
아마도 지크에게 밀리는 게 싫어서 뛰어든 모양이다. 라일라는 그렌의 속내를 정확히 짐작했다.
‘실수인 척하고 한 방 쏴?’
그런 욕망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이내 욕망을 억눌렀다.
‘저 녀석은 지크의 먹잇감이니까, 괜히 손을 대진 말아야지.’
그때였다. 옆에서 마력의 발현이 느껴졌다. 라일라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콰앙!
완성된 마법이 발사되어 몬스터들을 타격한다. 커다란 불덩이가 몬스터들을 불살랐다.
‘흐음.’
라일라는 마법을 구현한 사람을 쳐다봤다. 엘레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소녀 한 명이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하지만 라일라는 바로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그렌 제너드에게 새로운 동료가 들어왔다고 했었지?’
분명 스누위크 마탑 출신으로, 피나 어쿠스라고 했던 것 같다.
“…어쿠스?”
엘레나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오랜만이네, 드웨인.”
“아, 그래. 오랜만이야.”
“마법을 쓸 수 있게 됐구나?”
“응.”
피나가 엘레나의 지팡이를 쳐다봤다. 지팡이 끝에서 격렬한 화염이 타오르고 있었다.
엘레나가 자신을 알아보고는 놀라 영창을 중단했는데도 불구하고 화염은 사라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영창 중단도 배웠어?”
“응? 아, 응. 스승님께 배웠어.”
피나는 시선을 라일라에게 옮겼다. 스누위크 마탑에 소문이 자자한 천재 마법사. 소문처럼 도저히 인간처럼 보이지 않는 미모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녀가 말했다.
“너희들, 친구끼리의 회포는 나중에 풀려무나. 지금은 눈앞의 몬스터들을 처리해야 할 때야.”
“아, 네!”
엘레나가 다시 시선을 전면으로 돌리고 마법을 사용했다. 그 모습을 잠시 보던 피나도 다시 몬스터들을 공격했다.
전투는 무르익어 갔다. 몬스터들이 계속해서 몰려들었지만 인간들은 한 치도 밀리지 않고 몬스터들을 토벌했다.
그리고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기나긴 전투가 끝났다.
결과는 인간의 승리. 성벽 아래에는 죽어 나자빠진 몬스터들의 시체만 있을 뿐, 살아 있는 몬스터는 없었다.
병사들이 함성을 터뜨린다. 이번 전투의 승리와 살아남은 자신에게 보내는 찬사다.
그리고 이번 전쟁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남긴 자들에 대한 찬사이기도 했다.
무수한 몬스터의 시체 사이에서 무기를 갈무리하는 지크 일행과 그렌. 그리고 성벽 위에서 옅은 한숨을 내쉬는 다른 일행을, 사람들은 경의에 찬 눈으로 바라봤다.
바야흐로 영웅의 탄생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