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0화
피알루 성벽 위에서는 아직도 소란이 일고 있었다.
자기 자리를 찾아 뛰어다니는 병사들과 하달된 명령을 전달하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하급 지휘관들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린다.
이미 자신의 자리를 잡은 병사들은 무기를 꽉 쥐고 긴장된 눈으로 성벽 너머를 쳐다봤다. 이제 곧 목숨을 담보로 잡고 피와 철, 마법을 교환하는 전투가 펼쳐질 것이다.
지크 일행을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성벽 저 너머를 쳐다보고 있었다.
전투를 앞두고 있는 건 그들도 같았지만 느껴지는 긴장감은 주변에 있는 자들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옅었다.
특히 지크에 있어서는 무슨 피크닉이라도 나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응?’
성가퀴에 몸을 기대 몬스터가 언제 쯤 오려나 기다리던 지크의 감각에 걸리는 게 있었다.
‘저놈도 왔네?’
그렌 제너드와 그 일행이 성벽 위로 올라오는 게 보였다.
‘하긴, 피알루에 출몰하는 몬스터들을 퇴치하러 왔다는 놈이니 이상할 건 없지.’
그리고 용사로서 명성을 쌓으려면 이런 사건들에 계속 얼굴을 비춰야 한다. 그렌의 참가는 당연했다.
그도 지크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살짝 고개를 숙인다.
지크도 마주 고개를 숙여 줬다. 그게 전부. 둘은 서로를 외면했다.
“너희 둘 관계, 은근히 재미 있는 거 알아?”
“시끄러.”
라일라의 조롱에 지크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러길 얼마. 지크의 눈에 무언가 검은 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크는 성가퀴에서 등을 떼고 윈두르를 손에 쥐었다.
“준비해라.”
지크의 명령에 일행이 전투 준비를 했다.
그 모습을 주변의 사람들이 의아하게 쳐다봤다. 아직 그들의 눈에는 몬스터들이 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스르릉!
그렌이 토르니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시야가 뛰어난 순서대로 자신의 무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이 전투 준비를 마쳤을 때, 성벽 너머에는 어마어마한 몬스터들의 해일이 피알루를 향하고 있었다.
“으…!”
“뭐 저리…!”
몬스터들의 수를 확인한 사람들의 안색이 흐려진다. 평생을 살며 볼 몬스터의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몬스터들이 앞다투어 성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전투를 앞두고 다른 사람들보다 담담한 기색을 보이던 지크 일행조차 몬스터들의 수를 보고 얼굴을 굳혔다.
데네스트 산맥에서 내려온 듯 몬스터들은 산맥과 마주보고 있는 성문이 있는 방향에서 출몰했다.
그곳은 도시의 주력이 지키고 있는 곳이다. 지크 일행이 있는 성문은 몬스터들이 달려오는 방향과는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하지만 몬스터들의 수와 기세를 보면 그들이 있는 곳도 전쟁터가 될 거란 걸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몬스터들의 종류는 다양했다. 고블린 같은 소형 몬스터부터 오크, 트롤, 오거 등 잘 알려진 몬스터들에 평범한 사람은 이름 한 번 들어보지 못한 희귀한 몬스터들까지.
생태, 천적, 먹이사슬 같은 것들은 모조리 무시한 채 그것들은 한 덩이가 되어 피알루로 달려왔다.
‘진짜로 위험한 녀석은 없군.’
몬스터들 중에서는 지크조차 위험한 놈들이 있다. 예전에 만났던 크라켄이 그 예다.
하지만 지금 달려오는 놈들 중에 그 정도의 놈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거야 지크 같은 괴물들에게나 해당되는 사항이다. 다른 사람들은 몬스터의 험상궂은 모습을 보고 떨리는 몸을 애써 다잡았다.
미친 듯 달려오는 몬스터들이 드디어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다.
“발사!”
성벽에서 화살이 쏘아졌다. 날카로운 화살촉이 달려들던 몬스터들에게 이빨을 드러냈다.
퍼억! 퍼억!
크엑!
캬악!
화살에 맞은 몬스터들이 더러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그것들은 곧 뒤에서 밀려온 몬스터들의 발에 짓밟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졌다.
그러나 그런 몬스터는 그리 많지 않았다. 화살은 고블린, 코볼트 같은 소형 몬스터들에겐 충분한 위력을 내보였지만 오크 정도만 돼도 효과가 극도로 떨어졌다.
질긴 가죽과 단단한 근육에 화살촉이 대부분 막혔다. 치명상을 입은 녀석도 있었지만 몬스터 특유의 징그러울 정도로 끈질긴 생명력으로 계속 움직였다. 하지만 아예 통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기에 병사들은 계속해서 화살을 쏘아댔다.
그러나 몬스터들이 성문에 도달하는 것을 막진 못 했다.
콰앙!
가장 앞서서 달려온 오거가 성문에 몸을 세게 부딪쳤다. 단단한 나무와 쇠를 몇 겹을 겹쳐 덧대 만들어진 성문이 크게 흔들렸다.
다행히 부서지진 않았다. 그러나 오거도 포기하지 않았다.
콰앙! 콰앙!
오거가 계속해서 주먹으로 성문을 두드린다. 옆으로 다른 몬스터들도 끼어들었다.
트롤이 어디선가 뽑아든 통나무로 성문을 두들겼다. 작은 몬스터들은 커다란 몬스터들의 다리 사이로 들어가 들고 있던 조잡한 무기로 성문을 찍어댔다.
공격은 성문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몬스터들이 성벽에 달라붙었다.
자연석을 쌓아 만든 성벽은 울퉁불퉁했다. 그렇다고 디딤대로 쓰기 쉬울 정도로 요철이 생성된 건 아니다. 경사도도 수직에 가까워 올라가기 쉬운 구조는 절대로 아니었다.
하지만 몇몇 몬스터들은 그런 성벽이라도 잘만 붙어 올라왔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우어어어!
크아아아!
성벽에 다다른 몬스터들이 성벽을 두드린다. 하지만 성문과는 달리 육중한 돌들이 차곡차곡 쌓인 성벽은 쉽사리 붕괴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대형 몬스터들이 옆에 있던 소형 몬스터를 잡아 성벽 위로 휙휙 던져댔다.
퍼억!
콰직!
물론 어떤 안전장치도 배려도 없이 그저 무작정 던져진 소형 몬스터들이 멀쩡하게 성벽 위에 올라설 순 없었다.
성벽에 떨어져 그대로 목숨이 끊기거나 어딘가 크게 다쳤다. 그러나 소수는 나름 전투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상태로 성벽 위에 떨어졌고, 그것들은 분명 피알루에 크나 큰 위험을 안겼다.
몬스터들은 성벽을 두들기는 동료 몬스터의 몸에 올라타기도 했다.
중형 몬스터만 해도 인간보다 덩치가 크다. 몬스터들이 동료들의 위로 올라가기 시작하자 금세 성벽 위까지 손이 닿았다.
전략도 전술도 없는 막무가내식 돌진이었지만 몬스터들의 공격은 피알루의 전력을 차츰차츰 깎아내리고 있었다.
공격은 데네스트 산맥 쪽 성벽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성을 공격하는 몬스터들이 성벽 아래 가득 들어차 전진할 수가 없자 몬스터들은 그 옆으로 계속해서 이동해가며 도시를 공략했다.
지크 일행이 있는 곳까지 몬스터들이 들어차는 것도 멀지 않아 보였다.
몬스터들의 살벌한 공격에 사람들의 긴장감이 최고조로 달렸다. 지크는 몬스터들이 도시를 공략하는 모습을 쳐다봤다.
‘흐음, 도시를 함락할 정도는 아니군.’
몬스터들이 많기는 하다지만 인간들이 지키고 있는 피알루의 거대한 성벽을 넘을 정도로까지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피해는 만만치 않을 터. 벌써부터 공격을 받고 있는 성벽에서는 비명, 고함소리와 함께 유혈이 낭자하고 있었다.
“라일라.”
“알았어.”
말을 할 필요도 없다. 라일라는 지크의 말을 듣고는 바로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몸에 흐르는 마력에 집중하며 영창을 한다. 차분하게 배열된 마력이 지팡이 끝으로 빨려 들어갔다.
화르르르륵!
그녀의 지팡이 끝에서 엄청난 크기의 불덩이가 생겨났다.
주변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마법사란 인종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은 물론, 몇 번 만나봤던 사람들조차 그녀가 만든 불꽃을 경악과 경이의 시선으로 쳐다봤다.
그 정도로 라일라의 마법은 압도적이었다.
영창이 끝나고 마법이 완성됐다. 라일라는 지팡이를 앞으로 가볍게 휘둘렀다. 그 궤적을 따라 불덩이가 던져졌다.
콰아아아아아앙!
몬스터 무리 한가운데에 떨어진 불덩이는 말 그대로 주변을 화염으로 뒤덮었다. 불덩이에 직접적으로 맞닿은 몬스터들은 즉시 잿더미가 됐고 주변 몬스터들도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
마법의 화염이 수그러들었을 때, 몬스터 무리에 거대한 검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
“…….”
그 위력을 본 사람들은 할 말을 찾지 못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그런 여유도 얼마 가지 않았다. 인간이라면 당장 사기가 꺾여 도망칠 만한 마법 공격에도 몬스터들은 계속해서 공격해 들어왔다.
그리고 드디어 지크 일행이 버티고 선 성벽까지 몰려왔다.
지크는 일행을 돌아봤다.
“뭐, 적당히 열심히 싸워라.”
전쟁 때 내릴 명령이라기엔 너무나 무성의한 명령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조언을 할 정도의 상대도 아니고.’
게다가 상대가 약하다고 방심 같은 걸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가르치지는 않았으니까.
한스와 스녹이 성가퀴에 바짝 붙어 서고 엘레나가 지팡이를 들어 몬스터를 겨눈다. 라일라는 이미 두 번째 주문을 완성한 후였다.
콰아아아앙!
다시 한번 커다란 불꽃이 몬스터들을 폭격했다. 엄청난 수의 몬스터들이 쓸려나갔다.
주변 사람들이 또 한 번 그 가공할 위력에 전율했다. 마법이 아까보다 가까운 곳을 타격한 터라 그 위력을 더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뭣들 하냐! 당장 전투 준비를 해!”
틸이 크게 소리쳐 사람들의 정신을 깨웠다. 역시 500이나 되는 용병단을 이끄는 단장이라고 해야 할까.
틸의 일갈에 사람들이 분분히 움직였다.
‘제법이군.’
지크는 틸을 쳐다봤다. 그는 사방에 명령을 내리면서도 당장 성벽 위로 올라오는 몬스터를 모조리 도살할 기세였다.
‘저 정도면 성벽은 굳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결정을 내리자 지크는 바로 움직였다.
“한스. 스녹.”
“네!”
“네!”
“내려간다.”
그 말만을 남기고 지크가 성가퀴를 훌쩍 넘었다.
당연히 그 너머는 허공이었다. 아래는 몬스터의 무리가 드글거린다. 누가 봐도 그건 자살행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뭐…!”
“어?”
당연히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경악했다.
그러나 뛰어내린 건 지크만이 아니었다. 한스와 스녹도 그를 따라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혹시 공포 때문에 집단자살 충동이라도 생긴 것일까. 주변에 놀란 용병 몇 명이 황급히 성벽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들이 예상한 건 땅에 충돌하기도 전에 몬스터의 손에 채여 갈가리 찢기는 세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목격한 건, 그들의 예상과는 아득히도 다른 결과였다.
콰아아앙!
커다란 폭음이 일었다. 라일라의 마법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이번 폭음도 충분히 컸다.
성벽을 내려다본 용병들은 눈을 크게 떴다. 성벽을 공략하기 위해 우글대는 몬스터의 바다. 그 안에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구멍 안에는 방금 뛰어내린 지크, 한스, 스녹과 함께 형체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찢겨진 몬스터들의 사체가 보였다.
쿠아아아!
우어어어!
지크 일행을 눈치챈 몬스터들이 미친 듯이 달려든다. 거대한 해일에 연약한 가랑잎이 휩쓸려 가듯, 세 사람이 몬스터 무리에 당장이라도 압사될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결과는 사람들의 예측을 벗어났다.
콰아아앙!
나뭇가지 같은 검이 주변 지형과 함께 몬스터들을 파괴한다.
서걱!
뿜어진 빛에 휩쓸린 몬스터들이 온몸이 조각난 채 쓰러진다.
콰드득!
치솟아 오른 대지가 몬스터들을 덮어 으깬다.
그렇게 성벽 앞에서 일어난 몬스터 무리 사이의 균열은 천천히 그 세력을 넓히고, 그와 비례해 목격자들의 충격도 점점 커져만 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